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각성(1)
각성 사건까지 남은 기간 하루, 상쾌한 기분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 이제 이 짓거리도 진짜 얼마 안 남았다. 자퇴하고 나면 더는 걔들 볼 일도 없겠네. 그렇게 중얼거리자, 이내 잠시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쯧.”
갑작스레 씁쓸해진 입맛에 작게 혀를 찼다. 최대한 정 안 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난 스토리 라인 편입해서 고생하기는 싫지만. 적당히 생각을 정리한 뒤 기숙사를 나섰다.
학교로 향하는 길. 어제보다는 덜했지만, 여전히 내게 시선이 쏠리는 시선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서 학교 다니기 싫다니까. 뭐, 사실 핑계긴 하지만. 점점 더 늘어나는 시선을 피해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교실에 도착해 문을 열고 내 자리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기도 잠시, 이내 이상하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김유진을 바라보았다. 평소에는 매번 인사하더니, 왜 오늘은 아무 말도 안 한대? 김유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안녕.”
“…응, 안녕.”
내 인사를 받은 김유진이 잠시 나를 응시하더니, 이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김유진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이상한 행동에 고개를 갸웃했다.
‘얘는 또 왜 이래?’
어제는 이도영이 그러더니, 오늘은 얘가 말썽이네. 자퇴도 얼마 안 남았는데 더럽게 힘들다. 속으로 한숨을 삼킨 후 김유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야.”
이제는 대답조차 않고, 대답이라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인 김유진이 또 고개를 숙였다. 마치 나와 대화를 거부하려는 듯한 모습에 조금 짜증이 치밀기 시작했다.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왜 그러냐?”
내 질문을 듣고도 김유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짜증도 잠시, 이쯤 되니까 슬슬 심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한 풀 누그러진 목소리로 김유진을 향해 다시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야, 나 좀 봐봐.”
“….”
그 말을 듣고서야 김유진이 다시 나를 바라봤다. 침울하기 그지없는 표정. 무슨 일이 있는 것만 같은 표정에 조금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얘가 이렇게 끙끙대는 스타일은 아니었을 텐데? 김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냐?”
“…아무것도 아냐.”
“그럼 왜 이리 얼굴이 굳어있는데?”
그 말을 내뱉자 시무룩하던 김유진의 시선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어, 뭐야. 설마 지금 질문했다고 이러는 거야? 씁, 괜히 말 걸었나.
‘그래도 남도 아니고.’
꽤 정도 들었는데, 이러는 걸 그냥 내버려 두기엔 입맛이 쓰다. 김유진을 바라보며 위로하듯 한마디를 던졌다.
“무슨 일 있으면 얘기라도 좀 해. 친구잖아.”
그 말을 들은 김유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러기도 잠시, 더욱 매서워진 김유진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이번엔 별말도 아니었는데 왜 이런 반응이야? 당황한 내 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김유진이 이내 입을 열었다.
“…친구라고?”
“응?”
“우리가 진짜 친구 맞아?”
뭔 소리야, 갑자기.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내 반문을 무시한 김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지가 먼저 친구 하자고 했으면서….’
그렇게 생각하며 멍하니 김유진을 바라보자, 이내 김유진이 살짝 울먹이는 표정을 지었다. 빤히 나를 노려보는 김유진의 시선에 당황이 밀려오기도 잠시, 이내 김유진이 내게 따져오기 시작했다.
“너, 곧 자퇴할 거라며.”
잠깐만. 너는 그걸 또 어떻게 알아?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뜬 나를 보며 김유진이 내 의문에 대답하듯 말을 이었다.
“어제 도영이한테 들었어.”
‘야, 이 새끼야.’
그걸 또 얘한테 말했다고? 아니, 어련히 곧 내가 말할걸. 어이가 없네, 진짜. 홱 고개를 돌려 이도영을 바라보자, 이도영이 담담한 표정으로 나를 마주 보았다. 아니, 뻔뻔한 거 봐라?
그 행동에 짜증이 생겨나려던 순간, 이내 다시 내 귓가에 들려온 김유진의 목소리에 입을 닫았다.
“그럴 거면서 나한테는 한 마디도 안 해주고.”
아니, 이건 나도 좀 억울한데. 이도영 각성만 끝나면 나도 말하려고 했다고.
“…조만간 말해줄 생각이었어.”
“결국, 도영이한테만 말한 거잖아.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건 걔가 엿들은 거라고. 답답한 기분도 잠시, 김유진의 얼굴에 우울한 표정이 맺혔다. 그 모습을 보자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아니, 그….”
“나는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중요한 이야기도 하나 말 안 해주고.”
변명하려는 순간, 쐐기를 박듯 내게 날아온 김유진의 말에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래, 태풍은 일단 피하는 게 맞지. 좀 진정되면 말하는 게 좋겠다. 고개를 숙인 채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이내 계속해서 김유진의 말이 이어졌다.
“평소에도 매일 말 거는 건 난데, 시아 너는 도영이랑만 얘기하고.”
아니, 이건 좀 억까 아니냐. 솔직히 얘기는 너랑 더 많이 했잖아. 순간 억울한 감정이 들었지만, 이내 계속해서 밀려오는 말의 쓰나미에 그 감정은 흔적도 없이 쓸려 내려갔다.
‘정신 나갈 거 같아.’
평소 섭섭한 걸 다 풀겠다는 듯, 끝도 없이 이어지는 김유진의 말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아, 진짜 살려줘.
*
그렇게 한참 시달리던 도중, 수업 시간이 되어 도중에 대화가 끊겼다. 대화라기보다는 김유진의 일방적인 난타였던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그리고 수업이 끝난 후, 수업시간 동안 조금 누그러진 듯한 김유진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살았다.’
진짜 정신 나갈 뻔했네. 멍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김유진을 바라보았다. 섭섭한 표정을 지은 김유진이 나를 응시했다. 복잡한 심경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한참 침묵이 흐르고, 이내 김유진이 입을 열었다.
“진짜 자퇴할 거야?”
“…어.”
갑작스럽게 미안하긴 하지만, 나는 좀 쉬고 싶거든. 원작 스토리에 끼어서 고생하기는 싫단 말이야.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시무룩해진 김유진을 보며 위로하듯 몇 마디를 건넸다.
“아예 못 보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자퇴한다고 해서 친구가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끔 얼굴 보면 되지.”
니들이 스토리 라인 제대로 따라가는지 겸사겸사 확인도 하고 말이야. 그렇게 말을 했음에도 김유진의 표정을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조용히 시선을 마주하던 순간, 김유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자퇴하는 이유는 진짜 체질 때문이야? 마인이랑 싸웠을 때, 그것 때문에?”
‘그것까지 말한 거냐.’
그냥 밝힐 수 있는 건 전부 밝힌 모양이었다. 체질까지 언급하는 걸 보면. 뭐, 그 덕에 변명은 편할 것 같지만. 고개를 끄덕이자 김유진이 알겠다는 듯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체질만 아니면 사관학교에 계속 다닐 거야?”
“응?”
아니, 당연히 아닌데? 반사적으로 나오려는 말을 멈추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음, 어차피 이 체질을 고칠 방법은 없을 텐데. 립서비스라도 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대충 생각을 마친 뒤, 고개를 끄덕여서 긍정했다.
“그럴 것 같긴 하네. 그런데 그럴 리는 없으니까.”
“…그래, 알겠어.”
그제야 포기한 듯, 김유진이 그렇게 대답하며 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보고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 아, 어쨌든 겨우 설득해냈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이도영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보다 이 새끼는 그걸 또 일러바쳤네.
*
점심시간과 오후 내내, 고자질에 대해 복수라도 하듯 이도영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수업 일정을 마쳤다. 그러게 누가 일러바치랬나. 솔직히 좀 졸렬한 되갚기 방식이지만, 의외로 효과가 좋더라고. 그리고 방과 후, 기숙사로 돌아가려던 시점에 이도영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시아야.”
“왜.”
“많이 화났어?”
“아니.”
뭐, 오후 내내 무시했을 때 반응을 구경한 덕에 별로 짜증이 남거나 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저어 부정했음에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이도영이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짜 화 안 났다니까.”
“미안해.”
아니, 화 안 났다고. 자꾸 그렇게 나오니까 또 짜증 나려고 그러네. 살짝 이도영을 노려보자 이도영이 알겠다는 듯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할 얘기는 이게 다인가. 그럼 가야지. 자리를 피하려던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 한 가지 확인해야 할 사항이 떠올랐다. 이도영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야, 그러고 보니 너 내일도 나가냐?”
“아…. 응.”
갑작스레 내가 질문을 던지자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이도영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원작대로인 것 같네.
‘목적지는 당연히 고아원일 테고.’
이도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준 뒤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각성 이벤트는 간단하다. 이번 주말, 이도영이 고아원에 가 있는 동안 고아원을 마인이 습격한다. 그 마인의 정체는 원장이 현역 시절 놓쳤던 마인. 원장에게 복수하려고 찾아왔다나.
아무튼, 그 마인에 맞서다가 결국 이도영이 각성해서 마인을 쓰러뜨린다는 왕도적 전개라는 거다. 음, 뭐. 이번에는 내가 끼어들어서 엘릭서를 먹이는 과정도 들어가겠지만. 저번 마인 사태에는 이상하게 그놈이 달려든 탓에 싸워야 했지만, 이번에는 진짜 구경만 해도 되겠지. 생각을 마치고 이도영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래. 잘 다녀와라.”
“혹시 너도 어디 가?”
“어.”
응, 너랑 똑같은 곳. 너 각성하면 엘릭서 먹여야 하거든. 고개를 끄덕이자 이도영이 목적지가 궁금하다는 듯, 내게 빤히 시선을 보냈다. 그래도 말해줄 생각 없어. 잠깐 시선이 오가고, 이내 이도영이 포기했다는 듯 내게 말을 건넸다.
“너도 잘 다녀와.”
“그래. 고맙다.”
대화를 마친 뒤, 이내 자리를 피하고 내 기숙사로 향했다. 진짜 얼마 안 남았다는 사실 탓에 조금 긴장되는 정신을 부여잡은 뒤, 걸음을 옮기며 계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뭐, 사실 계획이랄 것도 없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