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변화(2)
‘얘는 또 왜 이래.’
이 얘기 저번에도 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건 그렇고.
‘왜 이리 자존감이 낮아?’
원작에선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진짜 내가 문제인가? 아니, 좋으면 좋았지, 딱히 나쁜 일은 한 적도 없는데 이러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나를 묵묵히 바라보는 이도영을 올려다보았다. 불안감에 차 있는 눈빛. 꽤나 창백한 표정으로 가볍게 몸을 떨고 있다. 이 정도로 긴장하면서 대답을 기다릴 질문은 아닌 것 같은데.
가만히 이도영의 반응을 관찰하다 입을 열었다.
“왜 내가 너한테 잘해주냐고?”
“…그래.”
글쎄. 내가 그렇게 잘해줬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기껏해야 던전 체험 지휘 맡긴 게 전부 아냐? 그것도 그냥 내가 하기 싫어서 맡긴 거고. 그거 말고 내가 얘한테 뭐 해준게 있나? 엘릭서?
‘그건 아직 먹이긴 커녕 존재도 모르는 상황이고.’
진짜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 반응에 이도영의 표정이 점점 우울하게 처지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개복치도 아니고.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는 건데?”
제대로 짐작이 가지 않아 일단 질문을 던졌다. 내 대답을 들은 이도영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나는 약하고 재능도 없잖아. 기껏해야 마나 회복 말고는 쓸모도 없고.”
아, 그래. 정확히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얘 멘탈이 깨졌다는 건 알겠다.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한숨 소리를 들은 이도영의 몸이 작게 움찔했다. 아, 진짜. 숨도 마음대로 못 쉬겠네.
“내가 정확히 너한테 뭘 해줬는데?”
일단 이것부터 좀 물어보자. 나는 내가 뭘 해줬다는 건지 잘 모르겠거든. 내 말을 들은 이도영이 머뭇거리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던전에서 나한테 지휘는 왜 맡긴 거야?”
아니, 이 얘기 얼마 전에 했잖아. 그렇게 생각하며 얼마 전 했던 말을 다시 말하던 도중 말을 끊었다.
“말했잖아. 나는 필기는 젬병이라….”
아, 젠장. 그러고보니 얘도 내 시험지 봤댔지. 난처해진 내 표정을 본 이도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실례인건 알지만, 유진이랑 같이 네 시험지를 몰래 확인해봤어…. 만점이더라고.”
아, 진짜 만점이야? 헤르메스 이 미친 재능충 같으니. 놀람 섞인 내 표정을 바라보며 이도영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정작 필기 점수는 한참 낮더라. 필기는 왜 일부러 틀린 거야? 나 때문에?”
이건 또 뭔 소리야?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이도영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왜 너 때문에 필기를 망쳐?”
순수하게 의문이 담긴 내 시선에 잠시 당황한 기색을 풍긴 이도영이 대답했다.
“그…던전 들어갈 때, 필기는 자신이 없다고 하면서 나한테 지휘를 맡겼잖아.”
아, 그렇긴 한데. 설마 내가 그것 때문에 필기를 일부러 조졌다고 생각하는 거냐? 허 참. 진짜.
‘이게 왜 설득력이 있냐?’
그래. 얘 입장에서 보면 오해할 만 하긴 하네. 그렇게 보면 진짜 그렇게 보여. 내가 대체 언제부터 착각계를 찍고 있었던 거지? 이게 그 경화수월인가 하는 그거냐? 돌겠네진짜.
살짝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 탓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니, 필기를 잘 본건 헤르메스지, 내가 아닌데. 지휘 못하는 것도 사실이고. 이마를 짚었던 손을 떼고 이도영을 바라보았다. 아, 이걸 어디부터 해명해야 하나.
“그래.그, 일단 필기를 망친 건 딱히 너 때문은 아니거든?”
내 말을 들은 이도영이 묵묵히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안 믿는 것 같은데.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그냥 필기까지 잘 보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 그런 거라….”
이게 진짜 동기긴 한데, 생각해보니 이걸 누가 믿냐? 나조차 듣자마자 어이가 없어지는 대답인데.역시나 이도영은 전혀 믿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지휘를 못해서 너한테 맡긴 건 진짜 사실이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해명을 내뱉기도 잠시, 이내 스쳐 지나간 생각에 문득 짜증이 일었다.
‘아니, 근데 이걸 내가 왜 변명해야 되냐?’
어째 분위기가 무거워서 무의식적으로 쩔쩔맸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좀 어이가 없네. 잘해주는 것도 잘못이야? 딱히 진지하게 잘해주려고 뭘 한 적은 없지만. 아무튼 간에.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 표정을 구겼다. 내 반응을 본 이도영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그런데 내가 잘해주는 이유가 왜 궁금한데?”
잘해주면 그냥 고마운 줄 알면 되는 거지. 왜 굳이 따져 묻고 그러냐? 내 대답을 들은 이도영이 고민하는 기색을 풍겼다. 그리고 얼마 후, 이도영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교무실에서 교관님이랑 나눈 대화를 들었어.”
“아.”
이도영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흑역사가 훅 튀어나왔다. 도진 짜증이 순식간에 날아가고, 이내 그 자리를 부끄러움이 채웠다. 아니, 이 상황에서 이걸 꺼낸다고? 얼굴로 몰리기 시작한 혈액 탓에 볼이 급격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인 탓에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한 내 눈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인지, 이도영이 여전히 침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나를 왜 그리 믿어주는지모르겠어.”
난 지금 내 얘기를 엿들었다는 말을 그렇게 당당히 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이 새끼야. 아, 진짜 겁나 쪽팔려. 아니, 진짜 왜 그딴 말을 해서. 그보다 너를 믿는다고? 설마 그 대사냐. 진짜 그 대사까지 들은 거냐? 아, 젠장.
마치 하늘을 뚫어버릴 것처럼 치솟아 오르는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침묵이 이어지기도 잠시, 다시 눈을 뜨자 이내 내 반응을 보고 당황한 이도영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가다듬고 질문을 던졌다.
“…너, 어디부터 어디까지 들었어?”
내 질문을 들은 이도영이 잠깐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니, 어디까지 들었냐고.
“그…나한테 가치가 있다는 말부터….”
그러면 그냥 내가 얘 얼굴에 금칠하는 부분은 다 들은거잖아. 그나마 남자친구니 뭐니 헛소리한 부분은 못 들었다는 게 다행인가. 다행은 개뿔.
부끄러움을 몰아내려 크게 한숨을 한 번 뱉었다. 그런 내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도영이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그, 들으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래.”
뭐, 그래. 엿들었다는 것 자체는 알고 있었으니까. 황급히 변명하는 이도영의 말을 끊었다. 다시 침묵이 흐르고, 이도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네가 묻고 싶은 게 내가 너한테 칭찬을 한 이유야?”
그 말을 들은 이도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얼마나 자존감이 박살나 있길래 칭찬을 해줘도 의심부터 하는 거지. 난감한 기분에 괜히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이도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 진짜 불안하긴 한 모양이네. 내 시선을 마주한 이도영이 입을 열었다.
“나는 약하고 재능도 없어. 그나마 자신 있는 필기도 너보다 못하고…. 그런데 그런 나한테 그렇게 기대를 보내는 이유를 모르겠어.”
내 눈을 마주하던 이도영이 결국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 주눅든 모습이 꽤 불편하게 느껴졌다. 타고난 것만 보면 자신감이 흘러넘쳐도 모자랄 놈이 저러는 걸 보니 좀 그렇긴 하네.
그렇지만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얼마 없다. 가이아의 권능, 엘릭서, 원작, 이런 이야기를 하긴무리가 있거든. 내가 말할 수 있는 범위를 가늠하고 입을 열었다.
“그렇긴 하지.”
내가 긍정할 줄은 몰랐는지 이도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대로야. 너는 약하고 재능도 없어.”
내 말을 들은 이도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막상 내 말을 듣고 나자 꽤나 아픈 모양이었다. 그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며 말을 이었다.
“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그 뿐, 더 이상 따라오긴 힘들겠지.”
“…맞아.”
내 말에 쥐어짜내듯 겨우 대답을 뱉은 이도영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이런 말을 대놓고 들을 줄은 몰랐겠지.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꺾이기 직전까지 몰린 이도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는 그렇게 생각한 모양인데, 사실 그거 착각이거든?”
“…응?”
이도영의 얼굴에서 처참한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당황과 의문이 그 자리를 채웠다.
“네가 재능이 없다는 말, 그거 착각이라고.”
“무슨…말이야…?”
내 말을 들은 이도영의 눈에 짙은 불신이 깔렸다. 뭐, 이렇게 말해봐야 믿기는 힘들겠지.
“너한테는 충분히 재능이 있어. 아직 모를 뿐이지.”
“재능이라고?”
반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도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혀 믿지 못하는 표정. 그 표정으로 이도영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무슨 재능?”
“그건 못 알려줘.”
그렇게 말하자 이도영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 그냥 막무가내 격려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거 아닌데. 쯧, 작게 혀를 찬 후 입을 열었다.
“한 달이야.”
이도영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 반응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한 달 안에 너한테 어떤 재능이 있는지 알 수 있을거야.”
“한 달…?”
꽤나 구체적인 숫자에 다시 신빙성이 생겼는지 이도영의 얼굴에서 우울한 감정이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를 채운 궁금증에 다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다시 물어보면 곤란하거든.
“그리고 내가 말했던 것 같은데? 너는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 도움이 된다고.”
그 말을 들은 이도영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칭찬이 조금 과했나?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제서야 이도영이 다시 표정을 정돈했다.
“뭐, 내가 너한테 잘해준 이유는 그 두 개가 전부야. 마나 회복이랑, 숨겨진 재능. 솔직히 잘해줬다는 게 뭔 소리인가 싶긴 한데. 아무 생각 없이 해준거라.”
“그…그래?”
그 말을 들은 이도영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뭐, 그래도 어찌어찌 성공적으로 달래긴 한 모양이네.
“그래서 더 물어볼 건 없는 거지?”
“어…? 응….”
있어도 이런 분위기에서 말하긴 힘들겠지. 적당히 끝난 모양이네. 알겠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을 챙긴 뒤,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열었다.
“그럼 이만 간다.”
“….”
뭔가 아직 어색한 기미를 보이는 이도영의반응을 무시하고,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인사를 마치고 이만 교실을 나가려다 문득 든 생각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래도 가기 전에 한 마디 더해주는 게 케어에 좋겠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이도영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움찔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하냐, 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오늘도 마나 회복 도와줘서 고마워.”
“…응.”
내 말을 듣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영의 반응을 보고 진짜 교실을 나섰다. 나가자마자 느껴진 매캐한 공기에 표정을 찌푸렸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기숙사로 향했다.
'아, 진짜 더럽게 힘들다.'
이제는 좀 쉬고 싶다. 귀찮아 죽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