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헤르메스(1)
끊임 없이 떠드는 헤르메스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기차에서 내렸다. 어둑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근처 패스트푸드 점에서 끼니를 때웠다.
[오오, 이것이 인간들의 음식이란 말이냐! 참으로 신기하구나. 이렇게 음식이 빨리 나오다니!]
감탄을 흘리는 헤르메스의 말을 흘려넘기고 햄버거를 한 입 베어물었다. 매콤한 크리스피 치킨의 맛을 느끼며 빠르게 식사를 마쳤다.
[참으로 진미로구나. 그리고 그 검은 물은 무엇이란 말이냐? 처음 보았을 땐 독극물인줄 알았건만, 이리도 달콤한 맛이 나다니!]
아, 제발 조용히 해주라. 머리가 다 아프네.
*
날이 완전히 저물고 나서야 기숙사에 도착했다. 그나마 통금이 없는 게 다행인가. 기숙사로 들어오고 나서, 매캐하지 않은 공기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아….”
피곤해.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진짜 머리가 윙윙 울리는 것 같아. 한숨을 한 번 내뱉은 뒤, 내 두통의 주범에게 말을 걸었다.
“헤르메스 님.”
[왜 부르느냐?]
왜 부르긴 왜 불러. 관음증 새끼야. 눈깔 치우라고 불렀지. 적당히 순화해서 의도를 전하자, 이내 헤르메스가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래, 내가 오랜만에 느끼는 현계의 감각에 네게 너무 부담을 준 모양이구나.]
알면 눈깔치우지 그러냐?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헤르메스가 말을 이었다.
[그래. 감각 공유가 불편하다고?]
“예.”
시도 때도 없이 말하는 것도 시끄럽지만, 네가 보고 있으면 씻지도 못하잖아. 내가 남자였던 거랑은 별개로 내 몸을 저새끼한테 보여주고 싶지는 않다. 아니, 애초에 남자라고 해도 생판 남이 뻔히 들여다보는데 샤워하진 않잖아. 상식적으로.
[그래. 하지만 이 연결은 내 쪽에서 건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간섭하는 건 무리란다. 본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몰라도, 알다시피 내 본신은 유폐된 상태니까 말이다.]
아, 그래서 눈깔을 못 치우시겠다? 어이가 없어지는 대답에 표정이 싸늘히 식기도 잠시. 헤르메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네 쪽에서 막도록 하려무나.]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하냐고. 답답한 마음에 시선을 돌려시스템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정보에 신음을 흘렸다.
[현재 보유중인 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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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잠깐만. 생각해보니 지리산에서 마나를 채우고 오는 걸 깜빡했네. 헤르메스 이 새끼만 아니었어도. 아니, 애초에 얘한테 정령술만 적용되지 않았어도 마나를 쓸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
몰려오는 짜증에 머리를 부여잡았다가 이내 진정하고 눈을 감았다. 그래. 지금 짜증내봐야 뭐가 바뀌겠냐. 그거 말고 이 감각 공유부터 어떻게든 하는 게 낫지. 눈을 감고 집중하자, 헤르메스와 나를 연결하고 있는 패스가 느껴졌다.
[정령술(SS)가 적용됩니다.]
[마나가 매우 부족합니다. 정령술(SS)가 정령술(F)로 하향됩니다.]
몸 안의 마나를 끌어올려 집중하자 본능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아, 이거구나. 생각보다 적은 마나 소모량에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시스템이 인도하는 방법대로 패스를조작했다.
[흠, 역시….]
흥미로워하는 듯, 탄성 섞인 헤르메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확실히 정보를 보낸다는 느낌이 사라진 걸 직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샤워부터 해야지. 겁나 찝찝해.
*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들려오는 헤르메스의 잡담에 귀를 틀어막아봤지만 딱히 효과는 없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연결을 막아버리자, 그제서야 정리된 머리 속 상황에 표정을 풀었다. 아, 조용하니까 이제야 살겠네. 어, 잠깐.
잠에 들기 직전, 갑작스레 자각한 사실에 몸을 일으켰다. 어라, 방금 전에 마나를 안 쓰고 연결을 조정한 것 같은데?
시선을 돌려 시스템을 확인하자 확실히 마나가 아까 전 그대로 남아있었다. 뭐야. 이게 된다고? 다시 한 번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방금 전 조정한 연결을 다시 조정해 보았다.
‘되네?’
쉽게 성공을 거두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어라. 이게 되네. 그러고보니.
‘능력 측정 시험 때도 이런 느낌이 있었지.’
분명 궁술이 완전히 제한된 상태였는데, 표적을 맞추진 못해도 적어도 활로 화살을쏘아낼 순 있었다. 그 전까지는 화살을 활대에 제대로 걸지도 못했다는 걸 감안하면 일취월장했다고 할만한 성취.
‘설마 스킬이 몸에 체화가 된다고?’
여태까지 알아채지 못한 나도 멍청이긴 한데. 이게 된다고? 황급히 스킬 창을 바라보았지만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착각인가? 아니야.’
착각이 아니다. 지금도 내가 패스를 조정할 수 있는 걸 보면 절대 착각이 아니다. 그보다는 시스템은 단순히 내 몸을 보정해주는 역할이고, 내가 직접 발휘하는 기술에는 간섭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게 맞겠지.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적당히 마나만 채워서 시스템 보정으로 싸우는 게최선이라 생각해서 마나를 최대한 아꼈었는데, 이러면 진짜 이야기가 달라지지. 스킬을 사용할수록 몸에 체화가 된다면 최대한 많이 사용해서 몸에 체화하는 게 맞다.
‘내가 직접 사용하는 기술은 마나 소모가 없으니까.’
방금 전 패스 조정처럼 내가 궁술을 사용하는데 마나 소모가 없다면? 이러면 전투 지속력이 어마어마하게 올라가지. 내궁술 실력이 D+ 까지만 간다고 쳐도 신입생들 사이에선 마나를 소모할 필요가 거의 없으니까.
‘마나 회복 횟수 자체로만 따지면 존버가 이득이지만.’
하지만 내 상대는 동급생들만은 아니니까. 언제까지고 마나 조루로 있을 수는 없다. 뭐, 시스템이 완전히 복구가 끝나면 마나통을 늘릴방법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아직 모르는 일이니.
‘최소한의 실력은 쌓아두는게 맞겠지.’
애초에 여태까지 너무 안일했어. 시스템 보정만이 정답인 줄 알았는데 다른 대안이 생겼다면 한 번쯤은 찍어먹어 봐야지. 혹시 모르잖아. 시스템이 갑자기 사라질지도.
‘이 시스템을 누가 준 건지도 모르고 말이야.’
빙의하기 직전의 상황을 되새겨보았다. [아카데미의 낙제생]의 작가와 연중해놓고 남의 소설이나 보고 있냐고 댓글을 달았던 내 소설의 독자. 아마 정황상 시스템을 내게 준 건 그 둘 중 하나겠지만,둘 중 누구인지는 모른다. 뭐, 그걸 안다고 딱히 달라지는 건 없겠다만.
‘아무튼, 훈련을 하긴 해야겠네.’
최소한 궁술은 어느정도 체화해 두는 게 좋겠다. 정령술은 헤르메스와의 계약 시도이후로는 패스 조정 외에 전혀 느껴지는 게 없지만, 적어도 궁술은 자주 쓸 테니까 말이야.
생각을 마치고 침대에 누워 다시 눈을 감았다. 아, 모르겠다. 일단 잠부터 잘래.
*
아침이 되어 찌뿌둥한 몸으로 기지개를 피며 몸을 일으켰다. 아, 어제 생각했던 대로 훈련이라도갈까. 그런데 문제는.
‘이도영 이 새끼, 아직 안 왔잖아.’
아마 고아원에서 자고 올 테니까. 오늘 저녁에야 오겠는데. 김유진도 뭐 마찬가지일테고. 뭐, 그러면 기숙사에 짱박혀 있어야겠네. 훈련하기엔 마나도 없고, 밖에 나가면 괜히 숨 쉬기만 힘들어지는 걸.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다시 침대에 앉았다. 그런데 딱히 할 게 없는데. 다른 빙의물 주인공 같으면 주식을 하건, 코인을 하건 해서 돈이라도 벌텐데. 나는 딱히 아는게 없거든. 애초에 소설 읽을 때도 대충 슥슥 훑었는데 기억나는 정보가 있을리가. 메인 스토리 떠올리기도 버거운데.
‘뭐, 그러진 않아도 돈은 꽤 있으니까.’
이 몸뚱아리에 빙의하자마자 확인해본 건데, 생각보다 내 재산이 되게 많더라고. 적어도 배 곯을 일은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피식 웃은 뒤, 헤르메스와의 연결을 다시 조정했다. 통로를 통해 다시 정보가 흘러들어가는 것을 느끼기도 잠시, 이내 머리에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잔 모양이구나. 침대에눕자마자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더니.]
명백하게 삐친 듯한 말투. 아니, 솔직히 사람이 자려는 데 떠드는 니가 잘못한 거 아니냐?
그 생각을 감추고 헤르메스에게 사과를 하려던 순간, 번뜩 스치고 지나간 생각에 입을 닫았다. 그런데 내가 왜 사과를 해야 하지?
‘생각해보면 이제 내가 갑 아닌가? 난 받을 거 다받았잖아.’
엘릭서도 받았고, 약속까지 했는데. 내가 굳이 쩔쩔맬 필요는 없지 않나? 계약서 도장 찍었으면 끝이잖아. 꼬우면 갑 위치를 유지하셨어야지. 차라리 이 참에 길들여 두는게 낫지 않을까? 생각을 정리한 뒤, 헤르메스의 말에 대답하지않으려 입을 꾹 다물었다.
[으음…? 왜 대답이 없느냐?]
한참 후, 헤르메스의 당황한 목소리가 머릿 속에 울려퍼졌다. 응, 대답 안해.
[허, 설마 또 끊어버린 게냐?]
[아니, 통신은 그대로인데?]
[들리느냐? 대답하거라!]
얘 지금 뭐하냐? 신이라는 놈이 보이는 푼수 같은 행동에 벙찌기도 잠시. 한숨을 내뱉고 입을 열었다.
“예. 들립니다.”
[그래! 이제야 들리는 모양이구나?]
아니, 새끼가 또 비꼬네. 표정을 구기고 한참더 말을 씹자 이제서야 자기 처지를 깨달았는지 헤르메스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 좀 해다오…. 왜 아무 말도 않느냐.]
허, 참. 수천 년이나 유폐됐으니 사람이랑 대화가 고프기는 한 모양이네. 그래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가 이 놈의 심심풀이 땅콩이 되고 싶진 않거든. 잠시 후, 적당히 기가 죽었다는 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입을 열었다.
“헤르메스 님.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부탁?]
좀 닥치라고. 아예 조용히 하라곤 안 할 테니까, 제발 말 좀 줄여주라. 완곡하게 표현을 돌려서 뜻을 전하자, 헤르메스가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많이 불편했느냐?]
“예. 솔직히 시끄러워요.”
사실상 존칭의 의미는 개나 줘버린 내 말을 듣고헤르메스가 다시 입을 닫았다. 그래봤자 내가 갑인 건 변함 없지만. 이내 헤르메스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풀 죽은 목소리로 내게 대답했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마. 미안하구나.]
아, 이거 참. 좀 미안하게 하네.
“뭐, 아예 말하지 말란 뜻은 아닙니다. 조금만 주의해달라구요.”
[그, 그래! 알겠다. 조심하도록 하마.]
내 말을 듣고 화색이 도는 헤르메스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가 바로 표정을 굳혔다.
‘지금 그래봤자지.’
이 새끼는 제 목적이랑 상충되는 순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날 죽일 놈이다. 던전 안에서 보았던 광기 어린 시선을 떠올리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뭐, 그래도 내가 헤르메스를 풀어주기 전까지는 협력 관계니까.지나치게 각을 세울 필요도 없지만.
“네, 감사합니다. 저도 상의 없이 통신을 끊는 일은 없도록 하죠.”
[그래, 고맙구나.]
헤르메스에게 대충 사과의 말을 건네고 시간을 때웠다. 이도영이 오기까진 꽤 남았으니까.
‘오면 일단 마나부터 회복해야지.”
여전히 부족하기 그지 없는마나량을 응시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얘 언제 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