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3화 〉인식(2) (53/167)



〈 53화 〉인식(2)

“자퇴한다고…?”

박휘성이 멍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질문을 던졌다. 굳이 대답하기 귀찮아 고개를 끄덕였다.

“왜?”

“더는 볼 일이 없으니까.”

이도영 각성만 끝내면 이제  할 일 끝이지. 식물들 가득 늘어둔방에서 엔딩까지 백수 라이프나 즐길 거라고. 어차피 돈이야 그럭저럭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 돈은 어디서 난 거래.’

이것도 빙의 특전인가? 학비 대신 쓰라고 넣어줬다고 보기엔, 사관학교는 돈도 나오잖아. 뭐, 그런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볼 일…?”

그건 말해주기  그런데.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닌지, 이내 박휘성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내게 질문했다.

“…그거 이도영은 알아?”

“아니. 그걸 걔가  알아야 하는데?”

아무도 모르는걸. 차라리 말한다면 김유진한테 먼저 말했겠지.

내 대답을 들은 박휘성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데, 저 반응. 고개를 갸웃한 순간, 박휘성이 입을 열었다.

“…이도영이랑 그런 사이 아니었어?”

“뭐?”

이건 또 뭔 개소리야. 어이가 없네. 감정이 실린 모양인지, 예상보다 목소리가 차갑게 튀어나왔다. 내 반응을 본 박휘성이 몸을 흠칫 떨었다.

“내가? 이도영이랑?”

내 말을 들은 박휘성이 당황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망상 에반데. 미친놈인가.

‘생각해보니 원작에서도 이런 놈이긴 한데….’

썸 타기도 전인 이설화랑 이도영이 노는 것만으로 폭주한 놈이니까. 아니, 그러면 이 새끼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고백한 거야? 진짜 개악질인데.

팔짱을 낀 채, 싸늘한 눈빛으로 박휘성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마인이고 뭐고, 더 이상은 못 들어주겠네.이러다 화병으로 내가 가겠어.

“일단, 나는 걔랑 딱히 그런 사이가 아냐.”

“음…?”

뭐, 새끼야. 아니라고. 하나하나 태클 걸기도 힘들어 묵묵히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딱히 누구랑 사귈생각도 없어.”

“그, 그래…?”

그 말을 듣자마자 박휘성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아니, 너도 포함이야. 이 새끼야. 더는 참기힘들어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누구랑 사귀기에는 나한테 사정이 있어서. 이해해줬으면 좋겠네.”

그것도 더럽게 큰 사정이지. 말하기는 좀 그렇기도 하고. 이제야 진정한 듯, 조금 멀쩡해진 박휘성의 표정이 보였다. 아, 진짜. 개복치도 아니고 마인 안 되게 하려고 몇 번을 이러는 거야.

“그 사정이 뭔지는 비밀이지?”

“어.”

이제야  말귀가 통하네.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박휘성이 한참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후, 생각을 정리한 듯한 박휘성이 표정을 바꿨다. 꽤 밝은 표정이었다. 뭐지, 왜 갑자기 표정이 이렇게 급변했대?

“오늘 얘기해줘서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거냐? 고개를 갸웃한 나를 본 박휘성이 이내 웃음을 지었다.

“덕분에 여태까지 내가 뭐가 문제였는지 알  있었어.”

아니, 잠깐만. 뭔가 불길하잖아. 이거 마인 계약 각이냐? 불안감도 잠시, 이내 들려온 밝은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말한 대로 나는 너를 좋아하는  아니라, 단순히 너한테 의존하고 싶었던  같아.”

그래. 아니까 다행이네. 앞으로는 그러지 마라. 그 뜻을 담아 조금 온건한 표현으로 말을내뱉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의존이 아니라, 진짜 좋아하도록 노력해볼게.”

뭐라고, 이 새끼야? 순간 머리를 세게 처맞은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아니, 잘 나가다가 왜 결론이 거기로 튀는 건데? 잠깐만, 이게 아닌데?

“아니….”

“곧 사관학교를 나간다고 했지?”

그러면 빨리 바뀌도록 노력해야겠네.

그렇게 말한 박휘성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제발 그냥 포기해. 포기하라고.

“오늘 이야기 나눠줘서 고마웠어. 다음에 다시 보자!”

차마 제대로 말이나오지 않아, 그저 입을 뻐끔거리는 동안,   말을 전부 마친 박휘성이 내게 손을 흔들고 밖으로 향했다. 야, 가지 말아봐. 가지 말라고, 이 새끼야.

-드르륵

 새끼. 진짜 갔네.

‘시발, 그냥 마인 되기 전에 죽여버릴까.’

텅  교실. 얼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한참을 서 있다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

한참을 부실에서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부실을 나섰다. 복도에서 느껴진 상쾌한 공기에 기분이 살짝 나아지기도 잠시, 기억을 되새긴 순간, 순식간에 다시 밀려온 불쾌함에 인상을 구겼다.

‘아, 도착했네.’

한참을 걸어, 기숙사에 도착했다. 완전히 깜깜해진 하늘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와, 하늘이 푸르네. 아니, 까마네.  기분처럼. 죽상을 지은 채로 기숙사 안으로 들어갔다.

“진짜 돌겠다.”

문을 열고 내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욕설을 내뱉었다. 진짜 힘들다.정신적으로 힘들어. 급격히 밀려온 피로감에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숨을 쉬기도 잠시, 이내 입고 있는 셔츠에서 흘러나온 마나 덕에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거 세탁해야 하는데.’

벌써 밤이네. 뭐, 굳이 내일 줄 필요는 없지만. 대충 의미 없는 생각을 이어가다가 몸을 일으켰다.

‘일단 씻어야지.’

아, 전부 귀찮아. 밀려오는 피로감에 작게투덜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

적당히 몸을 씻은 뒤, 다시 침대에 누웠다. 푹신한 스프링의 감각에 몸을  늘어뜨린  생각에 빠져들었다.

‘일단, 박휘성 이 새끼는 적어도 지금은 마인이 되진 않을 것 같은데.’

아닌가? 솔직히 애매하다. 한숨을 내쉬고 다시 상황을 정리했다. 박휘성이 나한테 저러는 이유는 그거지? 역시.

‘이설화가 가지고 있던 박휘성 관련 이벤트를 전부 내가 가져갔으니까.’

그러면 일단 해야 하는 건, 이설화랑 박휘성을 좀 붙여 놓는 건가. NTR은 극혐이지만, 적어도 원작대로 따라는 가야 할 거 아냐. 나한테 그러는 것보단 이설화가 역시 낫지 않아? 제발.

‘솔직히 좀 늦은 것 같기도 하지만.’

아니, 안 늦었어. 지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을 거라고 믿어야 한다. 그래야 한다고. 정신승리를 시도한 뒤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박휘성도 박휘성인데, 다른 쪽이  문제지.’

설마 다른 곳에도 이상한 플래그 같은 거 꽂혀 있진 않겠지. 박휘성이야 원작 플래그를 내가 다 뺏어갔다만, 이도영은 다른 플래그 다 멀쩡히 살아 있잖아.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어, 생각해보니 아니네.’

김유진 첫 친구 플래그는 내가 가져갔고, 백소월 플래그는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지 혼자서 자연소멸 해버렸다. 남은 건 이설화인데.

‘걔한테는 박휘성을 좀 떠넘겨야 하고.’

와, 망했네. 아니, 사실 그 정도로 완전히 망한 건 아니다. 김유진은  친구는 아니더라도 두 번째 친구 자리는 꿰찼고, 백소월 플래그야 봉사활동에 집중하면 다시 꽂을 수 있으니까. 쯧, 그래도 지금 보니까 좀 문제긴 하네.

‘이도영한테 너무 접근했나.’

자꾸 거지 같은 오해를 사는 거 보면, 내가 문제인 것 같기도 하다. 동료 포지션, 아니 초반 조력자 정도로 남으려면 조금 떨어질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그래도 마나는 회복해야 하는데….

“뭐, 원작에서 연애에는 관심도 없던 놈인데, 갑자기 바뀔 리는 없겠지.”

어차피 나는 곧 학교에서 나갈 거기도 하고. 조금만 주의하는 정도로 끝내도 되지 않을까. 오해를 사는 것 자체는  짜증 나지만, 그래도 떨어지기는 싫으니까. 아니, 떨어지면 나만 손해니까.

“음…?”

뭔가 이상한데. 갑자기 스치고 지나간 위화감도 잠시, 이내 몰려오기 시작한 졸음 생각을마치고 눈을 감았다. 아, 몰라. 내일 고민하지.

[흠…역시….]

점점 몽롱해지는 정신이 끊어지기 직전,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온 것 같았다.

*

다음 날,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기지개를 켰다. 완전히 잠에서 깬 뒤, 적당히 몸을 정돈하고 기숙사를 나섰다. 어제, 이도영의 옷을 입고 있을 때는 느껴지지 않았던 불쾌감에 다시 표정이 찡그려졌다.

‘아오.’

이래서야 떨어질 수가 있겠냐고. 벌써 머리가 아픈데.

투덜거리며 교실을 향해 바쁘게 걸음을 옮긴 지 얼마 뒤, 이내 교실에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 김유진의 인사를 대충 넘긴 뒤, 이도영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왜 저러냐?’

요즘 계속 인사하러 오더만, 오늘은 또 인사 안 하네. 뭐, 굳이 내가 인사하러 갈 생각은 없지만, 괜히 찝찝한 기분에 시선을 돌렸다.

-드르륵

얼마 뒤, 신유정이 교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활기차 보이는 모습. 그러고 보니오늘이 금요일이던가? 어쩐지 반 분위기가 퍼져있더라.

“다들 어제 동아리 활동은  즐겼는지 모르겠구나.”

너무 잘 즐겨서 탈이지. 젠장할. 살짝 표정을 구기기도 잠시, 이내 이어지는 신유정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뭐, 얼굴을 보아하니 다들  즐거웠던 모양이지만 말이야.”

진심이냐? 뭐, 나 빼면 다 즐기셨겠지, 젠장. 그러거나 말거나 고개를 대충 끄덕인 신유정이 이내 씨익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너희에게 한 가지 희소식이 있다. 오늘도 사관학교를 나갈 예정이거든.”

음? 사관학교를 나가?

‘어, 그 이벤트가 오늘이었어?’

사관학교 외부로 견학을 나갔을 때, 포획 중이던 마인이 탈출하는 사건. 원작에서 이도영한테숨겨진 힘을 암시하는 용도로 묘사된 사건이었다. 그리고 원작에서 처음으로 사상자가 나온 사건이기도 하고.

아니, 진짜 귀찮아 죽겠네. 밀려오는 짜증에 손을 이마에 짚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