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계약(4)
* * *
한참 후, 현장에 도착한 토벌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남은 마인을 소탕하러 왔는데, 막상 와보니 마인은 온데간데없고 생도 둘만 보이니 놀랄 만하지.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이내 토벌대의 손에 이끌려 병원으로 이송당했다. 이도영은…뭐 딱히 다친 곳도 없으니까 고아원을 가건 뭘 하건 알아서 했겠지. 그 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어지러워.’
수술을 마친 후, 병실 침대에서 눈을 떴다. 마취가 막 풀린 탓인지 머리가 욱신거렸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불쾌한 감각이 들었다. 조명에서 나오는 밝은 빛이 눈을 찔러왔다. 기껏 뜬 눈을 다시 질끈 감고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한참 후, 어느 정도 통증에 익숙해진 후에 조심스레 다시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자, 무기질적인 병실 내의 인테리어가 시야에 비쳤다. 그러고 보니 어째 요즘 입원을 자주 하는 것 같은데. 저번에 마인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생각해보니 전부 마인 탓이네?’
입을 삐죽이기도 잠시, 이내 머릿속에 맴돌던 기억을 되살렸다. 이번에 조우한 마인은 좀 이상한 점이 많았으니까. 예를 들자면 이도영이 각성한 이후에도 멀쩡하게 전투를 이어갔다던가.
머릿속에 하나하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인과 싸우다가 죽을 뻔했던 일. 치명상 직전에 이도영이 도착한 일. 기절했다가 깨어났더니 이도영이 폭주하고 있었던 일. 그리고 정령 계약을 위해 이도영과 입을 맞췄던 일.
“아.”
젠장.
마인이랑 별 상관없는 일까지 떠올려 버렸다. 탄식도 잠시, 이내 수치심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인공호흡 같은 거였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지 않나?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필사적으로 시도했지만, 결국 얼굴에 쏠리는 피는 막을 수 없었다.
와그작
무의식적으로 이불을 잡고 있던 손을 꽉 쥐었다. 이불이 구겨지는 소리가 마치 내 멘탈이 바스러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분명 구조를 위한 행동이었음에도 어째서인지 부끄러움이 가라앉지 않았다. 아니, 사실 그 이유는 명확했다.
‘…순간 아쉬웠으니까.’
그때, 이도영과 떨어진 순간 끊겨버린 쾌감에 잠시나마 아쉬움을 느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선명하게 남은 기억이 계속해서 정신에 수치심을 때려 박았다. 한참 동안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몸을 부들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한 번뿐이니까.”
그러니까 괜찮다. 어차피 계약도 끝났고, 자퇴하고 나면 이제 볼일 없을 테니까. 사관학교에 입학할 때 목적했던 일은 전부 끝났으니까. 그러니까 괜찮다. 진짜 괜찮다고.
필사적으로 자기합리화를 반복한 덕에 어느 정도 머릿속이 진정되었다. 가슴 속에 남은 수치심을 크게 숨을 뱉어내 지워낸 뒤, 빠르게 생각의 방향을 바꿨다. 아니, 원래 생각하려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분명 마인이 다룬 건 이계의 힘이라고 했지?’
이계, 게이트를 통해 이어진 다른 세계. 어째서 그 마인이 이계의 힘을 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원작에서는 각성하자마자 순식간에 쓸려나가는 잡몹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힘의 출처를 알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 하나는 명확했다.
여태까지 늘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원작이랑 스토리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아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번 일은 납득이 안 가는데?’
사관학교 내부에서 일어난, 다른 생도들이랑 엮인 일은 내 존재가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그렇다 쳐도, 게이트 쪽에는 내가 무슨 영향을 끼쳤을 리가 없는데. 나비 효과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로 원작이랑 틀어질 수가 있나?
‘뭐, 알아서 하겠지만.’
원작 전개에서 어느 정도 틀어졌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 대신 이도영도 원작이랑은 다르게 완벽하게 각성했으니까. 더 이상 내가 스토리에 간섭할 일이 없을 거라는 걸 감안하면 오히려 이득이 아닐까. 아무리 낮게 잡아도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다.
‘그리고 엘릭서도 남았고.’
먹일 타이밍이 안 나서 아직 못 먹이긴 했지만. 이걸 먹이고 나면 더 강해질 테고. 뭐, 이 정도면 괜찮은 편 아닌가? 목적했던 일도 전부 끝냈고, 이젠 진짜 자퇴해도 될 것 같은데.숨쉬기 힘들어지는 건 좀 아쉽긴 하겠지만….
잠깐.
‘어라?’
그러고 보니 아까 눈을 뜬 이후부터, 아니 이도영과 떨어져서 병원에 실려 온 순간부터, 호흡할 때마다 항상 들었던 역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황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한참을 둘러보았지만, 시야에 식물이나 이도영의 모습은 들어오지 않았다. 이도영의 물건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 하하하.”
설마 갑자기 이게 이렇게 된다고? 당황도 잠시, 이내 웃음이 흘러나왔다. 무미, 무취. 아무런 불편함도 없이 숨을 마음껏 쉴 수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이 몸에 빙의하기 전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던 공기의 소중함이 뼈저리게 와닿았다.
‘좋은 일은 겹경사로 온다더니.’
급격히 좋아지는 기분에 미소를 머금었다. 와, 이게 되네. 그치, 사람이 숨을 쉬고는 살아야지. 그렇게 한참 혼자서 호들갑을 떤 이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런데 갑자기 왜?’
정말 좋은 변화이긴 하지만, 어째서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지는 파악해야 했다. 까딱했다가 원래대로 돌아가면 더 힘들어질 테니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한 결과, 대략 두 가지 이유를 예상할 수 있었다.
‘시스템 각성, 아니면 이도영이랑 한 정령 계약.’
그렇게 예상하기도 잠시, 이내 본능적으로 직감이 들었다. 이 변화는 시스템 각성과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 직감에 따라 계약 도중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니까 이도영과 어쩔 수 없이 입을 맞췄던 일…따위가 아니라. 다시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지우려 고개를 한 번 저은 뒤 생각을 이었다.
‘분명 이도영이랑 계약하기 직전에, 그쪽에서 뭔가 내 영혼을 향해 흘러들어왔었지.’
아마 그게 원인일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권능 일부를 받았다거나, 그런 일이 아닐까? 그렇게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순간이었다.
똑똑
병실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사인가? 고개를 갸웃하고 들어와도 괜찮다는 허락을 건넸다. 그리고 허락을 고한 이후, 병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문을 연 상대는 냉막한 인상의 남성이었다. 가운을 입지 않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의사는 아닌 것 같았다. 근데 의사도 아니면 누구래? 빤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응시한 남성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이내 침대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은 남성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반갑네.”
“아…네.”
근데 누구세요? 그런 의문이 담긴 내 시선을 받은 남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유진이 아비 되는 사람이네.”
어…그러시구나. 고개를 끄덕이기도 잠시, 이내 남성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당황이 밀려왔다.
아니, 댁이 왜 여기서 나와?
*
간단한 자기소개를 마치고 김유진의 아버지, 김시우가 입을 열었다. 김유진의 부탁을 받고 왔다나 뭐라나. 뭐, 김유진이 내가 입원했단 사실을 어디서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아마 이도영이겠지.’
걔 빼면 딱히 내 소식을 전해줄 사람이 없을 테니까. 생각을 마치고 김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 양반이 한국에서 유일한 대마법사라 이거지.
원작에서 본 바로 평가하자면, 이 인간은 조금 특이한 구석이 있었다. 이도영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딱히 심오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딸바보라서 그런 것 같긴 하지만. 생각해보니 별로 특이한 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별 영양가 없는 생각을 이어가며 가만히 김시우를 바라보자, 그 또한 나를 유심히 응시했다. 마치 탐색하는 듯한 시선에 살짝 불쾌한 감정이 들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그가 입을 열었다.
“유진이한테 얘기는 조금 들었네. 사관학교에서 제일 처음 사귄 친구라고.”
“네.”
그렇게 말한 김시우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진짜 왜 이렇게 쳐다봐? 슬슬 부담스러워질 무렵이었다.
“딸아이와 친하게 지내 줘서 고맙네.”
“친구니까요.”
굳이 따지자면 친하게 지내 주는 쪽은 걔가 아닐까. 난 걔랑 이도영 빼면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하자 김시우가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후 김시우가 내게 한 가지 부탁을 건넸다.
“잠시 팔을 내줄 수 있겠나?”
그리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다. 아마 내 몸 상태를 확인하려는 게 아닐까. 대마법사라는 칭호에 걸맞게, 그는 치유 마법에도 꽤 조예가 있었으니까. 김유진한테 부탁받아서 왔다고 했으니까, 후유증이 없나 확인해보려는 거겠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내 손목을 짚은 김시우가 얼마 후 침음성을 흘렸다.
“흠….”
그 긍정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반응에 순간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한참 검사에 집중하는 듯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김시우가 이내 손을 뗐다. 그러고는 내게 짤막하게 인사를 건넸다.
“고맙네.”
“아뇨, 별거 아닌데요.”
그래서 왜 그런 반응인데? 조금 불안해진 기분에 답변을 재촉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을 받은 김시우가 이내 입을 열었다. 다만 내 의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그래, 하나만 물어도 되겠나?”
“…아, 예. 그러세요.”
김새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의문문에 의문문으로 대답하지 말라고. 뭐, 내가 직접적으로 물어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화의 흐름이란 게 있잖아. 속으로 투덜거리기도 잠시, 이내 김시우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자퇴를 고민 중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
‘아니, 그 얘기는 대체 어디까지 퍼진 거야?’
그 질문을 받자마자 어이가 없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공공재도 아니고, 만나는 사람마다 내 자퇴 사실을 알고 있네. 뭐, 아마 김유진이 말했겠지만. 아버지한테 고민 상담이라도 했나? 짧게 생각을 마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을 들은 김시우가 입을 닫았다. 그리고 한참 후, 달갑지 않은 말이 들려왔다.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네.”
“…네?”
위험해질 테니까. 그렇게 말한 김시우가 진중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갑작스레 형성된 진지한 분위기에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니, 갑자기 이게 뭔 소리야? 나, 자퇴하지 말라고? 진짜? 왜?
에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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