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변화(4)
“반갑습니다. 봉사활동 부의 회장, 백소월입니다.”
백소월의 움직임에 따라 어깨까지 내려오는 C컬 펌 단발이 가볍게 살랑거렸다. 허스키한 보이스로 한 마디를 뱉은 백소월이 확인하듯 한 번 더 부실을 가볍게 훑었다.
“봉사활동 부에 새로 가입한 신입생 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또렷한 발음으로 짧게 말을 뱉은 백소월이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순간, 차가워 보이던 인상이 순식간에 다정한 소녀의 얼굴로 뒤바뀌었다.
‘신기할 정도네.’
아까까지의 얼굴이 냉철한 검수의 상이라면, 지금의 얼굴은 자애롭기 그지없는 따뜻한 인상이었다. 주위를 가볍게 둘러보자, 그 급변에 놀란 표정을 지은 이들이 꽤 보였다. 솔직히 놀랄 만하긴 해. 나도 놀랐으니까.
“오늘은 첫날이다 보니, 별다른 활동은 없을 예정입니다. 단순히 안면을 익히기 위해 불렀다고 보셔도 무방해요.”
점점 나긋나긋해지는 목소리. 차분하면서도 느긋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가는 백소월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어째 길어질 것 같거든. 고개를 옆으로 향하자,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도영의 시선이 느껴졌다. 뭘 봐.
“왜?”
“아…아무것도 아냐.”
그럼 왜 쳐다봐? 이해가 안 가네. 표정을 살짝 찌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자 마찬가지로 나를 바라보는 박휘성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넌 또 뭐야.
“뭘 봐.”
“글쎄? 예뻐서?”
아, 시발. 뭐라는 거야, 이 새끼는.
갑작스레 귀에 들려온 역겨운 소리에 표정이 팍 구겨졌다. 나한테만 그렇게 느껴진 게 아닌지, 이도영의 표정도 구겨지는 게 보였다. 진짜, 마인 새끼 아니랄까봐. 거지 같은 소리만 하네.
“야.”
“응?”
“그냥 닥쳐.”
내 말을 들은 박휘성이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와, 진짜 빡치게 하네. 바로 욕설을 내뱉으려다 주위를 둘러보고 목구멍 안으로 꾹 집어삼켰다. 말도 제대로 못 하네 이제.
“농담이야, 농담.”
웃음을 흘리며 박휘성이 미안하다는 듯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진짜 한 대만 치면 안 되나. 제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던 도중, 이설화가 이 쪽을 향해 다가왔다.
“저기.”
“왜.”
넌 또 뭔데. 고개를 갸웃하자 이설화가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봉사활동 좋아해?”
“아니.”
싫어해. 귀찮거든. 내 즉답을 들은 이설화와 박휘성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아니, 왜. 싫어하면 오면 안 되냐?
“그래?”
“어.”
“저, 저기 그럼 왜 봉사활동 부에 들어온거야?”
내 대답을 들은 박휘성이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글쎄. 내가 그걸 대답해 줄 필요가 있나. 침묵도 잠시, 이내 동조하듯 나를 바라보는 이설화의 시선에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그냥 얘 따라왔어.”
손으로 이도영을 가리킨 채 대답을 내뱉자, 이도영이 뻘쭘하다는 듯 볼을 긁적였다. 내 대답을 들은 이설화가 고개를 다시 갸웃했다. 아니, 왜.
“저번엔 사귀는 사이 아니라며? 그 사이에 사귀기로 했어?”
아, 진짜 돌겠네. 다시 밀려오는 두통에 손을 이마에 얹었다. 그 질문을 들은 박휘성이나와 이도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니, 네 입장에서야 나랑 이도영이 사귀면 좋긴 하겠지. 이설화가 프리해지니까.
‘그래도 그건 아니지.’
개빡치게 진짜. 별 거지 같은 오해를 또 사네. 저절로 갈리려는 어금니를 최선을 다해 진정시키고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하지만.”
“아니라고.”
내 대답을 들은 이설화가 불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빡치네. 시선을 돌리자 박휘성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아, 그래. 웃기냐? 내가 빡친 게 웃겨? 그래. 마음껏 비웃어라.
아, 진짜 그냥 다 꺼졌으면 좋겠다. 급격히 피곤해진 정신에 고개를 들어 이도영을 바라보자 이도영은 왜인지 모르게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너도 나랑 사귄다는 오해를 사는 건 사절이겠지. 이해할 수 있다. 고백할 생각도 없는데 먼저 차인 기분이라 뭔가 불쾌하긴 한데.
*
얼마간 침묵이 흐르고 백소월의 목소리만 들려오는 부실 내에서 오리엔테이션을 진행 중인 백소월을 바라보았다. 원작에서 이도영이 쟤한테 어떻게 플래그를 꽂았더라? 살짝 눈썹을 좁히고 한참 생각에 빠졌다. 딱히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 그래. 봉사활동이었지.’
이 동아리의 이름은 봉사활동 부지만, 원작의 묘사를 보면 봉사활동에 열심히 임하는 부원은 소수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백소월을 보고 인맥을 쌓기 위해 들어오거나, 봉사활동을 핑계로 적당히 시간을 때우려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럴 거면 다른 부에 들어가는 게 낫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다른 부에서 잘려서 밀려버린 사람도 꽤 된다는 모양이다. 그래도 인원이 남는 곳은 꽤 되는데, 하필 봉사활동 부에 들어오는 건 이해가 안 간다만. 뭐, 봉사활동에 진짜 뜻이 있었던이들도 있긴 있겠지만.
‘사람을 돕는다는 게 그리 쉬운 건 아니라서.’
대부분은 한두 번, 흥미 본위로 참가하다가질려버리거든. 애초에 동정은 휘발성이 강한 감정이니까. 막상 귀찮음을 무릅쓰고 매번 열심히 봉사를 나가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그건 사관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생각을 마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설명에 집중하고 있는 이설화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얘도 이도영이랑 같은 과였지. 같은 고아원 출신이라 그런지, 둘 다 남을 돕는 걸 꽤 좋아한다는 설정이 붙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흥미롭다는 눈으로 계속 이설화를 바라보자, 이설화가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궁금한 거?”
그 반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설화가 뭐가 궁금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
“왜 하필 이 동아리에 들어온 거냐?”
내 질문을 들은 이설화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들어왔냐니?”
“다른 부도 많잖아. 더 재밌어 보이는 동아리도 많고.”
김유진도 그래서 다른 동아리에 들어갔으니까. 뭐, 박휘성이야 이설화를 따라왔을 테니 별 관심 없지만, 이설화에게는 좀 관심이 있다. 물론 뭐라고 대답할 지는 아니까. 별 의미 없는 질문이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쯤 직접 들어보고 싶었어.
“그냥, 다른 사람을 돕는 게 좋아서.”
“그래?”
역시나, 예상 그대로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옮겨 잠시 이도영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원래대로 되돌린 뒤 입을 열었다.
“신기하네. 얘도 똑같은 이유였는데.”
“딱히. 도영이는 원래 그런 애니까.”
언제 봤다고 벌써 그렇게 친해졌대? 신기한 눈빛으로 이설화를 바라보기도 잠시, 이내 박휘성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도 다른 사람 돕는 게 좋아서 들어왔는데. 이거 참 우연이네.”
‘어쩌라고.’
퍽이나 믿을 만하네. 이설화랑 공감대라도 형성해보겠다 이건가. 노력은 꽤 가상해서 측은한 눈빛을 보내주자, 박휘성이 이게 아니라는 듯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너도 그러면 얘랑 잘 어울리겠네. 둘이서 친하게 지내던가.”
반응하기 귀찮아 손으로 이도영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자, 이도영과 박휘성의 얼굴이 동시에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음, 이게 이설화를 두고 벌이는, 성별이 뒤바뀐 캣파이트인가? 뭐, 원작에서 이도영의 행동을 보면 벌써 이설화한테 연애감정이 있을 리는 없으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원작에서 각성한 이후의 이도영은 진짜 심했으니까.
‘솔직히 고자 아닌가 싶을 정도였지.’
하렘물 주인공도 정도가 있지, 히로인이 그렇게 많은데 정작 모든 정신을 수련에만 꼬라박다니. 그 정도면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뭐,그래도 얼마 전 반응을 보면 고자는 아닌 것 같으니 다행인가. 내가 그걸 알게 된 방식이 조금 거지같긴 하지만. 젠장.
갑자기 치밀어 오른 짜증을 뱉어내듯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앞으로 향해 다시 오리엔테이션에 집중했다. 근데 이건 대체 언제 끝나냐?
*
“드디어 끝났네.”
나른한 몸을 일으키며 작게 중얼거리자 옆에 앉은 이도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솔직히 너도 지루했잖아. 괜히 쪽팔리는 기분에 눈을 조금 가늘게 뜨자, 이도영이 당황한 듯 식은 땀을 흘렸다. 그 반응에 피식 웃은 뒤, 기숙사로 향하려던 순간이었다.
“저기, 잠깐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박휘성이었다. 어라, 이설화는 이미 갔는데. 안 따라갔나 보네?
“혹시 지금 시간 있어?”
“아니. 기숙사에서 쉴 건데.”
칼 같은 내 대답에 박휘성이 당황한 듯 잠깐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답해줘서 고마워. 그럼 다음에 보자.”
“그래.”
저럴 거면 왜 온 거야? 멀어지는 박휘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나를 바라보는 이도영의 시선에 의문이 일어났다. 얜 또 왜 이래.
“…저기, 쟤한테 왜 그렇게 차갑게 대하는 거야?”
“그건 왜?”
음, 확실히 좀 칼 같이 자르긴 했지. 마인이랑 괜히 엮이고 싶지는 않아서. 이상하게 보일 정도긴 했나 보다. 고개를 끄덕이자 이도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궁금해서.”
그런데 이걸 뭐라고 답해야 하냐. 마인 예정이라고 솔직히 답하는 건 개소리고, 그렇다고 다른 이유를 대기에는 박휘성을 이렇게 싫어할 이유가 없다. 고민도 잠시, 이내 철면피를 깔기로 결정하고 입을 열었다.
“마음에 안 들어서.”
“…?”
“그냥 저런 타입은 내 취향 아니야.”
애초에 쟤는 너무 인싸잖아. 나 같은 아싸랑 붙으면 아싸는 말라죽는다고. 김유진이야 인싸틱하긴 해도, 진짜인싸는 아니니 버틸 만하다만. 그렇게 대답하자 이도영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나는?”
“너는 괜찮아. 꽤 마음에 드는 타입이거든.”
원작에서 한참 봐서 익숙하기도 하고, 적당히 아싸인 점이 편해서 좋다. 그런 생각을 담아 대답을 건네자, 어째서인지 이도영이 또 얼굴을 붉혔다.
“그…그래?”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반문하는 이도영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니, 근데 얘 진짜 왜 이래? 무슨 병 있나? 모르겠다. 알아서 하겠지.
한숨을 내쉬고 여전히 붉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이도영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난 이만 간다.”
“어, 어. 그래. 잘 가.”
어째 찝찝한 인사를 받고 기숙사로 향했다. 그동안 계속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영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쟤 요즘 좀 이상해.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