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헤르메스(3)
‘진짜 내 인생은 왜 이러냐?’
기껏 빙의한 세상의 결말이 세계멸망인 것도 빡치는데, 상태창 한 번 쓰려면 별 엿 같은 제한이 다 붙어있고. 그 제한 때문에 거지 같은 오해도 샀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이거야. 결국 다 어떻게든 해결했으니까. 그런데.
‘왜 매 번 타이밍이 이 따위지?’
굿이라도 해야 하나? 무슨 악령이라도 씌었나? 씌이긴 씌였네. 헤르메스 이 개 같은 새끼.
“저기.”
귓가에 들려온 이설화의 목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갸웃한 이설화가 이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지금 아기 만들기 하는 거야?”
아니 시발 뭐라고?
이설화의 입에서 튀어나온 개소리가 신년 제야의 종을 치듯 내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겼다. 잘못 들었나 싶어 이도영의 얼굴을 바라보자 이 새끼도 나처럼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구나. 이런 씹….
아니, 아니. 잠깐만. 진정하자. 그래, 그런 오해를 할 수도 있지. 그래. 자세가 묘하니까 오해할 수도 있겠지….
‘있겠냐고. 미친년아.’
아니, 상식적으로, 건전한 두뇌로 생각하면 당연히 넘어진 거 아니냐? 대체 뭔 생각을 하고 살아야, 내가 지금 사람이 넘치는 야외에서 그딴 플레이를 즐긴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지?
그리고 아기 만들기는 또 뭔데. 네가 무슨 애새끼냐고. 대체 뭔 어휘선택이야 이게.
지나치게 올라간 혈압에 뒷목이 뻐근해졌다. 백지마낭 하얗게 변했던 머리에 붉은 색물감이 가득 뿌려졌다. 엿 같은 기분에 몸을 다급히 일으킨 순간이었다.
-삐끗
아, 미친.
아까의 후유증이 남아 있었던 다리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급격하게 다시 가까워지는 이도영의 가슴팍을 보며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진짜 헤르메스 이 개새끼….
-빠아악!
“컥…!”
내 대가리가 들이받은 게 꽤나 아픈 모양인지 이도영이 신음성을 내뱉었다. 아니, 그런데 이건 내 탓 아니잖아 솔직히. 아까 부딪혔던 부분을 또 박아버린 탓에 얼얼한 이마를 손으로 부여잡았다.
‘아, 근데 얘 진짜 아파보이긴 하네.’
파들파들거리며 표정을 찌푸리는 이도영을 보며 당황이 솟구쳤다. 아니, 좀 세게 들이받긴 했는데,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지 않나? 혹시 뼈라도 나갔나?
“야…괜찮냐?”
허리를 펴 이도영의 위에 앉은 채,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는 이도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로 아픈 모양인지 대답도 않고 눈을 꿈틀거리는 모습에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부딪혀봐야 얼마나 세게 박았다고.”
한 마디 투덜거리며 내가 들이받았던 가슴팍을 손으로 문질러보았다. 솔직히 모르겠는데. 뭐, 감촉을 보아하니 적어도 갈비뼈가 부러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애초에 부러졌으면 내 이마에 바로 감각이 왔겠지. 그렇게 몇 번 문질러 들이받은 부위를 확인하던 순간이었다.
-탁!
이도영이 부딪힌 부위를 문지르는 내 손을 강하게 쳐냈다.
헐, 어이가 없네. 기껏 걱정을 해줘도 지랄이야.
급격히 불쾌해진 기분에 표정을 굳히자, 이도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입을 열었다. 왜,불편하냐? 그것 참 미안하네.
“저…시아야. 빨리 비켜줄래…?”
아니, 내가 일어나는 건 일어나는 건데, 어디서 명령질이야. 애초에 지금 다리에 힘 풀려서 일어나기가 힘들다고.
내가 눈을 부라리자 이도영이 갑자기 얼굴을 확 붉혔다. 어라, 얼굴을 붉힌다고? 왜 이딴 반응이냐?
예상치 못한 반응에 좁아졌던 시야가 다시 넓어지자, 방금 전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들이 해석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위치라던가. 아니면, 다른 부위의 감각이라던가.
“…음?”
엉덩이에서 느껴진 딱딱한 감촉에 의문 섞인 말을 내뱉었다. 뭐야, 이건.
시선을 내려서 내가 깔고 앉고 있는 부분을 바라보았다. 방금 이마를 이도영의 가슴팍에 들이받은 다음, 그 상태로 바로 몸을 일으킨 탓에 내 엉덩이는 이도영의 하반신을 깔고 앉고 있었다. 즉, 방금 전의 그 감촉은.
“…아.”
이런 미친.
연이어 밀려오는 충격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도영은 내가 그 감각의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걸 눈치 챘는지 수치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진짜 돌겠네.
갑자기 밀려온 짜증에 주먹을 쥐었다. 아니, 근데. 따지자면 얘 잘못은 아니지. 나도 겁나 억울하긴 한데, 엄밀히 따지면 내 잘못이니까. 근데 빡치는 건 어쩔 수가 없네.
참을 인을 되뇌며 주먹에 들어간 힘을 뺐다. 참아라, 물어줄 깽값도 없으니까. 그냥 엘릭서 먹이고 한 대 팰까?
고민하던 와중에 팔에 힘을 줬다 뺀 탓에 몸이 살짝 들썩였다. 그 덕분에 엉덩이에서 엿 같은 감각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아, 진짜 돌겠네.
이제는숫제 죽고 싶다는 표정이 된 이도영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넌 죽고 싶냐? 난 다 죽여버리고 싶은데….
같은 남자였던 덕택에 지금 얘가 무슨 기분일지는 짐작이 갔다. 솔직히 자살 마렵긴 하겠네.차마 이도영을 더 바라볼 수가 없어 시선을 돌렸다.
김유진은 도저히 못 보겠다는 듯 얼굴을 붉힌 채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어이가 없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눈을 가릴 거면 제대로 가리던가.’
왜 힐끔힐끔 손가락사이로 쳐다보는 거냐? 쟤는.
할 말을 잃은 채 굳어 있는 내게, 이설화가 환한 웃음을 보냈다. 넌 또 뭔데. 왜 웃는데.
“아기 만들기 하는 거 맞네!”
넌 시발 그 입 좀 닥쳐 제발….
*
어찌어찌 몸을 일으킨 뒤, 이도영에게서 조금 떨어졌다. 마나 회복이고 뭐고, 지금 옆에 붙어 있으면 내가 쟤를 죽여버릴 것 같았거든. 진짜, 인생 왜 이따위냐고.
불쾌한 공기가느껴지지 않는 한에서 최대한 몸을 떨어뜨린 뒤, 이설화를 바라보았다.
“야.”
“응?”
태연스레 나를 바라보는 이설화의 시선에열불이 뻗쳤다. 내가 살다살다 별 소리를 다 들어보네. 슬슬 몰리기 시작한 시선에 안 그래도 더러웠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 입을 열어 욕설을 뱉으려던 순간, 김유진이 내게 말을 걸었다.
“저…시아야?”
“왜.”
“일단 자리를 좀 옮기지 않을래?”
아, 그래.
그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자, 확실히 시선이 쏠리기 시작하는 게 느껴졌다. 이 쪽을 향하는 수십 쌍에 눈길에 뒷골이 다시 땡기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은 남한테 왜 이리 관심이 많아.’
그 와중에 김유진의 말을 들은 이도영이 그제서야 시선을 깨달았는지수치스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와, 진짜 돌겠네. 그냥 다 꺼져주면 안되나.
갑작스레 밀려온 두통에 아직까지 욱신거리는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 순간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이설화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게 질문했다.
“저기, 혹시 둘은 사귀는 사이야?”
아,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얘는 입만 열면 헛소리가 나오네.
골 때리는 헛소리에 멍한 표정을 짓자, 내가 정곡을 찔렸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이설화가 살짝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콧대를 세운 이설화가 설교하듯 내게 입을 열었다.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도 그런 짓을 밖에서 하면 안 돼.”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감았다. 아, 내가 방금 또 뭔 소리를 들은거냐. 삐걱거리는 뇌로 간신히 해석을 마치자마자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이거 그냥 싸우자는 거 맞지? 그치?
“야 이 개….”
“서, 설화야, 잠깐만…!”
내가 입을 열자마자 이도영이 식은땀을 흘리며 내 말을 가로챘다. 내 노려보는 시선을 가로막은 이도영이 해명을 시작했다.
“왜?”
“저…나랑 시아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거든…?”
그 말을 들은 이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면 사귀지도 않는데 그런 짓을 한 거야?”
돌겠네 진짜. 나랑 비슷한 감상을 느꼈는지, 이도영과 김유진도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마법사는 보통 머리 좋은 애들 아니냐? 김유진도 그렇고, 이설화도 그렇고. 왜 한 군데씩 맛이 가 있는 건데. 속으로 그런 푸념을 늘어놓던 중, 이도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그러니까….”
“야, 비켜.”
별 해명 같지도 않은 해명을 하고 있냐 얘는. 당황한 표정을 짓는 이도영을 끌어서 치운 뒤, 이설화를 바라보았다.
“네가 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오해?”
내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갸웃하는 이설화. 아, 스트레스로 머리가 다 지끈거리네. 이러다 제 명에 못 살 것 같다.
“나는 얘랑 사귀는 것도 아니고, 방금 전에 네가 말한 것처럼 그…딴 짓거리도 안 했어.”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 뭣 같아서 말끝을 흐렸다. 내 대답을 들은 이설화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방금 전엔 도영이랑 뭘 한 거야?”
뭘 하긴 뭘 해. 그냥 넘어진거지. 내가 대답하려던 순간, 김유진이 먼저 대답했다.
“그, 그건 시아가 마력 탈진이 있어서…그냥 넘어진 거야!”
이설화와 눈을마주치기는 부담스럽다는 듯 시선을 약간 피하며 말하는 김유진.
아니, 마력 탈진 아니라고. 왜 사족을 붙이는데. 아 잠깐만, 변명 사유가 마력 탈진? 아, 망했네.
내가 그렇게 직감한 순간, 이설화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열었다.
“거짓말.”
“…응?”
당황한 김유진에게서 시선을 뗀 이설화가 이번엔 나를 바라보았다.
“마력 탈진이라고 하기에는 충분히 마력이 많은걸.”
“으응…?”
그 말을 들은 김유진과 이도영이 내게 눈을 향했다. 그 시선도 잠시,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김유진이 다시 이설화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지자, 이내 이 쪽을 향해 시선이 더 쏠리기 시작했다. 흥미 가득한 눈길에 두통이 밀려왔다.
“그…도영아, 일단 자리를 좀 옮길까?”
“…그래.”
“…?”
“아니….”
지들끼리 의견을 맞춘 이도영과 김유진이 먼저 자리를 피했다. 뒤를 따르는 나와 이설화에게 필사적으로 주의를 향하지 않는 둘의 모습에 뒷목이 또 뻐근해졌다.
‘와, 사람 병신 만들기 쉽구나.’
이게 삼인성호(三人成虎)인가. 진짜 돌겠네.
그냥 다 죽여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