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계약(3)
* * *
‘진짜 죽겠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나뭇조각이 움직이며 상처를 헤집었다. 극심한 고통에 이를 악물고 절뚝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도영에게 가까이 갈수록 마나 농도가 짙어진 덕에 고통을 흘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후우우….”
거슬리는 통증을 호흡을 통한 청량감으로 억지로 묻어버리며 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마나 방출이 마지막이었다는 듯, 어느새 비명을 멈춘 이도영이 다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표정에서 딱히 나를 적대하는 듯한 의사는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공격받는다면 바로 황천행이겠지만.’
뭐, 방금 일어난 신체 강화랑 마나를 회복할 수 있는 점을 고려하면 바로 당하지는 않겠지만. 다리를 다친 이상 결국 방어에 급급하다가 끝장날 거라는 건 예측할 수 있었다. 활은 방어를 위한 도구는 아니라서 불리하기도 하고. 그 순간이었다.
“….”
우우웅
이쪽을 바라보던 이도영의 시선이 날카로워지고, 하늘에 수십 발의 매직 미사일이 떠올랐다. 그 갑작스러운 적대 행위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내 이도영의 시선이 내 허리춤을 향했다. 정확히는, 허리춤에 두른 궁대에 매여 있는 내 활에 닿았다.
“아.”
활 버리라고?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고 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이도영의 시선에서 적의가 사라졌다. 얼마 후, 매직 미사일이 자취를 감춘 허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야생동물 구조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엄밀히 따지면 별 차이 없나? 행동하는 패턴이 똑같은 것 같은데. 잡생각도 잠시, 계속 걸음을 옮겨 이도영의 근처까지 도달했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던 이도영이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흥미와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경계가 깃든 눈빛이 나를 향했다.
‘이거 참….’
반응이 어째 고양이 같네. 진짜 제대로 맛이 가버린 모양이었다. 가만히 이도영을 관찰하고 있자, 이내 머릿속에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본능만 남은 모양이구나.]
구해낼 거라면 최대한 빠르게 구하는 게 좋을 거라며 헤르메스가 조언을 건넸다. 허, 가만히 내버려 두라고 할 때는 언제고? 뭐, 지금 한 조언은 맞는 것 같으니 굳이 또 트집을 잡진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고 이도영에게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한 이도영이 내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천천히, 경계를 사지 않게 조심스레 다가간 손이 이내 이도영의 가슴팍을 짚었다.
‘원래 정령 계약을 맺을 때는 신체 접촉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이전, 지리산 던전에서 헤르메스와 계약을 시도했을 때처럼. 본래 정령 계약을 맺기 위해서는 굳이 신체 접촉까지 할 필요는 없다. 양자 간의 동의만 있으면 어느 정도 근접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혼을 연결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일반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이도영의 영혼은 권능 깊숙한 곳에 잠겨 의식을 잃어버렸고, 그 탓에 이도영의 동의를 구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이러한 악조건에서 정령 계약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일단 최대한 근접할 필요가 있었다.
이도영과 가만히 눈을 맞추고 순식간에 마나를 끌어 올렸다. 목표한 랭크는 SS. 저 막대한 권능 속에서 영혼을 찾아내려면, 높은 등급으로 한 번에 밀어붙여야 한다.
[정령술(SS)가 적용됩니다.]
‘…미친.’
이도영과 거의 제로 거리에 가까운 위치. 폭주한 탓에 어마어마한 마나를 뿜어내는 이도영의 곁에 있음에도 마나가 순식간에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가까이 있었던 덕에 이 정도로 그쳤다고 봐야겠지. 호흡하면서 소모량의 일부나마 실시간으로 회복할 수 있으니까.
시스템의 마나 잔여량이 가파르게 깎여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깊은 곳 어딘가에 침잠해 있는 이도영의 영혼을 향해 정령 계약의 술식이 뻗어 나갔다. 순식간에 바닥을 향하는 마나를 조금이나마 충당하기 위해 호흡을 몰아쉬며 영혼을 향해 의식의 줄기를 뻗었다.
“아아….”
그리고 간발의 차, 마나가 바닥 치기 직전이었다. 뻗어낸 의식의 줄기, 정령 계약의 술식이 이도영의 영혼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 영혼을 자극받은 덕에 조금이나마 이지를 되찾은 듯, 본능만이 가득하던 이도영의 눈동자에 희미하게 감정이 깃들었다.
그 쾌거에 기뻐하기도 잠시, 이내 느껴진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젠장.”
기껏 연결한 패스가, 이도영의 권능에 의해 순식간에 마모되고 있었다. 현재 호흡을 통해 흡수하고 있는 마나는 패스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전부 소모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마나를 쏟아 부었음에도 패스가 서서히 끊어지고 있었다.
‘마나가 부족해. 이래서는 계약은 무리야.’
현재 이도영의 영혼은 완전히 권능에 침잠된 상황. 정령 계약을 마치기 위해서는 단순히 패스를 잇는 것을 넘어, 패스를 통해 서로의 영혼을 이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당연히 또 마나를 소모했다.
마나를 회복하기 위해 숨을 들이켠다고 해도, 폐활량의 한계 탓에 충분한 마나를 회복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과하게 숨을 들이켠 탓에 과호흡이 온 건지, 아니면 아까부터 계속 피를 흘린 탓인지, 슬슬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정신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던 도중이었다.
[호흡기다.]
‘…뭐?’
[그대가 힘을 흡수하는 기관도, 저 아이가 힘을 내뿜는 기관도 호흡기. 그 기관을 직접 접촉하면 더욱 빠르게 힘을 흡수할 수 있을 게다.]
머릿속으로 들려온 헤르메스의 말에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이게 대체 뭔 소리냐. 그러니까 호흡기를 맞대라 이 말이지? 그 말뜻을 온전히 이해한 순간 밀려오는 황당함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얘랑?’
이도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내가 얘랑 입이라도 문대라 이거냐? 이건 진짜 에반데. 진짜 그건 아니지.
‘아니, 다른 방법은 없어요?’
[그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다.]
단호한 거 봐라. 어이가 없네. 내 질문에 단칼에 잘라 대답한 헤르메스의 말을 듣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내가 얘랑…그걸 하라 이거지?
‘…그냥 버릴까.’
사실 나 혼자 해도 충분히 세상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왜, 어떤 영화에서도 그랬잖아. 켄트, 너 혼자 세상을 구하라고. 개소리를 내뱉기도 잠시, 이내 느껴진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투두둑! 마치 줄이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기껏 연결했던 패스가 끊어지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했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상황. 그 다급한 상황에 급하게 머릿속으로 합리화를 되뇌었다.
‘인공호흡이니까. 그냥 인공호흡 같은 거니까.’
불쾌감을 억누르고 이도영을 향해 얼굴을 향했다. 급격히 가까워지는 얼굴에 눈을 감았다. 차마 눈을 뜨고 입을 맞대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입술이 맞닿은 순간, 밀려온 감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아니, 잠…!]
머릿속에 무언가 목소리가 들려오기도 잠시, 이내 느껴지는 압도적인 감각에 헤르메스의 말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지워져 버렸다. 순간 밀려온 그 막대한 쾌감에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몸 안을 가득 채운 어마어마한 마나가, 끊어지기 직전이었던 패스를 보강하다 못해 고속도로라도 뚫듯 직통으로 길을 뚫어버렸다.
그 거대한 쾌감에 휩쓸리기도 잠시, 필사적으로 의식을 부여잡은 뒤 정령술을 다시 펼쳤다. 시스템에 쌓여 있던 마나가 다시 깎여나간 순간이었다. 이내 소모량의 몇 배나 되는 마나가 다시 밀려와 마나통을 가득 채웠다. 그 어질어질한 감각을 필사적으로 무시한 뒤 패스를 향해 영혼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방대하게 뚫린 패스를 통해 순식간에 뻗어 나간 영혼이, 이내 이도영의 영혼과 맞닿았다.
*
영혼이 맞닿은 순간, 붕괴를 시작한 이도영의 영혼에서 이쪽을 향해 무언가가 새어 들어왔다. 그 무언가를 확인한 겨를도 없이 이도영의 영혼을 내 영혼과 이어붙였다. 그와 동시에. 이도영의 영혼에만 가해지던 막대한 압력이 내 영혼을 향했다.
얼마 전 느꼈던, 영혼이 갈려 나가는 듯한 감각. 끔찍한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이었다.
[정령술(SS)가 적용됩니다.]
[사용자와 연결된 영혼에서 시스템에 편입할 수 있는 마법의 파편을 확인했습니다.]
[파편을 흡수, 재구성합니다.]
머릿속에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 퍼지고, 이내 영혼을 향해 느껴지던 압력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그 감각에 안도감을 내뱉으며, 정령 계약을 마쳤다.
[계약에 성공하셨습니다.]
머릿속에 표시된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후, 아직도 이도영과 맞닿아 있던 입을 뗐다. 그 순간, 연결된 호흡기를 통해 끝도 없이 흘러들어오던 마나의 공급이 끊어졌다. 어째 묘한 상실감이 들어 아쉬운 눈빛으로 이도영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아….”
어느새 눈을 떴는지, 나를 바라보고 있던 이도영과 눈이 마주쳤다. 계약의 효과가 있었는지, 정신은 아주 멀쩡한 모양이었다. 눈에 당혹감이 가득 차 있었으니까. 아니, 잠깐만. 이 새끼, 정신 차렸어? 대체 언제?
“너…언제부터….”
“아, 그게.”
내 질문을 들은 이도영이 뻘쭘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기도 잠시, 마주친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던 이도영이 순간 숨을 들이켰다. 당황으로 물든 얼굴이 이내 새빨갛게 변했다. 아, 깨어있었네. 반응을 보니까 확실하네.
아니, 그래, 계약하고 나서 꽤 지났으니까. 정신을 차릴 수는 있긴 한데. 그렇긴 한데.
‘아, 돌겠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급격히 수치심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피가 쏠린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차마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이 상황. 어째 익숙한 것 같다? 빌어먹을. 한참을 입을 다물고 있자, 이도영이 내게 입을 열었다.
“저….”
“닥쳐.”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 진짜 죽고 싶으니까. 아니, 기껏 살려낸 게 후회될 것 같으니까.
날카로운 내 목소리를 들은 이도영이 입을 닫았다. 그 이후 계속 침묵이 이어지는 공간 속에서, 어색한 분위기가 주위를 한참 맴돌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