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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화 〉헤르메스(4) (30/167)



〈 30화 〉헤르메스(4)

얼마 가지 않아 인적 없는 장소가 나왔다. 아, 그런데 여기 거기네. 이도영한테 처음 코 박고 마나를 회복했던 곳. 아, 생각하니까 또 개 같네.

이도영에게 시선을 옮기자, 얘도 여기가 어딘지 알아챈 모양인지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뭐, 새끼야. 뭐.

침묵도 잠시, 이내 이설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기로 온거야?”

그걸 몰라서 묻나. 진짜 몰라서 묻는다는 게 더 어이가 없네. 백치미 캐릭터를 현실에서 보면 얼마나 빡치는지 깨닫게 해줘서 너무 고맙다. 응, 너무 고마워.

“저…먼저 물어볼 게 있는데.”

속으로 짜증을 곱씹던 중 김유진이 입을 열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이설화에게 사감이 조금 섞인 듯,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며 김유진이 질문했다.

“네가 시아가 마력 탈진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아?”

아니, 그러니까 나는 마력 탈진이라 한 적 없다고.

“마력이 많이 남아 있는게 보이니까.”

나와 김유진을 번갈아 응시한 이설화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 의미 모를 대답에 김유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보인다고?”

“응.”

무감정한 목소리로 대답한 이설화를 바라보며 김유진이 입을 열려던 순간, 이설화가 왼쪽 눈을 감았다.

“나는 마력을 볼  있어.”

그 말과 동시에 이설화가 눈을 뜨자, 왼쪽 눈이 맹금류의 것처럼 변했다. 눈에서 느껴지는 방대한 마력 파동에 살짝 압박감이 느껴졌다. 와, 쎄네.

그래, 저게 이설화의 진짜 재능이지. 빙설지체는 저 힘의 파편에 불과하니까. 뭐, 굳이 따지자면 김유진도 마찬가지지만, 얘는 각성하려면 한참 남았고.

‘토트의눈.’

달을 상징하는 호루스의 왼쪽 눈. 토트의 힘이 깃들어 소유주에게 어마어마한 마법 적성을 부여하는 힘이 바로  눈깔이다. 물론, 모 만화처럼 뽑아서 자기 눈깔에 끼운다고 뺏어  순 없지만.

“…그건…?”

“내 특성이야.”

그나저나 토트의 힘이라, 설마 헤르메스 이 새끼. 보고 있으려나? 갑자기 든 의심에 이설화의 눈을 노려보자, 이내 힘이 다 했는지 맹금류처럼 변했던 이설화의 눈이 평범한 사람의 눈으로 되돌아왔다.

“내가 보기에 저 애는 마력이 충분한 걸. 마력 탈진이 왔을 리가 없어.”

그 말을 들은 이도영과 김유진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았다. 퍼포먼스가 화려하니까 신빙성이 넘치는 모양이네. 허, 참. 내게 향해지는 의심이 진하게 묻어나는 눈길에 어이가 없어 입을 열었다. 뭐지?  어이 없는 상황은?

“야.”

내 생각보다 차가운 목소리에 당혹을 느끼기도 잠시, 은근슬쩍 내 눈을 피하는 김유진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마력 탈진이라고 한 적 있냐?”

“아니….”

없지 당연히.

내 표정을 본 김유진이 이내 주눅 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나는 그냥 주말동안 마력 회복을 못 했을 테니까…미안….”

말하다 말고 이설화의 눈치를 보더니 급하게 사과로 말을 끝맺은 김유진. 아, 마력 회복. 지가 밝히긴 애매하다 이건가.

이도영을 노려보자 마찬가지로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니, 사과를 빨리 박아서 뭐라 하기도 뭐하게 만드네.

“…그래.”

한숨을 내쉰 뒤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자 김유진이 그제야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김유진이 다시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 그런데 그럼 아까 왜 휘청거린 거야?”

아, 이걸 뭐라고 해야하나. 헤르메스 얘기는 좀 곤란한데. 적어도 지금 계약 관계니까, 최소한의 비밀 보장은 지켜줘야 하거든. 솔직히 계약이고 뭐고 깨버리고 싶기는 한데. 아직은 유용하니까.

“…머리가 아파서.”

아, 그런데 딱히 할 변명이 없네. 성의 없는 대답에 벙찐 표정을 짓는 김유진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도영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화제를 돌리는  낫겠구만 뭐.

“그래서 둘은 무슨 관계냐?”

나야 무슨 관계인지 알긴 하지만, 모르는 척 하기도 귀찮으니까 그냥 지금 간단히 해두지. 갑작스레 자신에게 날아온 화살에 이도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그게.”

이도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뭐, 같은 고아원 출신이라는 걸 밝히는 건, 결국 이설화도 고아라는 걸 밝히는 거니까. 남의 사정을 함부로 말하긴 그렇지? 이설화가 딱히 그런  신경  성격은 아니겠지만.

“나?”

내 질문을 들은 이설화가 가볍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가만히 눈을 마주하자 이설화는 이내 아리송한 표정을 짓더니 이도영을 힐끔거리고 입을 열었다.

“같은 출신? 동포?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러게. 뭐라고 해야 하냐? 소꿉친구라기에는 막상 어릴  만난 적은 없고, 남이라고 하기에는 같은 고아원 출신이라는 게 걸린다. 뭐, 원작에서 나온 서술을 보면 고아원 아이들은 전부 가족 같은 사이라고 했으니까, 이산가족이라고 해야 하나? 알게 뭐야.

“저…설화야.”

“응?”

이설화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속말을 하는 이도영을 보고, 방금 전까지 처져있던 김유진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이건 확실히 질투인  같은데.

‘그런데  갑자기  쳐다보냐?’

뭐, 도와달라고? 난 그런 거 못해. 뾰족하게 눈을 뜨고 이도영을 바라보다, 이내 나를 바라보는 김유진을 무시하고 팔짱을 꼈다.

“응, 상관 없는데.”

“그…그래?”

그 사이, 이도영과 이설화 사이에서 몇 마디 작은 대화가 오간 후, 이설화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담백한 반응에 살짝 당황한 이도영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나랑 설화는 같은 고아원 출신이야.”

“…진짜?”

이도영의 말을 들은 김유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 나는 알고 있는데 뭘 놀라. 물끄러미 이도영을 바라보자 이도영이 티나게 내 시선을 피했다. 이건 좀 기분 나쁘네?

“그, 그럼 둘은 소꿉친구…같은 거야?”

이설화와 나를 힐끔힐끔 번갈아 보던 김유진이 말을 이었다. 으음, 뭐. 소꿉친구 속성은 강력하니까. 불안할 수도 있겠네. 나야 관심 없다만.

“그건 아니야.”

“나, 도영이를 본건 어제가 처음인데.”

이도영의 부정과 동시에 이설화가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김유진이 그러면 무슨 관계냐는 표정을 지었다.

“…같은 고아원 출신이긴 한데, 내가 고아원으로 가기 전에 설화는 입양을 갔거든.”

“아.”

이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김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김유진을 보던 이설화가 내게 시선을 옮겼다.

“그럼 이번엔 내가 물어볼래.”

“뭐.”

나를 가만히 쳐다보는 이설화의 시선에 표정을 살짝 찌푸렸다. 이번엔 또 뭔 개소리를 하려고.

“너 혹시 도영이 좋아해?”

“아니.”

즉답으로 대답했다. 그래,  이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화도 안 나네. 내 대답을 들은 이설화의 표정에 살짝 당황이 비쳤다.

“이상하네.”

‘이상한 건 야외 플레이를 바로 떠올리는  대가리가 아닐까.’

어이가 없네. 표정으로 내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자, 이내 이설화가 당혹스럽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진짜 아니야?”

“아니라고.”

대체 몇 번을 대답하게 만드는 거냐. 내 대답을 들은 이설화가 여전히 의문이 남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눈을 돌리자 김유진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뭘 봐.”

툭 말을 던지자 김유진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태클 걸 힘도 남지 않아 다시 시선을 옮겨 상태창을 바라보았다.

[현재 보유중인 마나]

20/20

와, 꽉 찼네. 그나마 유일하게 좋은 소식에 표정을 풀었다. 아, 그나저나 엘릭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안 가지고 나왔는데.

자신이 화제로 오른  민망했는지 뻘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도영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진짜 어떻게 먹이지.’

엘릭서는 섭취한 사람의 육신을 강제로 신의 것으로 뜯어고치는 약. 즉, 먹으면 존나게 아프다.

‘학교에서 먹이면 뒤집어질테고.’

준 다음에 기숙사에서 혼자 먹으라고 그래야 하나? 뭐, 먹을 때 따로 준비물 같은 건 없나?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답도 안 나올 거, 나중에 생각하자. 헤르메스한테 물어보면 되겠지.

‘아, 생각하니까 다시 빡치려고 하네.’

헤르메스 덕분에 생긴 거지 같은 오해를 생각하니까 또다시 뻐근해지는 뒷목에, 손을 들어 가볍게 어깨를 주물렀다. 주의를 돌리자, 이설화와 김유진이 나를 바라보았다.

“왜?”

똑같은 표정을 짓고 나를 쳐다보는 두 사람을 보며 입을 열었다. 라이벌 아니랄까봐 둘이서 똑같네 그냥. 급격히 밀려온 피로에 한숨을 내쉬었다.

“더 할 말은 없는 거지?”

“아…응.”

없으면 이만  가자. 피곤해 죽겠다. 간절한 시선을 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자는 분위기가 잡혔다. 그래. 이제  쉴래.

*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이설화를 보고 입을 열었다.

“야.”

내 말을 들은 이설화가 가만히 멈춰 고개를 갸웃했다.

“넌 왜 따라오냐?”

“나도 이쪽이 기숙사.”

아, 그래? 그건 몰랐네.

김유진은 기숙사에서 안 사니까. 남자 기숙사는 다른 방향이고.

“그러냐.”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다시 앞을 향하자, 이설화가 갑자기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안 그래도 공기 때문에 지치는데  내버려 둬 제발….

“너, 신기해.”

“…뭐가.”

한 번 더 한숨을 내쉬며 이설화의 말에 대답하자, 이설화가 말을 이었다.

“되게 익숙한 느낌. 아까 다른 여자애는 왠지 모르게 불편했는데.”

아, 그래. 그거야  친화력이겠지. 그나저나 김유진은 이름도 몰라? 너무하네 진짜.

“너, 걔 이름 모르냐?”

“…?”

 질문을 듣자 다시 고개를 갸웃하는 이설화. 아, 그래. 내가 알게 뭐냐. 가만히 시선을 돌리자, 이설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이름이 뭐야?”

“유시아.  이름은 이미 아니까 말할 필요 없어.”

귀찮아하는 걸 눈치 첐는지, 대답을 들은 이설화는 더 이상 말을 걸어오진 않았다. 옆에서 유시아. 유시아. 작게 중얼거리긴 했지만.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내가 귀가 좀 좋아서. 겁나 무섭네.

“야.”

“응.”

그래도 말해둘 건 말해 둬야지.

“아까 그 여자애 한테도 신경 좀 써줘라.”

히로인으로도, 전력으로도, 나중에 라이벌이 될 테니까. 미리미리 친해지면 좋잖아.내가 귀찮아질 일도 줄어들 테고. 그리고 김유진 걔, 꽤 인싸니까. 한 번 친해지려고 다가가면 금방 친해지겠지.

대충 그런 설명을 요약해서 전하자, 이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의외로 꽤나 고분고분하게 대답하는 이설화에게 칭찬을 건네주었다. 그래, 착하다. 착해.

*

 방으로 돌아오자 그제서야 풀린 긴장에 늘어지는 몸을 붙들고 욕실로 향했다. 아까 바닥에서 굴렀으니까 몸은 씻어야지. 가볍게 몸을 씻고 침대에 눕자마자 다시 떠오르는 기억에 이불을 걷어찼다.

“아오.  그 지랄을.”

진짜 개 같네. 매일매일이 엿 같아 그냥. 그러고보니 원인은 헤르메스 이 새끼구나?

 새끼만 아니었으면 적어도 바닥에서 구를 일은 없었을 거 아냐. 점점 밀려오는 그라데이션 분노에 막아뒀던 패스를 열었다.  변명을 할 지 들어나 보자.

[아, 드디어 열었구나.]

패스를 열자마자 들린 헤르메스의 태연한 목소리에 표정이 찌푸려졌다. 아니, 사과  하냐?

[하하하, 참으로 흥미롭구나. 가이아의 힘에 더해, 토트의 눈을 지닌 아이라니.]

[그래. 엘릭서는 아직 주지 않은 모양이구나?]

[어찌 대답이 없느냐? 또 삐친 것이냐?]

허, 진짜 사과 안 해? 아니, 그리고 삐쳐? 내가? 와,  새끼 진짜.

변명은 개뿔. 지가 잘못했다는 자각도 없네. 이딴 새끼는 처음인데.

점점 차오르는 빡침에 뒷골이 땡겨오기 시작했다. 또 밀려오는 수치스러운 기억에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이를 빠득 악물고 헤르메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야 이 씹새끼야.”

이 새끼가 진짜 뒤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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