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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화 〉각성(2) (63/167)



〈 63화 〉각성(2)

늦은 저녁, 슬슬 다른 이들이 잠들기 시작할 시간.

기숙사 안 서랍에서 엘릭서를 꺼내 들었다. 병 안에서 찰랑거리는 오색의 액체가 영롱한 빛깔을 내뿜었다. 느긋이 감상을 마친 후 이내 엘릭서를 포장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좀 아까운데.’

이게 한 두  하는 것도 아니고, 억만금을 줘도 못 하는물건이잖아. 괜히 피어오른 심술도 잠시, 이내 잡생각을 지운  엘릭서가 든 유리병을 뽁뽁이로 열심히 감쌌다. 그리고 포장을 마친 뒤,  마디 감상평을 내뱉었다.

“이렇게 보니까 줘도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신비스럽기 그지없는 물건조차, 둘레를 따라빽빽하게 둘린 뽁뽁이의 힘 앞에서는 그저 택배 물품일 뿐이었다. 신비로운 영약에서 인터넷에서 주문한 영양 주스처럼 변모한 엘릭서를 가방 안에 넣었다.

뭐, 그냥 보기에만 유리로 보일 뿐이지, 사실 헤르메스의 힘이 들어간 이상 파손되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지만. 혹시 모르니까.

[음….]
처참할 정도로 볼품없어진 엘릭서 병의 모습에 헤르메스가 침음성을 흘렸다. 아니, 왜. 외형이 어쨌건 무슨 상관이라고. 외형보다는 내용물이 몇백 배는중요하지. 뭐, 지금 이 몸뚱이가 가진 외모로 그런 말을 하면 솔직히 기만이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됐고.’

내일 어떻게 할지는 대충 정해뒀다. 애초에 원작대로 따라가면서 잠시 개입만  생각이었으니까. 이도영이 각성하고 마인을 쓰러뜨리자마자 입에다 엘릭서를 쑤셔 넣는다. 그러면 끝. 간단하기 그지없는 계획이었다.

‘설마 이것도 꼬이겠어?’

혹시나 해서 주말에 나가는 거 맞냐고 확인도 했으니까 별일 없겠지. 음…그나저나 목적지가 같긴 하지만, 어째 같이 가는 건  그렇지? 그냥 먼저 가서 기다리는  나으려나?

애초에 내가 걔네 고아원에  가는 거냐는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기도 하고, 각성이 끝난 후 마인 습격을 알고 있었냐는 추궁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그건 진짜 변명하기 힘들 것 같거든.

‘역시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게 낫겠다.’

결정을 내리고 가방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보다 내일이면 이제 끝이구나. 괜히 밀려오는 시원섭섭한 감정에 한숨을 내쉬었다.

*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가방부터 챙겼다. 그리고 몸을 빠르게 정돈한 뒤 기숙사를 나섰다. 매캐한 공기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겨 학교를 벗어났다. 휴대폰으로 지도를 켜서 목적지를 입력했다.

‘그리 멀진 않네.’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짧게 감상을 남긴 뒤 경로를 따라 이동을 시작했다. 아, 그런데 고아원 위치는 어떻게 알았냐고? 대략 어딘지는 알고 있었으니까, 나머지는 검색의 힘을 빌렸지.

‘뭐, 바로 나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고아원이 위치한 지역 자체는 알고 있었고, 더해서 고아원 이름도 알고 있으니까. 이리저리 검색하다 보니까 금방 위치를 찾긴 했다. 애초에 위치를 몰랐으면 예전에 이미 이도영한테 물어봤을 테지만. 생각을 마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버스에 올라탔다. 이동함에 따라 덜컹거리는 몸을 의자에 뉘인 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정보 너무 풀려 있는 거 아니냐.’

퇴역 영웅이 세운 보육원이라는 타이틀 덕에 금방 찾긴 했지만, 솔직히 이래도 되는 건가 싶긴 했다. 영웅이라는 직업은 직업의 특성상 원한이 많을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 그 대신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보상이 꽤 빵빵하니까, 아예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지만.

그리고 고아원 근처에는 영웅들이 활동하는 사무소도 몇 있으니까. 그리 뛰어나지 않은 영웅이었다는  고려하면, 그 정도 난이도를 뚫고 복수를 감행할 대상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아니, 그래도 좀 납득이 안 가지만.

‘애초에 그러면 원작에서 영웅들은  바로 안 왔던 거래.’

고아원이 습격을 당했는데, 설마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을 리는 없고. 애초에 원장부터 그 정도는 대비해 뒀을 테니까. 뭐, 원작대로 따라가면 결국 이도영이 마인을 쓰러뜨린 후에 영웅들이 오긴하니까, 출동이 늦어졌다고 치면 아슬아슬하게 인정할 수 있는 범위긴 한데.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도중, 버스에서 울려 퍼진 안내방송을 듣고 생각을 마쳤다. 벌써 도착했네. 조금 걸어야 하긴 하지만. 버스에서 내린 뒤, 다시 지도 앱에 표시된 경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대략 10분쯤 걸었을까? 슬슬 목적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  건물은 아니었지만, 딱히 이렇다 할 흠결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첫인상은 그냥 평범한 보육원이라는 인상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 근처 건물 고층 카페로 향했다. 창가 자리에 앉은 뒤, 몰래 고아원 마당 안쪽을 엿보기 시작했다. 궁사라는 직업상 가진 어마어마한 시력 덕에 엿보는 데 그리 큰 불편함은 없었다. 마당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가만히 훑기도 잠시, 이내 시선을 돌리자 인터넷에서 봤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와, 원장이 누군지는 바로 알아보겠네. 현역 때 사진이랑 차이가 하나도 없어.’

퇴역한지 한참 되었음에도 여전히 신체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듯, 어마어마하게 단련된 신체. 원장이 몸을 움직이자 입고 있는 옷 위로 흉흉한 근육이  윤곽을 드러냈다.  강렬한 이미지에 순간  말을 잃었다.

무슨 몸이 보디빌더를 보는  같냐? 저게 어딜 봐서 고아원 원장이야. 선글라스만 끼면 동네에서 수금하러 다녀도 전혀 위화감 없을 것 같은데.

미묘한 감탄도 잠시, 이내 원장이 몸을 돌리자 거대한 체구에 가려져 있던 오른팔이 내 눈에 비쳤다. 정확히는 원장이 끼고 있는 의수가 말이다. 그걸 보자, 괜히 저번에 팔이 날아갈 뻔한 경험이 떠올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짧게 혀를 찼다.

“쯧.”

이게 현실이라는 건가. 순식간에 가라앉은 마음에 차분히 생각에 빠졌다. 그래, 이건 소설이 아니라 진짜 현실이라는 거지. 실전에서 조금만 실수하는 순간 영구적인 장애가 남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는.

‘역시 나는 이런  취향이 아니야.’

괜히 밀려오는 불쾌감에 빳빳이 굳기 시작하는 몸을 진정시키고, 다시 고아원을 내려다보았다. 뭐, 됐어.이번엔 내가 싸울 일은 없을 테니까. 주문했던 플레인 요거트 스무디를 한 모금 쭉 마신 뒤, 의자에 몸을 뉘었다.

그나저나 이도영 얘는 언제 오려나.


*

슬슬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해, 이만 카페에서 나와 근처 뒷산에 올라갔다. 고도가 높아진 덕에 근처의 지리가 한 눈에 들어왔다. 꼴에 산이라고  쉴만한 공기가 내 호흡기를 가득 채웠다. 그나저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새끼 왜 안 와.’

슬슬 저녁이 다 되어가는데도 여전히 이도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새끼. 원작에서는 낮에 이미 왔었잖아.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어디서 틀어진 거지?’

아니, 분명 외출한다고 했잖아. 대체 어딜 간 거야. 슬슬 초조해지는 마음에 핸드폰을 꺼내 들고는 이도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야, 어디냐]

[보육원으로 튀어와]

[빨리]

문자를 보내고 얼마나 지났을까. 답신 알림이 울려 휴대폰을 확인했다.

[보육원? 저번에 네가 봉사활동 갔던 곳?]

“이 새끼는 눈치가 없나.”

짜증 섞인 말을 내뱉은 후, 다시 답신을 보냈다.  순간이었다.

[네가 지내던 곳]

[빨리 튀어와]

-송신이 거부되었습니다.

“뭐?”

마지막 문자를 보낸 직후, 갑자기 휴대폰 화면에 송신이 거부되었다는 알람이 떠올랐다. 당황도 잠시, 이번엔 인터넷에 접속해보았다. 똑같이 연결되지 않았다. 통화도, 문자도, 인터넷도, 전부 먹통이었다.

“이런 미친.”

원작에서 영웅들 출동이 왜 늦었나 했더니, 설마 광역 재밍이라고? 아니, 단순히 마인 한 놈이 무슨 수로 광역 재밍을 펼쳐?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시발, 혼자가 아니었네.”

거리 너머 대피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뒤로 전투가 벌어진 듯, 쏟아지기 시작한 마법. 습격자가 단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고아원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 사태의 주범이 내 눈에 들어왔다.

검은 코트를 두른 장신의 남자가 고아원을 향하고 있었다. 그 남자를 향해 시선을 보낸 순간 직감할 수 있었다. 저 새끼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고민이 밀려왔다.

‘이도영도 없는데, 내가 가서 싸울 수가 있나.’

마나는 꽉 찬 상태긴 하지만, 마인이랑 맞서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리고 마기를 흡입하는 순간 아마  가버리겠지. 굳이 내가 가봤자 아무것도 못 하고 시체만 하나 늘어날 뿐이다. 그 생각에 가만히 자리에 멈춰 선 채, 멍하니 마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아이들을 대피시키던 원장이 마인의 존재를 눈치챘다. 마인에게서 풍겨오는 불길한 분위기. 본능적으로 적임을 직감한 원장이 마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분 후,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된 원장이 고아원 건물에 처박혔다.

“이런 미친.”

어째 원작보다 더   같은데. 진짜 내가 저걸 어떻게  수 있나? 아니, 내가 뭘 하긴  해. 시발, 마나 회복시켜줄 이도영도 없는데. 그렇게 내 선택을 합리화하던 순간이었다.

“…시발.”

무력화된 원장에게서 떨어진 마인이 히죽 웃음 지었다. 그리고 이내 마인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방향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인이 향하는 방향에, 대피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사실을 깨닫자마자 욕설을 내뱉었다.

아, 그냥 튈까. 무시하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내가 할  있는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던 도중이었다. 만신창이가 된 채, 정신을 잃은 원장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마인에게 다가가던 원장이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고민이 자취를 감췄다.

‘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그래. 지금 헤르메스도 보고 있으니까. 기껏 인류를 위하는 척 연기해서 꾀어냈는데, 여기서 방관하는 건 말이  되니까. 그러니까 시간만 끄는 거다. 긴장으로 떨리기 시작한 손을 애써 다잡은 뒤, 가방을 벗어 근처 구석에 숨겼다. 그리고 혹시 몰라 가져온 케이스에서 활을 꺼내들었다.

‘맞짱 까는  불가능해도, 적어도 튈 수는 있겠지.’

솔직히 말해, 방금 보여준 힘을 고려하면 그것조차 불확실하다. 그래도 지금 여기는 산이니까. 조금이나마 마나가 회복되는 걸 고려하면 비빌 수는 있지 않을까? 아니, 모르겠다. 계산적으로 생각하면 애초에 지금 내가  지랄을 하는 것도 말이  되는 거니까.

복잡해진 머리를 살짝 흔들어 생각을 지우고, 화살을 활 시위에 메겨 마인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소모할 마나는 정확히 절반.  발로 마인의 주의를 끈 다음, 마나를  쓸 때까지 계속 튄다. 솔직히 계획이라 부르기엔 민망할 정도로 조잡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고.

“진짜 인생 좆같네.”

어째 잘 풀리는 게 하나도 없냐.

진심을 꾹꾹 눌러담은 욕설을 내뱉은 뒤, 마인을 향해 화살을 쏘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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