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헤르메스(2)
「시아야, 뭐해?」
기숙사 방 안에 가만히 틀어박혀 웹소설을 읽던 도중, 김유진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문자를 보낸 걸 보니 슬슬 학교에 다 와가는 모양이네.
손가락을 움직여 짤막하게 답장을 보냈다.
「기숙사인데. 왜?」
「나 곧 도착할 것 같은데!」
그래서 나와달라고? 문자를 유심히 바라보자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웹소설 읽는 내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해서 길들이기 효과가 좀 있나 싶었는데, 결국 궁금증이 도졌나보네. 뭐, 그래도 아까에 비하면 양반이니까.
[호오, 그건 누가 보낸 것이냐?]
기차에서 내가 핸드폰을 꽤 만지작거린 덕에 핸드폰이 뭔지는 알고 있었다만, 웹서핑이나 웹소설 읽기 말고, 다른 사람에게서 문자가 온 건 지금이 처음이라 그런지 헤르메스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길게 설명하기에는 귀찮아서 짧게 대답했다.
“제 친구요.”
[친구라. 네가 엘릭서를 주겠다고 했던 그 사람을 말하는 게냐?]
“아뇨.”
김유진도 뭐, 먹으면 제값은 하겠지만. 걔한테 먹이기는 좀 아깝지. 내 대답을 듣고 몇 마디를 더 물은 헤르메스는 아까 전 내가 한 말이 이제야 떠올랐는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헤르메스가 말을 걸지 않자 겨우 고요해진 머리에 편안함을 느끼며 김유진과 문자를 몇 장 더 주고 받았다.
「곧 온다고?」
「응! 한 15분쯤 후면 도착할 것 같아!」
뭐, 마중이라도 나와달라는 건가. 상관이야 없다만. 부르는 데 안 나가긴 그렇고.
「그래. 곧 나간다.」
문자를 보내고 몸을 일으켰다. 나가려면 옷부터 입어야지. 핸드폰을 내려놓고 정신을 집중해 헤르메스와의 패스를 조정했다. 그런데 이거 더 빠르게 조정할 방법은 없나. 조금 귀찮은데.
[충분히 빠른 것 같은데 말이다.]
아, 그래.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딱히 방법은 없는 모양이네. 돌아온 반응에 아쉬움을 느끼며 옷을 갈아입었다. 으음, 오래 나가 있을 건 아니니까. 대충 입어도 되겠지.
적당히 옷을 차려입고 기숙사를 나섰다. 언제 마셔도 익숙해지지 않는 외부의 공기에 숨을 잠시 멈췄다. 아, 그런데 이 불쾌한 감각도 공유가 됐을텐데. 어째 얘는 별 말이 없네. 갑작스레 피어오른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헤르메스 님.”
[음? 왜 부르느냐?]
내가 먼저 말 건게 반가운지 꽤나 밝은 목소리. 하기사, 수천 년간 유폐된 상태에서 유일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니까. 사람한테 안 미치고 배기겠냐마는.
“혹시 제가 방금 느낀 감각도 전달이 됐나요?”
[감각? 아, 방금 전 그 불쾌감 말이냐? 그래. 느껴졌단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지자 헤르메스가 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허, 그런 것 치곤 되게 태연한데. 내가 입을 닫자 헤르메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설마 내 걱정을 한 게냐?]
아니, 걱정은 아니고 그냥 궁금했던 건데. 딱히 정정할 필요까진 없어보여 입을 다물자 헤르메스가 말을 이었다.
[뭐,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다. 이 정도 불쾌감이야 오히려 반가울 정도니. 아무 느낌도 없이 황금 의자에 결박되어 있는 것보단 이런 감각이라도 있는게 백 배 낫단다.]
“예.”
아, 그래. 그렇구나. 뭐, 그럼 다행이고. 내 대답을 들은 헤르메스가 다시 떠드는 걸 무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
“시아야-!”
걸음을 옮겨 정문에 도달하자, 김유진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김유진의 실루엣이 보였다.
‘쟤 왜 저러냐.’
무슨 몇 년만의 감동스러운 재회도 아니고, 하루 못 봤으면서 쪽팔리게. 저 하이텐션에 어울리고 싶진 않아 적당히 손을 흔들자 김유진이 내게 달려와서 말을 걸었다.
“주말동안 뭐 했어?”
뭘 하긴. 엘릭서 얻으러 갔다가 잡귀까지 하나 덤으로 들어붙은 채 왔지. 김유진에게 어디까지 말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금요일에 말했던 대로 지리산 등산 갔다왔어. 거기서도 마나 회복이 되더라.”
“어…진짜?”
내 말을 듣자마자 약간 실망한 듯 보이는 김유진의 표정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런 반응이래?
[호오, 불의 정수를 타고난 아이인가.]
그러기도 잠시, 흥미롭다는 듯한 헤르메스의 목소리에 주의를 기울였다. 불의 정수. 아, 화염지신을 말하는 건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꽤나 강력한 힘이로구나. 헤파이스토스가 보면 좋아하겠어.]
당연하지.완전히 개화하면 헤파이스토스랑 맞먹는 수준일텐데. 원작 후반부 김유진의 힘을 생각하면, 방금 저 말은 과소평가도 한참 과소평가다.
“아, 혹시 지리산에서 마나 회복이 되나 알아보러 간거였어?”
어라, 내가 말을 안 했었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애매한 기억에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어.”
“그럼 시아도 지리산에서 오늘 온 거야?”
초롱초롱한 눈으로 김유진이 한 번 더 내게 질문했다.
“아니. 어제 도착해서 잤지.”
“그럼 오늘은 뭐했어?”
뭐 했다고 해야하지. 웹소설 본거 말고는 한게 없는데.
“그냥 기숙사 안에 있었는데.”
그렇게 대답하자 김유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김유진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도중, 갑자기 김유진이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어, 저기 저 애, 도영이 아냐?”
이도영? 저기에?
고개를 돌려 시선을 향하자 익숙한 검녹색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러네. 맞네.
“그런 것 같네.”
“도영이도 지금 들어오나 보네! 가자, 시아야!”
[하하, 참으로 당찬 소녀로다. 불의 기질을 타고난 아이답구나.]
그렇게 말하고 내 손을 잡아끄는 김유진의 손길에 얼떨결에 발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본 헤르메스의 웃음소리가 머리 속에 울려퍼졌다.
그 덕에 내가 힘들지만.
한걸음, 한 걸음. 이도영에게 다가가던 순간, 매캐한 공기가 사라지고 다시 상쾌한 감각이 느껴졌다. 아, 개운해.
하루만에 느끼는 개운한 감각에 다시 미소를 짓던 순간, 머리속에 경악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헤르메스였다.
[잠깐,이 힘은…?]
이제서야 이도영을 알아챈 듯한 목소리였다. 정확히는 자연지체의 힘을 이제서야 알아챈 거겠지. 경악도 잠시, 이내 헤르메스가 광분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핫! 설마 가이아의 힘을 타고난 인간이 있었다고? 그래, 그랬구나! 그랬어! 내게 제우스가 자리를 비우게 할 수 있다던 자신감의 근거가 이 인간이었구나!]
연결된 이후,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감정의 격류가 패스를 타고 내 머릿속에 쏟아져내렸다. 어마어마한 충격에 표정을 찡그렸다. 갑작스레 일그러진 내 얼굴에 김유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헤르메스 이 개새끼가….
“시, 시아야?”
[그래! 저 인간에게 엘릭서를 줄 생각이었구나! 그렇지! 엘릭서가 아까울 리가 있나! 그래, 아까울 리가 없지! 흐하하하하!]
계속해서 머리에 울려퍼지는 광기 어린 웃음에 정신을 집중해 필사적으로 패스를 조정했다. 간신히 내 쪽으로 오는 헤르메스의 감정을 완전히 차단해낸 후에야 숨을 내쉬었다. 차단한 이후에도 아직 여파가 남아있는지, 머리 속이 마치불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와, 진짜. 이 미친 새끼.
“시아야! 괜찮아?”
“시아…? 뭐야, 왜그래?”
긴장이 풀려 휘청거리는 내 몸을 본 김유진이 당황해 목소리를 높였다. 김유진의 목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고개를 돌린 이도영이 나를 바라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아무것도 아냐.”
가까이 다가온 이도영에게서 느껴지는 청량감 덕에 정신이 좀 들어 겨우 말을 뱉었다. 내 대답을 듣고도 이도영과 김유진은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그래. 나라도 방금 전 나처럼 휘청거린 사람이 괜찮다고 하는 걸 믿진 않겠지.
“…진짜 괜찮아. 그냥 잠시 현기증이 있어서그래.”
청량감으로 아직까지 머리에 남은 열감을 빼내려 숨을 들이마시면서 입을 열었다. 내 말을 들은 김유진은 걱정스런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이도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도영아.”
“…왜?”
“시아가 마력이 부족한 모양인데.”
아니, 그거 아닌데. 아무래도 마력 탈진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김유진의 말에 이도영이 난감한 기색을비쳤다. 아니, 나도 사람넘쳐나는 여기서 너한테 코 박을 생각 없어. 새끼야….
내가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 김유진이 답답하다는듯 이도영을 잡아당겼다. 아니, 필요 없다니까.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은 몸을 필사적으로 뒤로 빼서 이도영에게서 떨어지려던 순간이었다.
“…아!’
제대로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발을 헛디디자, 급속도로 몸이 기울었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이도영의 몸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아, 시발. 대가리 박겠네.
-쿠당탕!
나와 이도영이 바닥에 나란히 넘어졌다. 이도영이 완충제가 된 덕에, 내가 바닥에 구르지는 않았다만. 조심스레 눈을 뜨자, 내 시야에 이도영의 어깨가 들어왔다. 아, 이건 또 뭔 거지같은 상황이야. 진짜 별 씹….
“시…시아야…?”
내가 생각한대로 지금 깨나 민망한 자세인 듯, 나를 보며 말을 흐리는 김유진의 목소리에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
“저기, 뭐하는거야?”
무감정한 목소리가내 귀에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위로 향하자, 거의 하얗게 샌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내 눈에 띄었다.
시선을 내리자, 또렷한 고양이상의 이목구비가 보였다. 냉정한 무표정. 새하얀 피부와 차가운 인상을 지닌 미녀. 이설화였다. 시선을 돌려 김유진을 바라보자 예상치 못한 대면에 껄끄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그래. 이도영이랑 같은 고아원 출신이니까. 혹시라도 같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순수하게 내가 뭘 하는지 궁금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이설화의 시선을 차마 받지 못해 눈을 질끈감았다. 진짜. 진짜.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냐.
헤르메스 개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