〈 25화 〉지리산 던전(4)
방금까지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꿀이 넘쳐흐르던 눈빛이 순식간에 냉정히 손익을 계산하는 사업가의 것으로 바뀌었다. 뭐, 헤르메스는 상인의 신답게 손해보는 거래는 하지 않는다 이거지.
“현자의 돌이라.”
헤르메스의 눈이 나를 스캔하듯 훑어보았다. 현자의 돌과 엘릭서가 올림포스의 12주신에게 그리 구하기 힘든물건은 아니지만, 그건 헤르메스가 제대로 주신으로서 대접을 받고 있을 때의 일이고.
지금 헤르메스는 대부분의 권능을 빼앗기고 헤라의 황금 의자에 구속당해 유폐된 상태. 내 눈 앞에 있는 이 모습은 진정한 본신이 아니다. 설화형 던전이라는 특이성 덕에 현현할 수 있었을 뿐이지. 즉, 현재헤르메스에게 현자의 돌과 엘릭서는 꽤나 큰 투자라는 거다. 반란을 준비하고 있어 한 푼의 자원이라도 아쉽다면 더더욱.
“그래. 그걸 원한다는 말이지.”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헤르메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진지한 표정도 잠시, 이내 헤르메스는 넉살 좋게 웃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유감이지만 내게는 더 이상 그게 남아있지 않단다. 유폐당하면서 가지고 있던 물건을 전부 빼앗겨버렸거든.”
부끄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이는 헤르메스를 바라보았다. 능청스러운 시선 속에, 차갑게 나를 가늠하는 눈빛이 엿보였다. 가지고 싶으면, 먼저 가치를 증명하라는 건가. 어디까지 알고 있나 시험해보겠다 이거지?
“새로 만들어 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란다. 이런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내 본신은 지금 올림포스에 유폐당한 상태거든.”
태연스럽게 자신의 치부를 밝히며 헤르메스가 웃어보였다. 아, 뭐 좋아.
“그래, 그 정도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변하지 않은 내 얼굴을 보고 헤르메스가 말했다.
“알고 있다니 편하겠구나. 현자의 돌과 엘릭서가 정확히 무슨 물건인지는 알고 있느냐?”
알아. 새끼야. 설마 그것도 모르고 달라고 하겠냐?
뭐, 모르는 사람을 위해 짧게 설명하자면, 연금술이라는 건 애초에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한 길이다. 즉, 하나부터열까지, 그 모두가 신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라는 거지.
먼저 현자의 돌, 비금속을 금속으로 변화시키는 그 물건은 신의 권능. 물질창생의 힘을 의미한다. 제 1질료. 모든 물질의 근원을 뜻대로다룰 수 있는 권능. 그게 바로 현자의 돌이다.
둘째로 엘릭서, 복용자에게 불로를 보장하는 그 물건은 신의 육체를 의미한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헤라클레스가 있다. 죽고 나서 영혼 상태로 올림포스에 올라온 헤라클레스는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통해 진정한 신으로 재탄생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마그눔 오푸스(Magnum opus). 현자의 돌을 만들어내는 업적을 의미하는 단어로, 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인간의 영혼은 그 업적을 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진정한 신의 영혼으로 거듭난다.
그 세 가지. 권능, 육신, 영혼이 모두 초월을 이루면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신이 될 수 있다. 신으로서의 불멸의 권능을 누릴 수 있다는 거지.
‘뭐, 그래봤자 원작 후반부에선 다 죽어나가지만.’
단순히 불멸성만으로 뻐팅길 수 있으면 왜 이 세계가 배드엔딩이겠냐.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으로 얻는 불멸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내 말을 듣고, 처음으로 헤르메스의 눈에 놀람이 깃들었다. 날카롭게 변한 시선을 마주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넥타르와 암브로시아가 보장해주는 불멸성은 결국 그리스 신화의 것. 다른 신화와 부딪히면 효력이 없죠.”
“…그래. 알고 있었구나.”
그리고 더해서, 불멸성이라는 건 예로부터 필멸에 매우 취약한 권능이거든. 아킬레우스와 파리스의 독 화살, 발두르와 미스텔테인처럼 말이야. 불멸성을 얻을 경우, 그런 무기를 맞닥뜨리면 천적 앞의 먹잇감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헤르메스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떻게 알았을지는 유추하기 쉽지.애초에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라는 명칭 자체가 헤르메스와 토트의 융합을 의미하니까. 그게 의미하는 건.
내 눈 앞의 이 신은 다른 신화의 신을 먹어치웠다.
‘미친 새끼.’
신이 다른 신화의 신을 먹어치운다는 건 본인의 정체성마저 포기한다는 것. 그 덕에 그리스 신화에 완전히 구속당하는 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토트의 힘을 이용하면, 신화의 속박도 어느정도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그래봤자야.’
지금은 올림포스의 12주신이기에 체면을 봐서 헤라의 황금 의자 따위로 구속했을 뿐이지만, 토트의 힘을 사용해서 그 구속에서 벗어나는 순간. 헤르메스는 제우스에 의해 곧바로 타르타로스에 처박힐거다. 토트의 힘을 먹어치웠다고는 하지만 제우스는 이길 수 없으니까.
그리고 여기에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거래조건이 있다.
“그를 아시기에, 헤르메스 님께서도 토트 신의 힘을 취하셨겠죠.”
그리스 신들을 진정으로 멸하려면 다른 신화의 힘이 필요하니까.
내 말을 들은 헤르메스의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놀란 표정을 짓기도 잠시, 이내 내가 언급한 연금술의 지식을 고려하면 그럴만 하다고 생각했는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너는 방금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느냐?”
‘됐다.’
협박까지 한다는 건, 나를 아래로 내려다보는게 아니라 동등한 거래 주체로 보기 시작했다는 뜻. 찌를 듯 쏘아보는 시선을 마주하고 입을 열었다.
“이 사실이 걸릴 경우, 헤르메스 님의 행동이 단순 일탈이 아니라 반역으로 간주되어 타르타로스에 감금되실 거란 것도 알고 있죠.”
“…하!”
기대 이상이라는 듯 웃음을 내뱉은 헤르메스는 이내 나를 바라보며 사납게 웃었다.
“그래, 그 사실을 모두 알면서도 내게 자백한다는 건 무슨 뜻이지? 설마, 방금 전 쌓은 알량한 정으로 내가 살려줄거라고 생각한 게냐?”
당연히 아니지. 기본적으로 신념에 미친 인종은 가족이건 친우건 모두 버려버릴 수 있는 족속. 그들한테 중요한 건 오로지 목표 뿐이다.
“기회가 필요하시잖아요? 올림포스를 탈출하기 위한 기회가.”
제우스가 올림포스에 거하고 있는 한, 헤르메스는 탈출할 수 없다. 올림포스의 모든 신을 합쳐도 제우스에겐 이길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헤르메스가 탈출하려면, 제우스가 올림포스에서 자리를 비울 필요가 있다. 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 이 세 신을 제외하면 헤르메스는 절대 붙잡히지 않을 테니까. '전령'의 신 답게.
“제가 제우스를 올림포스에서 빼내드릴 수 있습니다.”
“…네가?”
우습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헤르메스의 시선을 마주하고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원작, [아카데미의 낙제생]에서 네가 말했지. 이도영에겐 가이아의 권능이 잠재되어 있다고. 그리고 그 힘을 이용하면 제우스가 올림포스에서 빠져나올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
‘뭐, 이도영의 힘은 딱히 그리스 신화에서 근거한 건 아니지만.’
헤르메스가 언급한 가이아는, ‘신’이라기 보다는 자연 그 자체를 의미하는 ‘개념’. 딱히 그리스 신화에 얽매이는 힘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얽매이는 게 아니라 역으로 신화를 얽맬수도 있는 힘이지.
나는 헤르메스를 지긋이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원하신다면 스틱스 강에 맹세라도 해드릴 수 있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스틱스 강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본능적으로 움찔한 헤르메스를 바라보며 맹랑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아니면 딱히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
내 말을 들은 헤르메스가 표정을 굳혔다. 그래봤자 할 수 있는 건 없겠지만. 애초에 나 정도로 헤르메스의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애초에 지금 헤르메스에게 다른 방법을 택할 여력도 없고. 금도끼 은도끼 설화처럼 개구멍을 이용해 간접적으로 모습을 비추는 게 한계인데, 이 상황에서는 결국 내가 최선의 수다.
“하하하, 그래. 맞는말이구나.”
나를 노려보던 헤르메스가 손익계산을 마쳤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얼굴에서 숨어있는 차가운 시선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네가 최선의 선택이라는 건 알겠구나. 하지만, 나에게는 정말 남아있는물건이 없단다. 내 사정을 알고 있으니 이해하기 쉽겠지.”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말하는 헤르메스를 보며 코웃음을 흘렸다. 마지막까지 주도권 싸움을 해보겠다는 건가. 뭐, 좋아. 헤르메스에게서 떨어져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프리기아의 왕, 미다스는 디오니소스께 소원을 빌어, 만진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드는 능력을 얻었죠.”
마치 동화책을 읽는 듯한 어조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헤르메스에게서 몸을 돌렸다.
“자신의 딸조차 황금 동상으로 만들어버린 미다스는 후회하며 한 번 더 디오니소스께 빌었죠. 제발 이 힘을 지워달라고.”
가져온 가방에서 준비물을 꺼냈다. 내 손에 들린 물건을 바라보는 헤르메스의 얼굴에 놀람이 깃들었다.
“디오니소스께서 말씀하시길, 스틱스 강에서 손을 씻으면 그 능력이 사라질 것이라.”
강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헤르메스가 나를 보며 패배감과 기쁨이 공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미다스 왕은 스틱스 강에서 손을 씻어 자신의 능력을 없애버렸습니다.”
재미있는 점 몇 가지를 알려주자면. 미다스의 능력은 ‘황금이 아닌 것을 황금으로 만드는 힘’이다. 그리고 현자의 돌의 능력은 ‘비금속을 금과 은으로 만드는 힘’이지. 그리고 금도끼 은도끼 설화의 배경은 ‘강가’다. 그리고 그 설화는 쇠도끼를 금도끼와 은도끼로 바꾸는 이야기.
강가에 바로 앞에 서서, 헤르메스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읊조렸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는 자신의 자식을 스틱스 강에 담가 무적의 몸으로 만들었죠.”
내 손에 들린 준비물, 아기를 본딴 인체모형의 발목을 붙잡고 강물에 담갔다. 그 순간, 강가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까보다 한참 넓어진 강가에서 등을 돌려 헤르메스를 바라보았다.
“자,이제 제가 받을 물건이 생겼네요.”
그렇게 말하며 처음 헤르메스가 내게 지었던 미소를 흉내내자, 헤르메스가 못 참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