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계약(2)
* * *
멍하니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스킬 탭? 포인트 시스템? 아.
‘그러고 보니 필요 마나량까지 얼마 안 남았었지?’
설마 그게 지금일 줄이야. 타이밍 실화인가. 얼떨떨한 기분도 잠시,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신을 잃고 나까지 공격하려던 이도영의 상태를 떠올리자마자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
‘근데 쟤 왜 저리 가만히 있냐?’
조금 전 하늘을 가득 채웠던 매직 미사일이 자취를 감추고, 이도영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공격할 의사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넋을 놓고 이쪽을 바라보는 걸 보면, 맛이 간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갑작스럽게 저렇게 태도를 바꾼 이유로 짐작 가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빠르게 읽어내렸다.
[스킬 탭이 복구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체화된 스킬의 랭크가 표시됩니다.]
[체화된 스킬은 마나 소모 없이 자유자재로 발휘할 수 있습니다.]
[스킬을 일부분 변형할 수 있습니다. 단, 소모 마나가 대폭 상승합니다.]
‘이것 때문은 아닌 것 같네.’
스킬의 체화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기도 하고, 체화한 스킬의 랭크를 가시화해서 볼 수 있다는 걸 제외하면 딱히 큰 차이는 없었다. 그리고 스킬의 변형은 뭐, 궁술을 이용해서 총을 쏜다든가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소모 마나가 상승하는 걸 고려하면, 이 기능은 딱히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확인을 마친 뒤, 아래쪽의 메시지로 시선을 내렸다.
[포인트 시스템이 복구되었습니다.]
[스킬을 체화할 때마다 일정량의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획득한 포인트가 일정 이상을 넘어갈 경우, 신체능력이 더욱 강화됩니다.]
[강화되는 능력은 단순한 근력 등뿐만이 아니라, 자연 친화력과 마나 같은 특수 수치도 포함합니다.]
아, 이거구나.
그 메시지를 읽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 탭을 확인하자, 최대 마나 수치가 대폭 늘어나 있는 것이 보였다. 원래는 20이었는데, 60으로 늘어나 있었으니까. 단순히 계산하면 무려 세 배나 늘어난 셈이었다.
‘자연 친화력도 늘어난다고 했지?’
그러면 이도영이 왜 공격을 멈췄는지 이해가 간다. 이도영의 권능과 자연 친화력은 매우 상성이 좋으니까. 아마 친화력이 강해진 탓에, 나를 공격할 생각이 사라진 거겠지.
아니, 근데 생각해보니까 어이가 없네. 저 새끼, 아무리 그래도 피아식별도 못 하냐? 그렇게 투덜거리던 도중, 방금 전 헤르메스가 내뱉은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늦어버렸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 괜히 사람 불길하게 만드네. 애써 행복 회로를 돌리며 헤르메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이내, 헤르메스의 대답이 들려왔다.
[봉인이 부서지자마자 너무 과한 힘을 끌어냈구나. 감정이 너무 격해진 탓이야.]
아니, 원작에서도 봉인은 똑같이 풀렸었는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속으로 중얼거린 말을 들은 것처럼 시기적절하게 헤르메스가 말을 이었다.
[봉인에 구멍이 뚫린 순간, 위기감을 느끼고 제어했다면 그나마 붕괴 속도를 늦출 수 있었겠지만. 그 상태에서 영혼이 오히려 권능을 더욱 부추겼으니, 권능에 휩쓸릴 수밖에 없지.]
아, 그래. 저 말을 들으니 뭔 소리인지, 왜 저렇게 됐는지 이해는 갔다.
그러니까 원작에서는 각성 순간에 이도영이 본능적으로 자기 힘의 유출을 최소화했다는 거다. 그 이상 권능을 발휘했다간 위험해진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권능의 해방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문을 열어 재껴버린 꼴이고, 그 덕에 쏟아져 나온 권능에 영혼이 완전히 잡아먹혀 버렸다고. 하, 이거 참.
‘대체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거야?’
아니, 원작에서는 알아서 잘하던 새끼가 왜 제힘 하나 못 다루고. 아, 몰라. 그래도 엘릭서 먹이면 돌아오겠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 낙관적인 생각이 헤르메스의 부정에 박살이 났다.
[이미 영혼이 잠식당했으니, 엘릭서를 먹여봤자 차이는 없을 게다.]
더 천천히 붕괴할 뿐이지, 결국 영혼의 붕괴는 확정적이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결국, 표정을 와락 일그러뜨린 내게 헤르메스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뭐, 저 권능이 아깝기는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는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구나.]
“…뭐?”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쟤가 죽는 게 왜 좋은 일이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헛소리에 당황한 목소리를 내뱉은 순간, 이내 머릿속에 헤르메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저 아이가 폭주해서 권능을 전부 끌어내면, 제우스의 주목을 사는 것은 확실한 일. 이를 의도치는 않았다고 해도,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겠구나. 이 지긋지긋한 봉인에서 더욱 빨리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으니.]
아니, 이걸 이렇게 한다고? 하, 그래. 그렇게만 보면 좋아 보일지도 모르지. 근데 그건 안 되겠거든.
“헛소리하지 마.”
쟤 없으면 세상은 누가 구하는데. 내가? 난 쟤 없으면 숨도 제대로 못 쉬는데? 애초에 난 주인공 역할 따위 할 생각도 없지만.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던 순간, 헤르메스의 의문 섞인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왜 그런 반응인 것이냐? 저 아이가 폭주해서 붕괴한 이후, 남은 권능을 일부 취하기만 해도 그대가 가진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문제라고?”
[그래. 저 아이에게 마나를 의존해야 하는 그 문제 말이다. 저 아이의 권능을 전부 취하는 건 무리겠지만, 그대의 육신이라면 권능의 일부 정도는 충분히 담아낼 수 있을 터.]
그 권능을 취하면 더는 마나 탓에 괴로울 필요도 없고, 마기의 경우에는 오히려 마주한 마인을 압도할 수 있을 거라고. 그 말을 듣자마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너…. 그게 대체 무슨….”
이건 또 뭔 미친 소리야. 이게 입으로라도 인류를 위한다는 새끼가 할 말인가?
아니, 원래 이런 새끼라는 건 머릿속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이런 개소리를 할 줄은 몰랐는데. 갑작스레 올라온 분노에 헤르메스에게 따져 물은 순간이었다. 헤르메스가 무심하게 대답을 내뱉었다.
[저 아이 하나의 희생으로 모두가 이득을 볼 수 있다면, 굳이 어려운 길을 갈 필요가 있겠느냐?]
미친 새끼.
그 말을 듣자마자 뜨겁게 달궈졌던 머리가 찬물을 부은 듯 빠르게 식었다. 아, 진짜. 얘한테는 전혀 정이 안 간다.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개소리하지 마.”
[음…?]
감성적으로 판단하면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해도 헛소리에 불과하다. 금덩이를 돌멩이랑 바꿔도 유분수지. 지금 주인공을 그까짓 것 때문에 포기하라고? 미친 소리. 그렇게 보내 버릴 거면 내가 왜 여태까지 개고생을 했는데? 쟤 죽으면 어차피 세계 멸망인데.
아니, 사실 이 불쾌감은 그런 이성적인 판단에서 나온 게 아니다. 그냥 지극히 감정적인 이유로 불쾌한 거니까. 내가 이도영을 맨날 욕하고 다니긴 해도, 그건 나니까 괜찮은 거고. 헤르메스 이 새끼는 뭔데 이래라저래라 하냐?
“그래, 네 말대로 하면 이득이라는 건 알겠는데, 난 그건 못하겠거든.”
뭐, 혹시라도 내가 이도영의 권능을 흡수하면, 세계 멸망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빙의한 존재는 최종장에서도 활약했던 인물이니까. 거기에 이도영의 권능을 더하면, 주인공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왜?
“난 어떻게든 쟤를 구해야겠으니까, 구할 방법이나 말해.”
그리고 그걸 떠나서, 한 달 동안 꽤 친해졌는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끝나면,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거든. 그러니까 답이나 말해. 그리고 한참 후, 머릿속으로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할 방법 같은 건 없다. 이미 영혼이 권능에 잡아먹혀 버렸으니.]
영혼의 힘을 키워서 권능을 이겨낸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조차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의외로 반말까지 하며 의견을 씹었는데도, 그리 불쾌하지 않은 듯 헤르메스가 흔쾌히 대답을 건넸다. 아니, 방법이 없다는 말이니까 그렇게 쉽게 건넸을 지도. 그 생각도 잠시, 이내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진짜 구할 방법이 없다고?’
진짜 이건 아니지. 말이 안 되는데. 표정을 구기고 한참 고민에 빠진 순간이었다.
“아아아아아!”
마치 마인과 같은 비명과 함께, 이도영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마나가 방출되었다. 그 갑작스러운 발작에 놀라기도 잠시, 이내 머릿속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잠깐, 영혼의 붕괴가 문제라고?’
나도 그럴 뻔하지 않았었나? 저번, 마인이랑 싸웠을 때. 분명 그때 나도 한계를 넘어서 힘을 썼다고 했잖아.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생각을 이어갔다. 분명 그때, 내가 영혼이 붕괴할 뻔했다고 했지. 봉인된 힘을 너무 과하게 사용했다고. 그리고 그걸 헤르메스가 도운 방식은.
‘정령술로 연결된 통로를 통해서.’
내가 설정했던 정령술의 개념이 머릿속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정령술은 영혼과 영혼을 잇는 계약. 그리고 그 이어진 통로를 통해서, 서로의 영혼을 결속하고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기예다. 그리고 조금 전, 스킬 탭이 복구되었다는 메시지를 연이어 떠올렸다.
‘분명 스킬의 변형이 가능하다고 했지?’
즉, 정령술을 이용하면 이도영의 영혼을 깨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헤르메스에게 전하자, 헤르메스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긍정을 표했다. 그래, 어쨌거나 가능하다 이거지?
하, 내가 만든 문제는 내가 해결하라 이건가. 나 참, 시기적절하게 시스템까지 각성한 거 봐. 타이밍 진짜 말이 되나.
그래, 뭐. 까짓거 하면 되지. 결정을 내리고 이도영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악!”
오른 다리에 박힌 나뭇조각 탓에 다시 자세를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흙바닥에 대가리를 박은 채 치밀어오른 짜증에 이를 갈았다.
아, 진짜 개빡치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