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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화 〉지리산 던전(5) (26/167)



〈 26화 〉지리산 던전(5)

“하하하핫! 그래. 전부 알고 있었구나!”

뭐야 이 새끼.

헤르메스가 박장대소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겨룬 주도권 싸움에서 밀렸다는 아쉬움은 온데간데 없이, 통쾌하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음, 역시 손익 계산을 끝낸 모양이네.

엘릭서를 내어주는 건 큰 손실이지만, 그 대신 협력자가 어느 정도인지 알았으니 오히려 이득이라 이건가. 아까까지 눈에 깃들어 있던 서늘함은 사라지고, 다시 온기가 깃든 눈빛으로 되돌아온 헤르메스의 입이 열렸다.

“좋아. 어떻게 그 많은 정보를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너보다 나은 선택지는 내게 없는 듯 싶구나. 그래. 넘겨주겠다. 하지만,  전에 하나만 말해주도록 하마.”

어찌나 시원하게 웃었는지 눈에 고인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낸 헤르메스가,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건 현자의 돌과 엘릭서 중 하나 뿐이다.”

음? 이건 예상 못했는데. 인상을 찌푸리며 헤르메스를 바라보자, 헤르메스가 말을 이었다.

“알고 있겠지만, 엘릭서는 현자의 돌을 재료로 넥타르를 모조한 물건이다.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현자의 돌은 하나 뿐이지.”

아, 그래.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다.

“현자의 돌을 받아갈지. 아니면 엘릭서를 연성해서 받아갈지 고르라는 의미시군요.”

“…그래. 그 말대로다.”

헤르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딱히. 엘릭서 하나만 얻어도 괜찮긴 했지만 역시나 조금아쉽긴 하네. 눈썹을 좁히는  모습을 보고 헤르메스가 눈을 피했다. 이거 참. 아까까지만 해도 날카롭더만, 다시 푼수가 됐네. 어디까지가 연기인 거지?

“그 대신 하나  말해주도록 하마. 너는 엘릭서를 사용해도 큰 효과를 보지 못할거다.”

엥? 예상치 못한 말에 다시 한 번 헤르메스를 바라보았다. 아, 설마. 엘릭서는 인간의 몸을 신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물건. 그리고  몸뚱아리는 루시아 그란데우스의 것이다. 일단은 초월에 달했던 강자의 육신이라는 거지. 그런 것 치고는  약하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건.

“이미 육신이 완성되어 있다는 건가요.”

“그래. 육신이 그 정도 경지에 이른 것 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발휘하고 있는 힘이 약하지만, 네 육신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엘릭서를 복용한다 해도 그리 큰 변화가 있진 않겠지.”

이거 참, 기이할 정도로 약하다니. 신의 입으로 못을 박으니 조금 웃기긴 하다.

‘그거야 업적 시스템을 열고 스텟을 올리면 되니까.’

시스템이 불완전한게 문제겠지. 대신, 완성된 육체라는  한계가 매우 높다는 뜻이니까 뭐, 시스템만 복구하면 충분히 강해질  있을테니 그리 아쉽지는 않다. 애초에 엘릭서는 내가 먹으려던 것도 아니었고.

“그러면 역시 현자의 돌을 가져가겠….”

“엘릭서를 받겠습니다.”

자신의 말을 듣고도 엘릭서를 선택할 줄은 몰랐다는 듯, 헤르메스가 잠시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말을 하려는  입을 여는 헤르메스의 말을 끊고, 내 말을 이었다.

“제가 먹을 게 아니거든요. 그걸 가질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엘릭서를 먹는 걔가 댁하고의 약속을 지킬 키 포인트기도 하고 말이야. 내 말을 들은 헤르메스는 놀랍다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으음, 수염 하나 없는 남자가 저러는 건 되게 안 어울리는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순간.

나를 바라보던 헤르메스의 얼굴 바로 위에, 순간 반투명한 개코원숭이의 형상이 떠올랐다.

‘토트의 힘인가.’

헤르메스의 눈과 개코원숭이의 눈, 총합 4개의 눈이 나를 바라보았다. 속을 파헤치는 듯한 눈빛에 표정을 구기기도 잠시, 이내 헤르메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원숭이의 형상을 지웠다. 감동이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헤르메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설마 엘릭서를, 그 귀중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말이냐?”

“예.”

내 대답을 들은 헤르메스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 뭔가 이상한 오해를 산 모양인데. 그리고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타락했다는 인간들 중에서도 이런 이가 있거늘….”

어, 그런 아닌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닌데. 내가 변명할 겨를도 없이, 헤르메스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이래서 미친 놈들이랑은 말을 섞으면 안되는 건데.

분노로 가득 찬 눈을  채 한참을 침묵하던 헤르메스가, 이내 나를 바라보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허 참, 텐션 따라가기가 힘드네.

“그래, 주마! 주고 말고! 하하하!”

내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헤르메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겁나 아파. 힘 조절 안하냐? 갑자기 밀려온 충격에 헤르메스를 쏘아보자, 미안하다는 듯 손을  번 저은 헤르메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엘릭서를 달라고 했지? 주마. 주도록 하지.”

좋아, 오늘 여기에  목적은 달성했다. 첫 번째. 이도영의 각성을 도울 엘릭서도 확보했고, 두 번째. 숲에서 마나가 충분히 회복되는 것도 확인했다. 아,  나온 김에, 시스템 복구에 마나가 얼마나 쌓였는지 확인해볼까.

[현재 보유중인 마나]

20/20

[보유 마나 1000을 이용해서 스킬 탭을 복구할 수 있습니다.]

5/1000

[보유 마나 3000을 이용해서 포인트 시스템을 복구할 수 있습니다.]

15/3000

어라?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감았다가 다시 바라보았다. 뭐야 시발. 왜 회복이  된 거야? 지금까지 있었던 시간을 감안하면, 이것보다 한참은 많이 회복되었어야 하는데.

예상치 못한 사태에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아까까지는 체감하지 못했지만, 지금 숨 쉬는 일에 집중하자, 호흡할 때의 불쾌감도 마나를 흡수할 때의 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 지금 소량 마나가 회복된  가져온 교복 덕분인건가?

뭐지? 던전 안에서는 마나를 회복할 수 없는 건가? 그렇다고 치기엔, 지금 호흡에서 불쾌감이 느껴지진 않는 게 걸리는데.

내가 한참 생각에 빠져있던 도중, 헤르메스가 손에 든 지팡이를 휘둘렀다. 강렬한 빛이 뿜어져나와 강가를 덮치고, 이내 반으로 갈라진 강 밑바닥에서 원형의 보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현실적인 광경에 하던 생각조차 멈추고 감탄을 흘렸다.

‘저게 현자의 돌인가….’

헤르메스는 손바닥을 뻗어 허공에 떠 있는 보석을 잡아채었다.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자 이내 헤르메스가 지팡이를 한   휘둘렀다. 헤르메스의 머리에 개코원숭이의 형상이 겹쳐지고, 허공에 수백 개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모여들어라.”

파아아아앗!

헤르메스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허공에 그려진 수백 개의 마법진이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지고, 이내 하나로 합쳐진 마법진이 작은 석판의 형태를 이루었다. 저게 바로 모든 마법이기록되어 있다는 토트의 서. 다른 명칭은.

“에메랄드 타블렛.”

헤르메스가 한 번 더 중얼거리고, 손에 든 현자의 돌을 허공에 둥둥 띄웠다. 그리고 헤르메스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석판에서 어마어마한 빛이 뿜어져 현자의 돌에 직격했다.

콰아아아앙!

막대한 마력이 휘몰아치는 게 톡톡히 느껴졌다. 내 몸을 덮쳐오는 강렬한 감각에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한참 후, 헤르메스가 가볍게 손을 들자 허공에서 모여든 빛무리가 유리병으로 화했다.

“자, 이게 엘릭서란다.”

티 하나 없이 맑은 유리병에, 오색의 액체가 담겼다. 모여든 빛무리가 코르크 마개가 되어 유리병의 입구를 막았다. 찰랑거리는 액체가 담긴 유리병을 내게 내밀며, 헤르메스가 입을 열었다.

와, 이펙트 개쩌네. 감탄의 탄성을 흘리며 유리병을 받아들려는 찰나, 헤르메스가 손을 뒤로 뺐다. 헛손질에 표정을 찌푸리자, 헤르메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 전에, 하나만 약속해다오.”

약속?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을 보고 헤르메스가 말을 이었다.

“진정으로 내가 올림포스를 탈출할 수 있게 돕겠다고 약속해다오.”

이제 와서 불안한 모양이네. 귀찮게. 표정을 능숙히 숨기고 입을 열었다.

“약속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제가 헤르메스님을 돕는 대신 엘릭서를 받는 거래.”

헤르메스는 상인의 신. 언제라도 깨질 수 있는 단순한 약속보다는 둘 모두 이득을 얻는 거래를 선호한다. 내 말을들은 헤르메스의 눈이 가볍게 휘었다.

“좋아. 그러면 계약으로 하자꾸나. 나는 네게 엘릭서를 넘기고 너는 내가 올림포스를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것으로.”

헤르메스가 내미는 엘릭서를 받아들고 고개를 끄덕였다. 뭐, 진짜 도울 생각이었으니까. 헤르메스는 나중에  필요해지거든. 유리병을 소중히 가방 안에 넣은 뒤, 입을 열었다.

“네. ‘계약’하도록 하죠.”

그리고  순간.

[정령술(SS)가 적용됩니다.]

[마나가 부족합니다. 계약에 실패하였습니다.]

몸 안의 마나가 모조리 빨려나가는 감각과 함께, 순간 정신을 잃었다.

아니, 뭔, 씹….



***

가방에서 찰랑거리는 엘릭서를 들고 지리산에서 내려왔다. 산에서 내려오자 다시 느껴지는 매캐한 공기에 좋았던기분이 수직으로 떨어져내렸다. 빠르게 이동해 기차역까지 도달했다.

예약해뒀던 기차에 탑승한 뒤, 창가에 앉아 바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아, 더럽게 시끄럽네 진짜. 아까부터 흥분하셨는지 잡담을 멈추지않는 ‘신’의 목소리에 표정을 찡그렸다.

[오오, 이게 인간들의 문물이구나! 이렇게나 발전하다니!]

그 말만 몇 번인데 대체. 아니, 계약 실패했다며. 실패했는데 왜 이러는 건데? 애초에 정령술이 왜 신한테 먹히는 건데?

[참으로 굉장하구나! 이리도 높은 건물이라니! 말 없이 달리는 철마차라니! 고작 수천 년만에 인간들은 이 정도로 발전했단 말이냐!]

  없는 짜증을 부리기도 잠시, 계속해서 울려퍼지는 수다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헤르메스 진짜 미친 새끼. 정신 나갈거 같아.

제발 좀 닥쳐. 이 개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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