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인식(5)
쓰러지는 유시아의 몸을 얼떨결에 자신의 품에 받아낸 이도영이 이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시, 시아야?”
가까이 다가온 순간 유시아의 몸에서 훅 풍겨온 체향에 이도영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음에도, 유시아에게서는 땀 냄새는커녕 싱그러운 과일 향 비슷한 향기가 났다.
“흐음.”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유시아의 몸을 떼어내는 이도영을 바라본 영웅이 짧게 콧소리를 내뱉었다. 수치심도 잠시, 이내 기절한 유시아에 대한 걱정이 밀려온 이도영이 고개를 돌려 영웅을 바라보았다. 그 꽤나 간절한 시선을 받은 영웅이 이내 손을 내밀었다. 검지를 유시아의 이마 한가운데 가져다 댄 영웅이 이내 마법을 시전했다..
-파아앗
영웅의 손가락 끝에서 짧게 빛이 점멸하고, 유시아의 정수리 위에 푸른 고리가 생겨났다. 푸른 고리는 신체 부위에 맞춰 크기를 조절하면서 서서히 내려가 유시아의 몸을 스캔했다. 얼마 뒤 스캔이 끝나고, 음음하고 짧게 소리를 낸 영웅이 이내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그냥 약한 마기 중독이니까.”
“마기 중독이요?”
걱정하지 말라고 하기엔 너무 흉흉한 이름 아니냐는 듯한 표정으로 김유진과 이도영이 영웅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감정을 느낀 영웅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진짜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이 정도는 위험한 수준은 아니야.”
뭐, 아까는 조금 반응이 격렬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체질적으로 마기랑 극성인 모양이네.
영웅의 말을 들은 후에야 안심했다는 듯, 김유진과 이도영의 표정이 약간 풀렸다. 그 풋풋한 모습을 본 영웅이 한 번 더 미소를 지은 뒤 이도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아주 서로 지극정성인데, 역시 사귀는 사이인가?”
“…아뇨.”
그 질문을 들은 이도영이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가, 유시아와 자신을 번갈아 보는 영웅의 시선에 짧게 대답을 마쳤다. 그 미묘한 반응에 숨겨진 감정을 알아챈 영웅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흐음, 대충 무슨 사이인지는 감이 오는데.”
콧소리를 내며 짓궂은 미소를 띤 영웅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담긴 웃음기를 눈치챈 이도영이 다시 얼굴을 붉혔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쓰러진 신유정에게 생각이 미친 듯, 김유진이 작은 목소리로 영웅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교관님은 어떻게….”
“아, 그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응급처치는 해뒀으니까.”
그 말을 듣고 둘이 고개를 돌리자, 푸른 장막에 휩싸인 채 허공에 떠 있는 신유정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완전히 긴장이 풀렸는지, 김유진이 힘이 빠진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중얼거렸다.
“다행이다아….”
그 모습을 보고서 긴장이 풀린 이도영도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얼마 후, 모습을 드러낸 구급요원들이 유시아와 신유정을 병원으로 이송하기 시작했다.
“뭐, 이제 내 일은 끝난 모양이네.”
구급차에 신유정의 몸이 실린 것을 확인한 영웅이 입을 열었다. 그 중얼거림에 이도영이 시선을 향하자, 다시 미소를 지은 영웅이 이도영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했다. 그 동작을 본 이도영이 영웅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이내 영웅이 이도영에게 몇 마디를 속삭였다.
*
‘무거워.’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던 도중, 문득 그러한 감각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나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 감각을 자각한 순간, 더욱 강한 압박감이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바위에 깔린 듯, 압도적인 중량에 짓밟히는 감각. 갑작스럽게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영혼이 서서히 갈려 나가는 듯한 끔찍한 감각이었다. '자신'이라는 존재가 분해되는 듯한, 그 공허한 감각에 점점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늪에 빠진 이가 완전히 침잠하듯, 정신을 잃으려던 순간이었다.
[정신 차리거라.]
“…아.”
머릿속에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꽉 감겨 있던 눈이 순식간에 뜨였다. 갑작스레 열린 시야로 환한 빛이 쏘아졌다.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가지각색의 정보에 멍하게 쉬고 있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여긴.
“병원…?”
시야를 가득 채운 흰 색의 가구. 상쾌한 공기 속에서 약하게 느껴지는 소독약 냄새.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는 것을 알려주듯, 사관학교의 교복이 대충 걸려있는 근처의 의자. 내부를 한 번 쭉 훑은 뒤 고개를 밑으로 굽히자,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에서 환자복 특유의 무늬가 보였다. 아, 병원 맞네.
‘왜 병원이래.’
딱히 입원할 정도로 크게 다치진 않았던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기절은 왜 했더라?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이내 기절하기 직전의 기억이 새록새록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도영한테 코를 박았다가, 또 거지 같은 오해를 샀던….
“아, 미친.”
개 같네. 완전히 떠오른 기억에 표정을 구기기도 잠시, 이내 의문이 하나둘 머릿속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기절하기 전에 그 고통은 뭐였지. 진짜 죽을 것 같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린 순간, 마인의 팔에서 뿜어졌던 광선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걸 팔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역시 그게 원인이겠지.’
아무래도 쏘아졌던 그 빔이 폭발하면서 흩어진 마기를 들이마신 탓이 아닐까. 평상시 오염된 공기만으로도 그렇게 힘든데, 마기에 노출됐으면 그 정도로 아플 만도 하지.
‘어, 근데 그러면 나 마인이랑 못 싸우나.’
이건 또 곤란한데. 아니, 뭐. 어차피 이도영 각성하고 나면 자퇴하고 백수 라이프를 살 거라지만, 문제는 이도영이 각성할 때 한 번 더 마인을 마주쳐야 한다는 점이다. 알아서 각성하라고 내버려 두기에는, 각성하자마자 엘릭서를 먹여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어서 말이지.
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무책임하게 고민을 끝낸 뒤 침대에 몸을 푹 뉘었다. 시트가 몸을 푹신하게 감싸 안았다. 아니, 솔직히 고민한다고 딱히 바뀌는 건 없잖아. 이번 전투에서도 끝나기 직전까지는 마기를 들이마신 적도 없고. 마침 무기도 활이니까 나는 그냥 견제만 하면 되겠지, 뭐. 고민 끝. 생각을 마치고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그 느낌은 뭐였지.’
머릿속에서 그 감각을 되새기자, 이내 방금 느꼈던 불쾌한 감각이 생생하게 머릿속에 다시 그려졌다. 마치 내 정신이 무언가에 짓눌려 갈리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 원인을 알 수 없기에 더욱 불쾌한 감각이었다. 머릿속에서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감각에 무의식적으로 헤르메스의 이름을 불렀다.
“헤르메스.”
[그래.]
그런데 이걸 뭐라고 물어봐야 하는 거지. 고민도 잠시, 병실 내부에 감도는 침묵이 불편해 일단 입을 열려는 찰나, 헤르메스가 선수를 쳐서 말을 건네왔다.
[그 힘은 더는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 힘? 뭔 소리야?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이내 내게 유일하게 힘이라고 할만한, 시스템에 생각이 닿았다. 아니, 시스템을 쓰지 말라고?
‘에반데.’
그걸 안 쓰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냐. 그렇게 생각한 순간, 헤르메스가 말을 이었다.
[아예 사용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오늘처럼 한계를 넘어서 사용하지 말란 뜻이지.]
한계를 넘어? 의문도 잠시, 이내 전투 막바지, 이도영을 밀칠 때의 상황이 다시 떠올랐다. 마나가 전부 소모되어서 스킬이 제한됐을 때, 그것과는 상관없다는 듯 멀쩡히 움직인 몸. 시스템의 능력치 적용은 별개인 줄 알고 넘겼는데,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영혼이 육신이 품고 있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니, 봉인에서 허용된 수준 이상의 힘을 과도하게 발휘한다면 결국 영혼이 붕괴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연결된 통로를 통해 도울 수 있었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으니.]
뒤이은 헤르메스의 말이 내 추측이 옳았음을 증명하듯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러니까 내가 영혼이 망가질 뻔했다고?
영혼이 망가진 존재가 어떻게 되는지는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이성을 상실했던 마인이 그 예시니까. 악마와의 계약으로 얻은 과한 권능을 남용하다, 영혼이 침식당해버린 괴물. 까딱하면 걔처럼 될 뻔했다, 이거지? 와.
‘진짜 좆될 뻔했네.’
순식간에 팔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정신을 진정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조금 전 감각이 영혼이 힘에 침식당하는 감각이었다는 건가. 원작 이도영은 그 감각을 매일 느꼈다, 이거지? 엄청나네, 진짜.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잠시, 이내 헤르메스의 말에서 한 단어를 캐치했다.
“봉인?”
시스템이 봉인이라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중얼거렸음에도, 헤르메스는 할 말을 마쳤다는 듯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니, 이 새끼 요즘 말 안 거네. 무슨 일 있나?
의문도 잠시, 이내 갑작스럽게 문밖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발걸음 소리에 신경을 돌렸다. 음, 누가 오는 것 같은데. 시선을 문으로 향하자, 이내 문이 열리고 발걸음 소리의 주인이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 일어났네.”
이도영이었다. 엥.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의문 섞인 시선으로 이도영을 바라보자 이도영이 머쓱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언제 깨어날지 기다리고 있었지.”
의사 선생님이 별다른 이상은 없으니 곧 깨어날 거라고 하셨거든.
이도영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뭘 굳이, 새삼스럽게. 그런 내 반응을 본 이도영이 볼을 긁적이더니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내 이도영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른 용무도 있고.”
다른 용무? 뭔데?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자 이도영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 반응에 순간 당황이 밀려왔다. 뭐야, 왜 이리 진지해? 뭘 부탁하려고.
그런 내 반응을 본 이도영이 이내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