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1화 〉 계약(5) (71/167)

〈 71화 〉 계약(5)

* * *

갑작스레 튀어나온 폭탄선언에 멍하니 김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게 뭔 헛소리야. 위험해져? 내가 왜?

뭐, 사실 그 답을 생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인을 쓰러뜨리기 직전 들었던 말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걔가 뭐라고 했더라? 분명 교인지 뭔지 하는 뭔 이상한 단체에 들어갔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데 교가 대체 뭐냐?

‘마인 주제에 사이비 종교라도 들어갔나.’

악마랑 계약한 놈이 정상적인 종교를 믿을 리도 없고. 아니, 꼭 그렇지도 않나? 어디에나 별종은 있는 법이니까. 아무튼 간에 무슨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건 확실한데. 그 예상을 확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마인 때문에요?”

“그래.”

내 질문을 들은 김시우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그거 때문인가 보네. 아니, 원작에서는 별 영향 없지 않았나? 갑자기 억울해진 기분에 눈가를 좁혔다.

“알고 있으니 이야기가 쉽겠군. 자네, 그러니까 자네와 이도영 군이 쓰러뜨린 마인은 어떤 단체에 속해 있었네.”

그래, 무슨 단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나도 알아. 고개를 끄덕이기도 잠시, 이내 김시우의 입에서 나온 이도영의 이름에 당황이 밀려왔다. 그런데 네가 걔를 어떻게 알아?

“저…이도영을 알아요?”

“그래, 어제 한 번 만났으니 말이네.”

헐, 실화냐?

원작 기준으로는 이 양반이 이도영을 마주하는 건 꽤 나중의 일인데. 또다시 꼬여버린 스토리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 그보다 그러면 이도영 이 새끼, 어제 점심에 고아원 안 오고 이 양반이랑 만나고 있었어? 왜?

“…왜요?”

“내게 물어볼 게 있다고 하더군.”

아니, 그래서 그 이도영이 물어본 게 뭔데. 호기심에 가득 찬 내 시선을 김시우가 가볍게 무시했다. 나 참, 단호한 거 봐라. 김시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고아원을 습격했던 마인이 속한 단체의 이름은 불명. 꽤 오랫동안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긴 하나, 그 세력을 급격히 불리기 시작한 건 몇 주 전부터라고.

‘몇 주 전이라고?’

생각보다 더 가까운 기간에 고개를 갸웃했다. 시간대를 보면 진짜 내가 영향을 끼친 건 맞는 것 같긴 한데.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이 안 가서 문제네. 아, 모르겠다.

“아직 단체의 정식 명칭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몇 가지 정보는 입수할 수 있었다네. 일단 소속된 마인들이 그 단체를 부르기를, 스스로를 신교라고 하더군.”

그 말을 내뱉은 김시우가 우습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신교라, 어째 되게 익숙한 네이밍 센스인데. 무협 소설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단체가 생각나는 명칭이잖아.

‘이래 봬도 무협도 써봤으니까.’

비록 정통무협은 아니고 신무협이었던 데다가, 결국 연중해버리긴 했지만. 일단 무협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정도는 있단 말이다. 뭐, 그런데 그건 딱히 중요한 건 아니고. 애초에 이 세상은 무협지 세계관도 아니잖아. 잠시 들었던 잡생각을 흘려넘긴 뒤 다시 김시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는 마인들이 모인 종교 단체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마교라고 부르고 있긴 하지만 말이네.”

‘…진짜 마교라고 부르냐?’

진짜 무슨 무협지 클리셰도 아니고, 어이가 없네. 내 표정에 여실히 드러난 감정을 읽은 김시우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솔직히 웃기긴 하잖아. 현대 배경에서 마교라니.

“모티브가 소설의 그 마교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점은 꽤 규모가 큰 조직이라는 거네. 근래 많은 마인들을 받아들였으니.”

게다가 꼬리를 잡을 수가 없어서 더욱 위험하다고. 그렇게 말한 김시우가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는 듯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게 모인 마인들에게 동료 의식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네. 게다가 자네가 처리한 마인은 세를 불리는 과정에서 영입한 어중이떠중이로 추정되고 말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단체인 이상, 그 소속원을 쓰러뜨린 나나 이도영에게는 응징을 위해 마인이 찾아올 수도 있다고. 그나마 사관학교 내부라면 경계가 철저할 테니 안전하겠지만, 자퇴하는 순간 신변이 심각하게 위험해질 수 있다나?

그 설명을 듣고 난 뒤,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망했네.’

젠장. 아무래도 자퇴 후 인방여신 날백수 라이프를 즐기기는 글러먹은 모양이었다. 아니, 뭐. 내 성격상 인방 켠다고 잘나갈 것 같진 않지만. 그건 그렇고이도영 얘만 제때 왔어도 내가 마인 단체한테 찍히는 일은 없었을 것 같은데?

갑작스레 솟아오른 짜증에 괜히 속으로 이도영을 탓하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자네가 자퇴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네.”

“네?”

아니, 또 있다고?

당황한 표정을 지은 나를 바라보며 김시우가 설명을 재개했다.

*

“그러니까 이도영이랑 멀어진 채로 시간이 지나면 둘 다 위험해진다구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 이해가 안 가네.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이내 김시우가 설명한 사실을 차근차근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어제 김시우와 이도영이 만났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김시우는 이도영의 몸에 걸려 있는 봉인을 확인했다고. 하지만 자칫 그 봉인을 잘못 건드렸다간 이도영의 몸에 큰 부담을 갈 수 있어 손을 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내 몸에서도 비슷한 봉인의 패턴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뭐, 그건 짐작 가는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도영과 계약을 나눈 순간, 시스템이 이도영의 영혼에서 마법의 파편을 흡수했다고 하니까. 아마 그건 부서졌던 봉인의 파편이었겠지.

그런데 그게 왜 나랑 이도영한테 위험하다는 거지?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했다. 애초에 봉인은 권능을 봉인하기 위해 걸렸던 거니까, 권능이 없으면 별 상관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는 나를 보며 김시우가 말을 이었다.

“자네의 몸에는 틀림없이 그와 같은 봉인이 존재하네. 하지만 자네의 몸에는 그 청년이 가진 힘은 극소량밖에 존재하지 않지.”

그렇게 말한 김시우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그 위에 생생한 환상이 그려졌다. 두 종류 물건의 형상을 띈 환영이 김시우의 손바닥 위에 떠올랐다.

하나는 한계까지 부풀어 오른 물풍선,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용물이 텅 비어 있는 페트병이었다.

‘이게 뭔데?’

의문 섞인 시선을 보내자 이내 김시우의 입이 열렸다.

“이 두 가지는 각각 자네와 그 청년의 몸이라네. 그 청년의 몸이 풍선이라면, 자네는 페트병이지.”

그렇게 말한 김시우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이내 풍선의 환영이 더욱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얼마 후, 계속되는 팽창을 견디지 못한 풍선이 터져 나갔다.

“그 청년의 봉인은 비유하자면 풍선이라네. 내부에 품은 힘이 조금이라도 늘어난다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겠지.”

그렇게 말한 김시우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 옆에 있는 페트병이 순식간에 찌그러졌다. 아니, 저거 내 몸이라며? 어째 찝찝해진 기분에 묘한 시선을 보냈다.

“반대로 자네의 봉인은 이 페트병과 같지. 내부가 진공 상태에 가깝기에, 순식간에 찌그러져 버릴 수도 있다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 결국 내가 봉인을 흡수한 게 문제가 된다는 말이잖아. 아니, 어째 되는 게 없네, 진짜.

찌푸려진 내 표정을 본 김시우가 담담하게 손을 반대로 움직였다. 터진 풍선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페트병의 뚜껑이 열렸다. 그 상태에서 풍선과 페트병의 입구가 연결되고, 이내 풍선에 들어있던 물이 페트병으로 쏟아졌다. 안정을 되찾은 풍선과 페트병을 보여준 김시우가 손을 휘저어 환상을 지워냈다.

“자네가 가진 봉인은 그 청년의 봉인과 매우 유사하지. 아마 자네가 그 청년과 접촉한다면, 봉인의 유사점을 통해서 힘을 공유할 수 있을 거라네.”

풍선과 페트병은 이해를 위한 극단적인 예시일 뿐이고, 실제로는 접촉을 통해 부담을 더는 수준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김시우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완벽히 이해했어. 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그거잖아?

‘결국, 또 이도영이랑 붙어 있어야 한다는 거네.’

밀려오는 답답함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젠장.

***

유시아와 이야기를 마친 후 돌아가는 길, 방금 전 마주한 상대를 떠올린 김시우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몇 주 전, 딸아이의 부탁으로 김시우는 유시아의 과거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한국 유일의 대마법사라는 칭호가 가지는 막강한 힘. 그러한 힘을 휘둘러 개인의 신상을 몰래 조사하는 건 그리 당당한 일은 아니었지만, 혹시나 친구에게 나쁜 일이 있었다면 그녀도 모르게 해결해주고 싶다던 딸아이의 기특한 말에 가볍게 시작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조사 결과는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그녀에 대한 그 어떠한 사실도 알 수 없었으니까.

마치 허공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유시아라는 이와 관련된 정보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끽해봐야 입학 직전, 몇몇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가입했다는 정도가 얻어낸 정보의 전부였으니까. 아무리 본격적으로 조사하진 않았다고 해도, 그가 그 정도로 아무 정보도 찾을 수 없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유시아와 마주친 김시우는 하나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유시아의 몸에 걸려있던 봉인. 그건 단순히 유사한 봉인 정도가 아니었다. 전날, 이도영의 몸에서 감지했던 것과 동일한 형태의 봉인이었으니까.

‘봉인이 풀렸음에도 그 청년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지.’

어제 마인 테러 이후, 딸아이가 부탁한 이는 유시아 뿐만이 아니었다. 딸아이의 부탁에 따라, 이도영의 상태를 확인한 김시우는 이도영의 봉인이 풀렸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 막대한 힘의 봉인이 풀렸음에도 이도영의 몸에는 어떠한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유시아의 몸에서 감지된 이도영과 동일한 봉인. 그리고 극소량이지만 그 청년이 가진 힘과 동일한 힘.

그것들이 단순한 우연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유시아의 정보를 조사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미 시도해봤음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심증만으로 조사 외의 다른 수단을 시도하기에는, 도의적인 문제와 더불어 그녀가 딸아이와 쌓은 교분이 눈에 걸렸다.

‘결국, 그 청년이 해답이겠군.’

이상할 정도로 거대한 힘을 몸에 품고 있는 이. 그리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졌을 리 없는 고도의 봉인식. 그 사실만으로 보면 유시아보다도 수상한 청년이었다. 그리고 유시아, 그녀가 접근하는 상대라는 점에서 그 청년을 조사해볼 가치는 충분했다. 물론 딸아이의 친우인 건 마찬가지니 다른 수단을 시도할 수 없는 것은 동일하겠지만.

생각을 마친 김시우가 손가락을 튕겼다. 동작에 맞춰 순식간에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이 빛을 뿜었다. 김시우의 몸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이내 마법진의 빛이 사그라들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