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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화 〉헤르메스(5) (31/167)



〈 31화 〉헤르메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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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설 이후,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당황한 듯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헤르메스를 향해 말을 이었다.

“아, 진짜 사람 빡돌게 하네.”

내 다음 말이 이어지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헤르메스가 당혹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뭐라?]

“뭐. 왜.”

당연하지만 직접적으로 인간에게 욕을 처먹은 적이 없었는지 여전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에 추가타를 넣었다. 내가 꼬우면 네가 어쩔건데?

“우리 상황 정리  해보자. 응?”

[가, 감히…!]

허, 이거 봐라? 아직누가 갑인지 모르나 보네. 애초에 난 받을 거 다 받았거든. 꿀릴 거 하나 없단 말이지.

“와, 인간이나 신이나 똑같다던 놈이,  좀 처먹었다고 감히? 어이가 없네.”

내 말을 듣자마자 할 말이 없는지 헤르메스가 입을 다물었다. 허, 참. 웃기는 놈이네.

“저기요, 우리 계약이 뭐였는지는 기억 나죠? 내가 엘릭서를 받고, 대신 제우스를 올림포스에서 잠시 빼내주기로 한거잖아. 그게 전부죠? 예?”

[그…그렇다.]

“그 계약엔 제가 댁이랑 놀아줄 의무같은 건 없었거든요? 내  맞지? 대답해 봐.”

[대…댁…. 놀아준다니….]

“그럼 내가 너랑 얘기하는 게 재밌었을 거다고 생각하냐?”

어이가 없네. 연설의 신이라는 새끼가 말도 제대로  하는지. 계속 지 할 말만 하는  내가 진심으로 재밌어 할거라고 생각한건가? 아, 연설의 신이라 일반적인 대화는 못하시나?

[그…그랬던 것이냐…?]

진심으로 당황한 듯, 파들파들 떨리는 헤르메스의 목소리를 듣자 그제야 꼬였던 속이 좀 편해졌다. 이제야  개운하네.

“수천 년간 말동무 하나 없었을 거 불쌍해서 좀 놀아줬더니, 통신에다 대고 그딴 짓을 하는데 제가 빡치겠어요,  빡치겠어요?”

[그…그것은….]

“그건 뭐. 어쩌라고.”

말을 더듬으며 당혹감을 표출하는 헤르메스에게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던 헤르메스가 이내 내게 사과를 건넸다.

[미…미안하구나.]

“아, 미안하시구나. 그래, 진짜 미안하세요?”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모양이구나.]

모양? 아무래도?

‘와, 진심 빡돌게 하네.’

내가 오늘  새끼 탓에 겪은 꼬라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열불이 뻗치는데. 지금 내가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화가 났으니까 사과하겠다. 뭐, 이딴 태도로 나오시겠다?

“야, 미안하면 다냐?”

죄송하면군생활 끝나냐고 새끼야.

[그, 그것이….]

“뭘 잘못했다, 다음부턴 어떻게하겠다,  마디도 없이 그냥 미안하다? 내가 잘못한 것 같다? 장난하냐 지금?”

그 말을 들은 이후 할 말을 잃은 헤르메스 덕에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내가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기요.  말 좀 들어보실래요?”

[그, 그래…. 마, 말해보거라.]

“저는 엘릭서 받은 걸로 거래 끝이거든요? 제가 굳이 그쪽이랑 얘기를 더 나눌 이유가 없어요.”

[그…런 것이냐?]

 말을 들은 헤르메스가 급격히 시무룩해진 어조로 대답했다. 뭐야,  새끼 갑자기 왜 이래? 이 정도로 긁으면 이제 좀 화라도  줄 알았는데.

“굳이 제가 패스를 막지 않은 건, 그냥 댁이 불쌍해서 그런거에요. 수천 년간 가만히 갇혀 있는게 답답할까봐.”

뭐, 사실 그 이유로 내버려 둔 건 아니지만. 꼴에 신이라고 아는 건 많으니까 좀 도움 좀 받으려고 했지. 지혜의 신인 토트를 먹어치운 놈이니, 사실상 백과사전이거든.

“그런데 댁이 오늘처럼 저를 방해하면 좀 곤란하거든요? 솔직히 그냥 연결 통로를 막아버려도 저는 상관 없어요.”

[…미안하구나.]

완전히 풀 죽은 목소리. 아, 이 정도로 꺾었으면 된 것 같은데. 너무 고분고분한 반응이라 좀 애매하긴 하다만. 일단 시도해볼까.

“뭐, 그렇다고 제가 앞으로 진짜 연결을 끊어버리겠다는 건 아니에요.”

내 말을 듣자마자, 축 처져있던 헤르메스가 화색이 도는 목소리로 내게 되물었다.

[그, 그러하냐?]

흐음, 확실히 대화에 굶주리긴 한 모양이네. 하기사, 떠돌이의 신이란 놈이 골방에 몇천 년을 처박혀 있는데. 답답해 죽을 것 같겠지. 채찍 다음엔 당근. 간단한 대화술이다.

“예.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조건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급변했다. 갑자기 팍 식어버린 헤르메스의 목소리에 살짝 당황스러운 감정이 들었다. 뭐야, 얘 갑자기  이래?

“어…. 그러니까 이것도 하나의 거래라고 보시면 되겠네요.”

[그래, ‘거래’인가.]

아니, 진짜 왜 이런 반응이야? 저번에 거래 얘기를 했을  좋아했잖아. 상인의 신 답게 행동하라고. 아니 이거 설마.

‘벌써 신격에 침식 당하기 시작했나?’

지리산에서 돌아오고지금까지, 그 사이에 상인의 신이라는 정체성이 망가졌다면 납득이 간다. 자신의 영혼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는 권능을 남용한다면, 그 반동으로 영혼이 망가져 버리니까. 그래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라면 납득할 수는 있다. 있는데.

‘벌써 그럴 리가 없는데?’

그건 권능을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사용했을 때의 일이고, 지금처럼 원작 초반부에 그럴 리가 없다. 아직까지 본신이 유폐당한 상태인데, 그 상태에서 과하게 권능을 사용할 일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아니, 잠깐. 설마 이거 그거냐?

‘설마  이틀 사이에 탈출 시도라도 한 건가?’

아, 그건 진짜 곤란해지는데. 표정을 찌푸리고 헤르메스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왜 그러느냐?]

이상할 정도로 차갑게 식은 목소리. 아까까지 허둥대던 놈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반쯤 확신이 섰다. 갑자기 이렇게 감정이 휙휙 바뀐다 이거지.

‘권능으로 인한 영혼 붕괴의 초반 증상이 감정조절 실패 아닌가?’

이 새끼. 진짜 탈옥 시도라도 한거야? 그건 진짜 곤란한데.

“혹시 저랑 거래한 이후 탈출 시도 하신 적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지?]

뭔 소리기는. 네가 혹시라도 타르타로스에 처박혀 있을까봐 그러지. 여전히 차가운 반응을 아랑곳 않고말을 이었다.

“아니, 그냥 갑자기 걱정이 돼서….”

[…걱정?]

내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풀리는 목소리. 아, 이 새끼. 맛 간거 보니까 진짜 권능 쓴 것 같은데. 설마 진짜 탈옥 시도라도  거 아니야?

[걱정할 필요 없다. 그런 일은 없었으니.]

헤르메스가 갑작스레 풀린 목소리로 내게 대답했다. 아니, 이걸 믿어도 되나? 진짜  맛 간 것 같은데.

“그럼 다행이지만….”

[그래. 네가 열심히 해주어야, 내가 벗어날  있지 않겠느냐?]

아, 시발. 탈출은 개뿔. 그럴리가 없지. 그냥 낚시였구나.

완전히 부드럽게 변한 헤르메스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깨달았다. 와, 이거 연기였네.

하, 언제 풀어줄거냐고 압박이라도 넣어 보시겠다? 누가 상인의 신 아니랄까봐. 마지막까지 주도권 싸움질인가. 참, 대단하네.

‘이거 참, 한 방 먹었네.’

말을 채찍과 당근으로 길들이려다가, 불시에 뒷발차기라도 맞은 상황인가. 그래, 꼴에 상인의 신이라 이거지. 여전히 내가 우위긴 하지만, 역시 방심하면 안되겠네.

풀어졌던 긴장을 다시 다잡은 뒤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럼 다시 거래 조건을 말하도록 할게요.”

[그래, 그러려무나.]

느긋하게 변한 목소리에 확신이 섰다. 역시, 방심하면 안되겠네. 한 번 틈을 내주면 뜯어먹힌다. 머리를 차갑게 식힌  말을 이었다.

“먼저, 아까처럼 과한 감정표현은 자제해주세요.”

[으음…그래. 미안하구나.]

흐음, 그래도 의외로 꽤 고분고분하네? 별 잡음 없이 긍정을 표하는 헤르메스의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번째 조건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아예 하지 말라고는 안 할테니, 너무 자주 말을 걸진 말아주세요.”

[…알겠다.]

뭐, 새끼야. 이게 본론인데. 너 때문에 머리가 아파서  수가 없다고. 헤르메스의 떨떠름한 반응에 표정을 구겼다. 아, 그래. 그러시다면당근이라도 하나 더 던져 줘야지.

“그 대신, 저도 앞으로는 종종 말을 걸어드릴테니까요.”

예를 들어 궁금한 걸 물어본다던지 말이야. 거래 조건으로 내세웠지만, 따져보면 사실 나한테 이득인 조건이다. 뭐, 대화에 굶주린 우리 신께는 좋은 일이니, 윈윈이 아닐까? 맞는 걸로 치자.

[그, 그래? 그래준다면 고맙겠구나.]

오케이. 딜. 역시나. 좋아할 줄 알았다니까. 긍정적인 태도에 손뼉을 한 번 치고 합의를 마쳤다. 거래 당사자 둘이 납득했으면 끝이지 뭐.

*


[그래. 참으로 흥미롭기 그지없구나. 인간에게 가이아의 힘이 깃들다니.]

아, 예상보다 빡세네.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하는 헤르메스의 수다를 받아주기도 잠시, 어마어마한 정보 폭격에 피곤해져 침대에 드러누웠다.

“예, 그렇군요….”

[그리고 불의 힘을 지닌 아이 말고도, 토트의 눈을 가진 아이도 있더구나.]

그래. 이설화 말이지. 나도 알아.

[으음? 놀란 기색이 없는 걸 보면 역시 알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하하하, 참으로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 흥미롭기 짝이 없구나.]

“아, 예….”

[그래, 거기다 그런 아이들마저 빛을 바래게 하는 존재라니. 가이아의 권능이라니. 기대 이상의 성과로구나.]

그래. 좋단다. 신나서 떠들기 시작하는 헤르메스의 반응에 한숨을 내뱉었다. 어울려주기 더럽게 힘드네 진짜.

[그런데, 그 아이에게 엘릭서를 먹일 계획인 게냐?]

그러기도 잠시, 한참을 떠들던 헤르메스가 갑자기 진중한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당연한  아냐? 걔 아니면 누굴 먹여.

“예. 그러려고 했는데요. 왜요?”

아, 먹였을 때 고통 때문에 그러나? 나도 그거 어떻게 해결할지 물어보려고 하긴 했는데. 까먹고 있었네.

대충 납득하고 입을 열려던 순간, 헤르메스가 말을 이었다.

[먹이지 않는 게 좋을 게다. 적어도 지금은.]

뭐?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움찔한 찰나, 헤르메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먹이면 가이아의 권능을 활용할  없게 될 테니.]

아니,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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