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변화(5)
한창 수업에 열중하고 있는 이론 교관의 강의를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깜깜해진 시야 속에서 요 며칠간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봉사활동 부 오리엔테이션에 갔다 온 이후, 지금까지 딱히 별일은 없었다. 뭐, 요즘 이도영이 좀 이상해지긴 했지만, 그게 나한테 나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고, 오히려 덕분에 생활하기 더 편해졌으니 이득이라고 할 수 있겠지.
적당히 생각을 정리하던 도중,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는지 옆에서 김유진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밥 먹으러 가자!”
여느 때와 같이 활기찬 목소리, 나를 부르는 김유진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일으키자 어느새 이미 내게 가까이 다가온 이도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어났어?”
“어, 그래.”
애초에 잔 것도 아닌데. 딱히 아니라고 반박하기 귀찮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을 들은 이도영이 묵묵히 옆에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교실을 나가자마자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잠깐만.”
이번엔 또 뭐야. 꽤 익숙한 중저음에 고개를 돌리자 몇 번 봤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박휘성이었다.
“…뭐야?”
딱히 볼 일은 없을 텐데. 고개를 갸웃하자 박휘성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식사 좀 같이할 수 있을까?”
“아니, 선약이 있어서.”
내가 너랑 단둘이 밥을 왜 먹냐. 빠르게 거절의 뜻을 표하자 박휘성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아, 단둘이 먹자는 뜻은 아니었어. 그냥, 오늘 너희랑 같이 먹을 수 있을까 해서.”
식사를? 굳이 왜? 그 대답도 딱히 이해가 가는 대답은 아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박휘성을 바라보자 박휘성이 부담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 반응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응.”
내 반문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는 박휘성. 진짜 무슨 목적이지.
“그런데 왜 같이 먹자는 건데?”
“아….”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무슨 꿍꿍이냐는 듯 매섭게 쏘아보자 이내 박휘성이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그…내일이 봉사활동 부 첫 활동이잖아. 그래서 식사하면서 얘기 좀 할까 해서. 내 친구들은 봉사활동 부에 가입한 사람이 없거든.”
아, 그래. 그 말을 듣고 나니까 대충 윤곽이 잡혔다. 저 말이 전부 진짜는 아닐지라도, 핵심이 봉사활동 부인 건 맞겠지. 아마, 이도영을 염탐해보려는 목적이 아닐까.
‘쟤 입장에서 보면 경쟁자니까.’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일관되게 무관심을 표하는 이설화가 특이하게 이도영한테는 관심을 보였으니까. 초면이 아니란 것 정도는 저번에 대화를 듣다 보니 자연히 알아챘을 거고. 나 참, 노골적이네. 열성이기도 하고.
미묘한 기분이 들어 미지근한 눈빛으로 박휘성을 바라보았다. 뭐, 나야 식사 한 번 정도는 별 상관없지만. 어차피 얘가 마인이 됐을 시점엔 난 학교에 없을 테니까. 생각해보니 그러면 얘를 꼭 피할 필요는 없잖아? 갑자기 든 생각도 잠시, 이내 긍정의 말을 입에 담았다.
“나는 상관없는데, 다른 애들은 어떨지 모르겠네.”
그렇게 말하며 이도영을 바라보자, 이도영은 영 껄끄럽다는 듯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음, 왜지? 나야 그렇다 쳐도, 벌써 얘가 이런 반응이라니.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악감정이 있을 일은 없었을 텐데.’
지금 시점에 마인 계약을 했을 리도 없고, 애초에 무슨 감정이 있기에는 딱히 둘 사이에 접점이 없다. 이설화를 두고 벌이는 경쟁이라고 보기에는 지금 이도영한테 이설화에 대한 연애감정이 있을 리가 없고.
“시아야, 뭐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기도 잠시, 이내 교실에서 나온 김유진이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그러게. 나도 뭐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게 가까이 다가온 김유진에게 간단히 설명을 시작했다.
“얘가 오늘 우리랑 같이 식사하고 싶다는데.”
“아하하. 반가워요.”
손가락으로 박휘성을 가리키며 짤막하게 말을 내뱉자, 박휘성이 머쓱한 듯 웃음을 흘렸다. 아니, 근데 이 새끼 왜 얘한테만 존댓말이지? 어이가 없네.
내 생각도 잠시, 대답을 들은 김유진의 시선이 박휘성을 향했다가 다시 이쪽으로 되돌아왔다. 흥미롭다는 듯 눈을 초롱초롱 빛낸 김유진이 이내 입을 열었다.
“왜?
“아, 우리 셋이 같은 동아리거든요. 내일이 첫날이라 얘기 좀 나눠볼 수 있을까 해서 말이에요.”
“우리도 별로 아는 건 없는데.”
박휘성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도영이 싸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박휘성이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음을 짓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같은 동아리끼리 친해져서 나쁠 건 없잖아?”
“글쎄. 그렇게 따지면 유진이는 다른 동아리인데.”
“엑? 나?”
와, 이 새끼들 무섭네. 말 한마디마다 날이 시퍼렇게 서있다. 그 와중에 갑작스럽게 이야기 화제로 끌려들어 간 김유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김유진의 표정을 눈에 담은 박휘성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럼 더 좋네. 마침 유진 씨와는 친해지고 싶었으니까.”
“유, 유진 씨…?”
예상치 못한 존칭에 당황한 표정을 짓는 김유진을 보며 박휘성이 입을 열었다.
“한국 최고의 마법사, 김시우 님의 따님이시니까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 그렇게 존댓말 할 필요는 없는데….”
부담스럽다는 듯 말을 더듬는 김유진을 보며 박휘성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허, 참. 역시 있는 집 자식이라 이건가. 벌써 인맥 쌓기를 하려 그러네.
‘봉사활동 부 들어온 것도 설마 백소월 때문인 거 아니야?’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이설화겠지만, 지금 하는 행동을 보니 백소월이랑 인맥 쌓으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을 지도 모르겠다. 생각에 잠기기도 잠시, 이내 박휘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말 편하게 할게. 괜찮아?”
“으, 응….”
내가 인싸틱하다고는 했지만, 진짜 인싸한테는 이길 수 없었는지, 김유진이 부담스럽다는 듯 살짝 말을 더듬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박휘성이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오늘 하루만 같이 식사할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며 다시 나를 바라보는 박휘성. 그 모습을 눈에 담은 김유진의 눈에 흥미롭다는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매우 익숙한 전조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상관없어!”
역시, 저럴 줄 알았지. 입가에 싱글거리는 미소를 띤 김유진을 보며 박휘성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 후 내게로 옮겨온 시선에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나도 상관없어.”
그렇게 말하며 이도영을 바라보자 이도영이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음, 진짜 되게 싫은가 보네.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안 되겠다는 축객령을 내리려던 순간이었다.
“…그래. 같이 먹자.”
“고마워.”
무표정한 얼굴로 이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맞서듯 박휘성이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진짜 이 분위기 실화냐. 급격히 싸늘해진 분위기가 불편해 입을 열었다.
“얘기 끝났으면 가자.”
“…그래.”
“잘 부탁해.”
빠르게 대답을 마친 두 남자가 먼저 앞을 향했다. 잠시 시선을 돌려 김유진을 바라보자, 김유진은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쟤는 진짜 매일 꾸준하네. 딱히 뭐라 해줄 말이 없어 그냥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
식당에 도착해 적당히 음식을 고른 뒤 자리로 향했다. 테이블에 도착하자 이도영이 앉으라는 듯 옆자리의 의자를 당겨주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고맙다.”
하지 말라고 해도 해주려고 하길래, 그냥 받기로 했다. 뭐, 지가 해주겠다는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자리에 앉자 이내 음식을 가지고 온 박휘성이 당황한 눈길을 보냈다.
“…둘이 같이 앉아?”
“어.”
그 질문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박휘성이 난감한 눈길로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 자리는 김유진의 옆자리였다. 당황도 잠시, 이내 박휘성이 김유진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 앉았다.
“….”
식사 도중엔 딱히 중요한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뭐, 이도영이랑 박휘성이 기 싸움 하는 꼴이 좀 어이가 없긴 했는데. 암묵적으로 합의를 본 모양인지, 이설화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건 꽤 웃겼다. 흥미롭다는 듯, 둘을 바라보는 김유진에게 시선을 옮긴 뒤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아, 그보다 동아리 핑계로 왔으면서 봉사활동 부 얘기는 하나도 없네. 나 참.
생각을 이어가며 빠르게 식사를 마치자, 이도영이 바로 휴지를 몇 장 뽑아서 내게 건네주었다. 자연스럽게 받아서 입가를 문지르자 박휘성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되게 친해 보이네….”
“꽤 친하긴 하지.”
내 대답을 들은 박휘성이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친한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뭐, 마나 회복하려면 부득이하게 붙어야 하니까. 말해줄 생각은 없지만. 대충 생각을 마치고 고개를 앞으로 돌리자, 김유진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박휘성과 이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잠깐만. 어째 반응이 이상한데.
‘설마 박휘성한테 관심이라도 생겼나.’
에반데. 이래 봬도 원작 히로인인데, 마인 후보한테 저러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아직 마인이 아니니까 괜찮은가? 아, 모르겠다. 이미 내가 있는 것만으로 원작은 박살난 거나 다름없는데, 쟤가 뭘 하건 알게 뭐야. 귀찮아진 기분에 생각을 끝내고 김유진에게서 시선을 뗐다.
“음…다들 식사는 끝난 모양이네.”
얼마 후, 식기가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멎자 박휘성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어울려줘서 고마웠어. 시아하고…이도영이라고 했던가?”
박휘성의 질문에 이도영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본 박휘성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을 이었다.
“내일은 부 활동이니까, 내일도 만나겠네. 그때도 잘 부탁해.”
“어.”
“…그래.”
그 말을 남기고 박휘성은 이만 자리를 떴다. 그래서 왜 온거래. 이도영이랑 기 싸움을 했다는 건 알겠는데. 고개를 들어 김유진을 향하자, 김유진이 이도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시선이 불편하다는 듯 쓴웃음을 짓고 있는 이도영의 얼굴이 보였다.
‘얘네 뭐 하냐.’
진짜 뭐하는 거래. 그리고 박휘성 쟤는 왜 온 거야?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이내 또 몰려든 귀찮음에 생각을 접었다. 뭐, 내 알 바는 아니니까. 알아서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