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부활동(3)
박휘성은 영웅의 자식이었다. 그것도 그저 그런 영웅이 아니라, 한국에서 수위에 드는 대형 길드 마스터의 자식. 훌륭한 혈통, 그에 걸맞는 뛰어난 재능. 거기까지만 들었을 때는 아마 축복받은 인생이라고 말하기 부족함 없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면.
“나는 사생아였어.”
그것도 하룻밤 불장난으로 태어난, 사랑 따위 없는 관계에서 태어난 자식. 박휘성은 자신의 탄생을 그렇게 요약했다.
“다행히도 아버지께서는 생활비는 꼬박꼬박 보내주신 모양이야. 적어도 형편이 어려웠던 적은 없었으니까.”
박휘성의 말을 듣고 가볍게 팔짱을 낀 뒤 생각에 잠겼다. 음, 이거 참.
‘이건 진짜 원작에서 들어본 적 없는 얘기긴 하네.’
그러고 보니 얘, 대형 길드 가문의 자식이라는 설정이 있었지? 원작에서 딱히 그런 점이 드러난 적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는데. 이런 뒷사정이 있었나. 그나저나 아버지가 방치면 학대의 주범은 어머니인가.
“어머니는?”
팔짱을 끼고 확인하듯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그 말을 들은 박휘성이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는…아버지를 진심으로 사랑하셨던 것 같아. 아니, 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의 신분을 사랑했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뭐, 대충 이야기의 얼개는 잡힌다. 솔직히 말하자면 꽤 흔한 사연이니까. 내 동작을 본 박휘성이 말을 이었다.
“아마 어머니는 나를 통해 아버지하고 다시 접점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것 같아.”
당연히 그럴 리 없지. 만약 진짜 그렇게 생각했다면 너무 순진했다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내 표정을 본 박휘성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어머니의 생각은 반쯤 맞았어. 내가 처음 마나를 각성했을 때, 아버지께서 나를 찾아오긴 하셨으니까.”
이건 좀 의외네. 적당히 감상을 흘리며 다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처음 아버지한테 한 마디를 들을 수 있었어.”
그럭저럭 쓸 만하다고 하시더라고. 그 후로 한동안 다시 뵌 적은 없지만.
말을 마친 박휘성이 잠시 입을 닫았다. 불편한 침묵이 흐르는 장내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거 참, 사생아의 재능을 따진다니, 어느 신이 떠오르는 행적이네. 내 생각에 맞장구를 치듯 머릿속에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그러고 보니 얘도 사생아라면 사생아였지. 딱히 사생아라고 헤라한테 뭘 당한 적은 없는 놈이지만. 시답잖은 생각도 잠시, 이내 박휘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후로 한동안 아버지는 찾아오시지 않았어. 그런데 어머니는 그걸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셨나 봐.”
여기까지 들으면 무슨 얘기를 할지는 뻔하지. 무슨 학대를 당했다는 건지도 알겠다. 뭐, 과잉 교육도 학대에 속하니까. 그것 말고도 정서적 학대도 있었을 테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 박휘성을 가만히 응시했다.
딱히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애초에 동정해달라고 꺼낸 말도 아닐 테니까.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침묵도 잠시, 이내 박휘성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깨려는 듯 웃음을 흘렸다. 별 효과는 없었지만.
“열심히 노력하긴 했는데, 어머니의 눈에는 내가 여전히 부족해 보이셨던 모양이야.”
떨리는 목소리와 정반대로 과장되게 밝은 말투. 굳이 지적할 생각은 들지 않아 침묵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어. 솔직히 조금 버티기 힘들었거든.”
그 말을 들은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박휘성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머니한테 반항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그리고 마지막이기도 하고. 그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굳혔다.
‘대충 예상하긴 했지만, 이거 참….’
기분 더럽네.
더 이상 자세하게 말하기는 힘든 모양인지 대충 설명을 넘긴 박휘성이 입꼬리를 올렸다.
“어머니가 죽고 난 이후, 아버지가 날 찾아오셨어. 나를 거두시겠다면서. 뭐, 딱히 그 후로 뭘 해주시진 않았지만.”
적어도 자기 자식을 버렸다는 이미지는 위험하니까. 뭐, 사생아 정도는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큰 흠집도 아니기도 하고. 그런데 그럴 거면 왜 처음부터 안 거뒀대? 뭔가 다른 요소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뭐,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뭐, 그게 다야. 그 후 열심히 훈련해서 사관학교에 입학했거든. 아버지와는 다르게 새어머니께서는 내게 잘 대해주시기도 했고.”
지친 기색을 알아차린 듯 박휘성이 빠르게 이야기를 끝냈다.
‘새어머니라.’
그러고보니 정작 본처 얘기는 한 마디도 안 나왔었네. 아버지라는 양반이 태도를 바꾼 건 그 여자 때문인가. 그나저나 그 전까진 신경 안 썼으면서 정작 거두고 나니까 잘 대해줬다고? 흐음, 꽤 신기하긴 하네. 뭐, 그건 아무래도 좋지만.
생각을 마치고 박휘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한 이유를 모르겠는데.”
왜 굳이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거냐? 딱히 친한 사이도 아닌데. 뭐, 비밀을 공유한 사이 같은 거라도 되고 싶은 건가? 그렇다고 하기엔 딱히 비밀도 아니라면서? 고개를 갸웃하자 박휘성이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냥 내가 왜 아이들을 좋아하는지 알려주고 싶어서.”
뭐라는 거야. 아까는 이도영한테 내가 신경 쓰는 이유가 궁금하다며. 그리고 어린 시절 안 좋은 기억이 왜 애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되는 거냐? 이해가 안 가네.
내 의문 섞인 시선을 받고도 박휘성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진짜 어이가 없네. 제 할 말만 하면 끝이야? 짜증도 잠시,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이도영한테 신경을 쓰는 이유가 궁금하다며.”
“아….”
난처한 표정을 지은 박휘성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거였나. 어이가 없네.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됐어. 별 관심 없으니까.”
“그, 그래…?”
내 반응을 예측하지 못한 듯, 박휘성이 어색한 표정으로 내게 반문했다. 고개를 끄덕인 뒤,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건 넘어가고, 하나만 물어볼게.”
“음…?”
당황한 표정을 짓는 박휘성을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뭐, 얘기를 들어보니까 아직은 딱히 나쁜 놈은 아닌 것 같긴 하다. 봉사활동이 취미라던 말도 진심이었던 것 같고. 그러니까 하나만 물어보자.
“너는 왜 사관학교에 들어온 거야?”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이게 마인이 된 계기인가. 그 대답을 들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사연을 들어보니 지금까지는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다 싶긴 하네. 동기도 완전 불순한 건 아니고, 오히려 이 정도면 좋은 편이지? 결국 마인으로 변해버리긴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아까운데.’
조금만 교정해도 쓸만해 질 것 같은데. 전력은 하나가 아쉽기도 하고. 눈가를 좁힌 뒤 생각을 이어가기도 잠시, 이내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한 번 교정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게 아니라?”
“그…그건….”
생각해본 적 없겠지. 봉사활동에 참여한 걸 보면 이타심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정작 그게 동기가 되진 못했을 거다. 여기서는 한 번 말해보는 게 좋겠지. 이도영한테 신경 쓰는 걸 보니까, 이도영 얘기를 하는 게 나으려나? 대충 생각을 마친 뒤 입을 열었다.
“이도영은 다른 사람을 돕고 싶어서 사관학교에 들어왔다고 했어.”
“….”
충격받은 표정을 짓는 박휘성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아, 그런데 이 말만 하면 어째 비교하는 것 같잖아. 맞긴 하지만.
“굳이 비교하는 건 아니야. 전투력 측면에서는 네가 압도적으로 강하니까.”
각성하고 나면 그것도 달라지겠지만. 달래듯이 건넨 내 말을 들은 박휘성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래도 진짜 영웅이 되고 싶다면 그런 동기를 세우는 게 나을 걸.”
내 말을 들은 박휘성이 침묵에 빠져들었다. 할 말이 없는지 묵묵히 바닥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뭐, 그건 그렇지만….”
내 말을 들은 박휘성이 고개를 올려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약간의 기대가 담긴 시선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뭐, 적어도 칭찬 몇 마디는 해줘야 삐뚤어지지 않겠지.
“그래도 너한테도 그런 마음이 어느 정도 있다는 건 아니까.”
“어…?”
의문에 찬 시선으로 박휘성이 나를 바라보았다. 자신한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걸 어떻게 확신하냐는 듯한 시선. 그 시선을 마주하고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봉사활동이 취미라며? 아니야?”
“마…맞긴 한데….”
“아까 아이들이랑 어울린 것도 진심이었지?”
내 말을 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박휘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얘 원작에서 마인 후보인 것치고는 너무 도덕적인 거 아니냐? 오히려 나보다 나은 것 같은데. 아, 이거 좀 굴욕적이다. 속으로 헛소리를 중얼거린 뒤 박휘성을 빤히 바라보았다.
“…응.”
“뭐, 그냥 그렇다고.”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박휘성을 보며 한 마디를 쏘아붙인 뒤 입을 닫았다. 아, 역시 칭찬은 나한테 안 맞아. 살짝 올라오려는 닭살에 살짝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돌렸다. 슬슬 밤이 되려는 듯 붉게 빛나는 하늘을 본 뒤, 박휘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이제 더 할 말 없지?”
“…응.”
“그럼 돌아가자.”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박휘성에게서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아, 괜히 칭찬했나. 오글거리잖아. 한숨을 픽 내쉰 뒤 고아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다음부턴 이런 일 안 하는게 낫겠다. 진짜 오글거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