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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화 〉 이후(3) (74/167)

〈 74화 〉 이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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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진이 자리를 비우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속에서 침묵이 맴돌았다. 서로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눈이 마주치면 다시 시선을 피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한참 삽질하던 도중, 문득 짜증이 피어났다.

‘아니, 근데 왜 이러고 있지?’

엄밀히 따지면 나는 의료 행위를 한 것뿐이고, 오히려 얘는 그 덕에 살아남았으니까 나한테 감사해야 하는 쪽 아닌가? 지금 내가 어색해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레 쏘아진 내 시선을 받은 이도영이 고개를 피했다.

“…야.”

“응? 어, 어.”

내가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는지, 당황 섞인 목소리로 이도영이 내 말에 다급히 대답했다.

“그런데 너, 몸은 괜찮냐?”

“아….”

그 질문을 들은 이도영이 어째 묘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뭐. 생각해보면 다쳐서 병원에 입원까지 한 사람이 정작 다른 사람한테 건강 상태를 묻는 건 좀 웃기긴 하겠네. 너나 잘해. 뭐, 이런 건가?

‘근데 얘도 그렇게 안전한 상황은 아닌데.’

김시우의 설명대로라면, 나만 위험한 게 아니라 얘도 위험한 거잖아. 권능 자체는 현재 안정된 상태지만, 까딱하면 한순간에 붕괴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권능에 관해서 생각하던 도중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얘랑 가까이 있는데, 왜 마나 회복되는 느낌이 안 들지?’

평소에 이도영의 근처에 가기만 해도 느껴졌던 청량감. 마나가 회복될 때의 그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의문을 품은 순간, 헤르메스가 내게 말을 전했다.

[저 아이의 권능이 안정된 탓이다.]

‘권능이 안정된 탓이라고?’

아, 뭔 소린지 알겠다. 그 말을 듣자 이내 쉽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전, 계약을 통해 이도영의 권능이 안정된 게 문제였다.

각성 전에는 봉인이 차마 다 막지 못한 권능이 일부 새어 나왔지만, 이제는 권능이 안정을 되찾았으므로, 더는 권능이 체외로 발산되지 않게 된 거다. 안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건 이도영에게는 꽤 이득이겠지.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그럼 마나 회복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현재 보유중인 마나]

[15/60]

시스템을 확인하자 거의 텅 비어 있는 마나통이 눈에 들어왔다. 요 며칠간 스킬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기본 유지비만으로 대부분의 마나를 소모했으니까. 하루 유지비가 15로 대폭 증가한 것을 감안하면, 내일이면 마나가 완전히 오링날 예정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큰일 난 것 같은데.’

변제일이 코앞에 닥친 빚쟁이가 된 듯한 기분으로 이도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도중, 자그마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내 시선이 향하는 각도가 조금 달라진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너, 어째 키가 좀 큰 것 같다?”

“응? 아…그러게. 요 며칠간 이상하게 키가 크더라고.”

‘흐음, 그렇다 이거지?’

아직은 예전 키와 그리 큰 차이는 없지만, 아직 며칠밖에 안 지났다는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성장이었다. 무슨 사람이 콩나물도 아니고 말이야. 뭐, 그래도 성장한다는 것 자체는 알고 있어서 그리 큰 충격은 오지 않았다.

애초에 신체의 모든 잠재력을 끌어다 권능을 봉인하는 데 쓰고 있었으니, 봉인이 풀린 지금 뒤늦게 못 다한 성장을 시작하는 거니까. 원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뭐, 원작에 비해 키가 크는 성장세가 조금 더 가파른 것 같긴 하지만.

‘이 정도면 조만간 나보다 더 커지겠는데?’

허, 참. 이 몸뚱아리는 더 안 크려나? 누굴 올려다보는 건 내 취향은 아닌데.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누가 나를 내려다보는 게 마음에 안 든다고 해야겠지. 뭐, 그건 그렇고 몸의 잠재력이 해방되었다, 이거지?

‘그러고 보니 엘릭서도 먹여야 하는데.’

잠재력 하니까, 지금 가방에 넣어둔 엘릭서가 떠올랐다. 누가 주인공 아니랄까 봐, 저 몸 자체가 가진 재능도 괴물 수준이긴 하지만, 그래도 엘릭서를 먹이면 더 나아질 테니까. 아마 권능의 폭주 위험도 줄어들 테고. 확신을 갖기 위해 헤르메스에게 질문을 던지자 이내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저 아이가 엘릭서를 사용한다면, 네 말대로 권능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긴 할 게다.]

오, 그러면 굳이 봉인 때문에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는 거 아냐? 그렇게 행복 회로가 돌아간 순간이었다. 헤르메스가 과열된 내 회로에 찬물을 끼얹었다.

[하지만 그건 저 아이 한정이고, 네가 가진 불안정함은 여전하겠지.]

에라이. 괜히 기대했네. 결국, 나는 여전히 위험한 상태일 거라는 말이잖아. 그렇다고 내가 엘릭서를 먹어봤자, 나한테는 효험이 없다고 했고.

‘뭐, 어째 이럴 것 같긴 했지만.’

결국, 이도영이랑 붙어 있어야 하는 건 변함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 생각에 빠져 있던 순간이었다. 이도영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 시아야.”

“응?”

“…고마워.”

그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갑자기 뭔 헛소리래? 내 시선을 받은 이도영이 황급히 부연설명을 시작했다.

“고아원이 습격당했을 때, 네가 마인을 유인해줬다면서.”

“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근데 애초에 네가 빨리 왔으면 내가 그럴 필요도 없지 않았을까. 살짝 이도영을 노려보기도 잠시, 이내 눈에서 힘을 풀었다. 뭐, 어쨌거나 오긴 왔으니까. 그리고 굳이 얘한테 감사받을 생각도 없었고.

“딱히 너 때문에 한 일은 아니야.”

그냥 애들까지 건드리는 게 보기 싫었을 뿐이지. 딱히 이도영 때문에 마인을 막은 건 아니었다. 그 말을 들은 이도영이 옅게 웃음을 지었다. 반달처럼 곱게 눈꼬리를 접은 이도영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하고 싶었어.”

“그, 그래.”

진지한 목소리 탓에, 괜히 부담스러워져 작게 말을 더듬었다. 이런 공치사는 익숙하지 않은 탓에 묘하게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그리고 한참 후, 이도영이 말을 마치고 다시 형성된 어색한 분위기에서 엘릭서를 꺼내 들었다. 의문이 깃든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도영에게 묵묵히 엘릭서를 내밀었다.

“…야, 이거 받아라.”

“응?”

자신에게 뻗어진 내 손을 바라본 이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궁금증 섞인 시선이 흘깃하고 내 손에 들린 엘릭서를 향했다.

“…이게 뭐야?”

그리고 얼마 후, 엘릭서를 본 이도영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뭐, 뽁뽁이로 둘러싸여 있는 오색의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참 언밸런스한 비쥬얼이긴 한데. 멍하니 엘릭서를 바라보는 이도영에게 입을 열었다.

“그냥 몸에 좋은 약이니까, 너 먹으라고.”

내 말을 들은 이도영이 시선을 돌려 빤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구질구질하게 이게 뭔지 설명하긴 좀 그런데. 괜히 혼자 얼굴에 금칠하는 것 같잖아. 어색한 기분에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이내 이도영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네가 먹어도 되잖아.”

“나한텐 효과 없어.”

“….”

아무래도 얘, 안 믿는 것 같은데. 이도영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이도영이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매번 너한테는 받기만 하는 것 같네.”

‘또 이러네.’

뭐, 내가 해준 게 많긴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도움 받았으니까. 쌤쌤이로 쳐도 되는 거 아닌가? 굳이 또 궁상을 떠네.

“이번에는 오히려 네가 날 도와준 쪽인데.”

“응?”

“마인한테 당했을 때, 네 덕에 살았잖아.”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이도영의 모습에 눈가를 좁혔다. 뭐, 기만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난 마인한테 떡실신 당해서 입원까지 했는데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이도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받아. 슬슬 팔 아프니까.”

아까부터 계속 팔을 내밀고 있었는데, 이 자식이 이걸 받을 생각을 안 하고 있다. 그 얼빵한 모습에 괜히 짜증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 말을 들은 이도영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엘릭서를 받아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읏.”

이도영의 손이 내 손에 닿은 순간, 갑작스레 머릿속에 이상한 감각이 밀려들었다. 그 갑작스러운 감각에 당황해서 엘릭서를 주자마자 손을 훽 떼었다. 내 행동에 놀란 이도영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대충 사과를 건네고 고민에 빠졌다.

“…아, 미안.”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 분명 마나가 회복할 때의 그 청량감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이전의 감각과는 차이가 있었다. 예전에 비해서 조금 더 따뜻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계약 전, 마나를 회복할 때의 감각이 단순히 개운할 뿐이었다면. 지금의 감각은 개운하면서도 포근한 감각이었다.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예전의 그 감각보다 더 강렬한 감각이었다. 강렬하면서도 신경에 거슬리기는 커녕, 오히려 포근하다는 게 더욱 위험했다. 까딱하면 휩쓸려 버릴 것 같았으니까. 아니, 그건 그렇고.

‘어떻게 마나 회복을 하나 했더니.’

이젠 신체접촉으로 방법이 바뀐 거냐? 그러고 보니 김시우가 접촉이라고 하긴 했구나. 아니, 그게 진짜 신체접촉을 말하는 거였어?

당황도 잠시, 이내 방금 전 행동 탓에 다시 장내에 침묵이 맴돌았다. 아, 진짜 더는 못 있겠다. 분위기 더럽게 어색해.

급격히 껄끄러워진 기분에 이도영을 향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이만 난 가본다. 줄 것도 이미 줬으니까.”

“…그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이도영을 피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기숙사로 향하던 길, 이도영에게 한 가지 전하지 않았던 사실이 떠올랐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거 먹으면 좀 아플 거라는 말을 깜빡했네.

***

유시아가 자리를 뜨고 한참 후, 이도영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들려왔다. 멍하니 방금 닿았던 손을 내려다보던 이도영이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거 먹으면 좀 아플 테니까 각오하고 먹어라]

[몸에는 좋은 건데, 그래도 영약이라서 좀 아플 거다]

조금 전 행동과는 전혀 다른 딱딱한 말투에 이도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방금 전의 일을 떠올린 이도영이 의문 섞인 시선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유시아와 손이 닿았을 때,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무언가 포근한 감각. 그 감각에 신경을 기울인 순간, 유시아가 손을 뗀 탓에 정확히 무슨 느낌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확실한 건 매우 따뜻한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시아도 느꼈던 것 같은데.’

아까 그 반응을 보면, 이도영 자신 뿐만이 아니라 유시아 또한 그 감각을 느꼈던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김시우 님이 며칠 전 그렇게 말했었지. 권능을 안정화할 필요가 있다고. 그리고 시아에게 걸린 봉인을 접하면 권능을 안정시킬 수 있을 거라고. 그래, 그것까진 알고 있었지만.

‘이런 부작용이 있을 거라고는 말 안 했잖아….’

설마 앞으로 시아한테 닿을 때마다 이런 감각을 느껴야 하는 건가. 그리고 권능을 안정화하려면 시아한테 접촉해야 하고?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무언가 형언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좋은지 나쁜지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애매한 기분. 그 미묘한 기분에 이도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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