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이후(4)
* * *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등교 준비를 시작했다. 자퇴는 물 건너갔으니, 이제 최선을 다해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었다.
대충대충 다녀도 괜찮지 않냐 싶겠지만, 잘못하면 유급이나 퇴학을 당할지도 모르니까. 각성을 마친 이도영이 유급할 리는 없으니 이제 최선을 다해 따라가야 했다.
‘뭐, 근데 최선을 다할 것까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필기는 헤르메스한테 떠넘기면 되고, 실기는 시스템을 써서 해결하면 되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그리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한다는 게 귀찮을 뿐이지.
생각을 마치고 기숙사를 나섰다. 오늘따라 괜히 일찍 나온 덕인지, 인적 없이 한적한 등굣길이 꽤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도 일찍 나오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후, 어느 새 교실에 도착했다.
시간이 이른 탓인지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도영 한 명만 빼고. 음….역시 평소 등교하던 시간에 등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안녕.”
“그래, 안녕.”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이도영과 눈이 마주치고, 이내 이도영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마주 인사한 뒤 내 자리로 향했다. 어제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어색함이 남아 지금 대화를 이어가기는 좀 그랬다.
이도영도 나와 마찬가지였는지, 나를 바라보던 시선이 이내 책상으로 되돌아갔다. 아무래도 필기 공부를 하는 모양이었다.
‘누가 모범생 아니랄까 봐.’
하기야 각성하기 전에도 노력이란 노력은 죄다 쏟아붓던 놈인데. 각성하고 난 후, 노력의 보상부터가 확연히 달라졌으니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비유하자면 숟가락으로 땅을 파던 사람한테, 삽도 아니고 굴삭기를 준 격이니까.
가만히 생각을 이어가며 이도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을 마주하는 건 조금 그랬지만, 그래도 단순히 보는 것 정도는 그리 부담스럽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이도영을 관찰하던 도중,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얘, 엘릭서 먹긴 한 건가?’
어째 어제 봤던 모습이랑 오늘 모습이 전혀 차이가 없었다. 뭐, 엘릭서를 먹고 난 후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왠지 얘, 아직 안 먹은 것 같은데?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헤르메스에게 확인을 요청하자, 이내 헤르메스가 내게 대답했다.
[네 말대로, 아직 섭취하지 않은 것 같구나.]
‘진짜 안 먹었네.’
왜 안 먹었대? 내가 기껏 갖다 주기까지 했는데. 괜히 성의를 무시당한 기분이라 묘하게 기분이 찝찝해졌다. 그리고 이유를 묻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이었다. 교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시아야. 벌써 왔네?”
김유진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은 이도영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여전히 이도영을 바라보고 있던 나와 이도영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이도영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갑작스레 만들어진 미묘한 분위기에 옆자리로 다가온 김유진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저기, 시아야. 어제, 나 가고나서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으음….”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이는 김유진의 말에 침음성을 흘렸다. 뭔 일이 있었다고 하기엔, 딱히 어제 그리 오래 대화하지도 않았는데. 설명하기 애매한 상황에 난감한 표정을 짓자, 이내 김유진이 갑자기 이해했다는 듯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나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무래도 김유진은 관심법을 쓸 수 있는 모양이었다. 뭐, 그럴 리는 없지만. 헛소리도 잠시, 이도영과 짧게 인사를 나눈 김유진이 다시 내게 다가와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적당히 대화에 어울려주며 곁눈질을 통해 시스템을 확인했다. 그러자 거의 바닥을 드러낸 마나량이 눈에 띄었다.
‘진짜 오늘 마나를 회복하긴 해야겠네.’
그나마 오늘은 오전 강의 대부분이 필기니까, 마나 회복은 점심시간에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봉인의 안정화인가? 그건 마나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이루어질 테니 그리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테고.
‘아, 그러고 보니 엘릭서 안 먹은 이유도 캐물어야 하는데.’
뭐, 그것도 이따 마나 회복하면서 물어보면 되겠지. 어째 해야 할 일은 전부 다 미루는 것 같지만, 사람이 바글바글한 곳에서 마나를 회복하거나 엘릭서 관련 토크를 하는 건 솔직히 조금 무리가 있었으니까 합리적인 연기였다.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한 뒤 생각을 마쳤다.
*
지루한 이론 강의가 끝나고 금세 점심시간이 되었다. 김유진, 이도영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식당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박휘성이 건강은 괜찮냐고 물어왔다. 대충 괜찮다는 대답을 돌려주자 안심했다는 듯 표정을 편 박휘성이 이내 자리를 떴다. 진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그러니까.
‘쟤는 왜 온 거야?’
고작 그거 하나 물어보려고 왔나?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이내 박휘성과 관련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식당에 도착했으니까.
평소처럼 음식을 고른 뒤 자리로 향했다. 평소와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앉는 자리가 다르긴 했지만. 이도영이 아니라 김유진의 옆에 앉았으니까.
“어? 오늘은 내 옆에 앉으려고?”
“응.”
자신의 옆에 앉은 나를 바라보며 김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질문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음식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어차피 이제 마나 회복도 안 되는데, 굳이 옆에 앉을 필요는 없으니까. 뭐, 그걸 떠나서. 아직 얘한테 가까이 가기엔 좀 뻘쭘하기도 하고.
그리고 식사를 시작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이내 이 선택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젠장, 이게 더 어색하네….’
식사하면서 접시에 코를 박지 않는 이상 필연적으로 앞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데, 그럴 때마다 자꾸 이도영이랑 눈이 마주쳤다.
‘솔직히 더럽게 신경 쓰여.’
그렇게 뻘쭘한 기분으로 식사를 이어가기도 잠시, 이내 식사를 마친 이도영이 먼저 자리를 뜨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고,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야! 잠깐만!”
“…응?
생각보다 목소리가 크게 나온 탓에,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그 시선에 잠시 표정을 찌푸렸다가, 이내 용건을 입에 담았다.
“그…잠시 할 얘기가 있는데…. 그러니까 같이 가자고.”
그 말을 들은 이도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게 얼마간 나를 바라보던 이도영은, 이내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작을 보고 김유진에게 양해를 구하려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김유진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시작이네.’
요즘 들어 별로 안 그러더니, 다시 시작된 모양이었다. 미묘하게 굳는 표정을 정돈하고 이내 김유진에게 먼저 가봐야겠다는 말을 건네자, 김유진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쉽게 허락해줄 줄은 몰랐는데? 의외의 대답에 감탄하기도 잠시, 이내 김유진에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이도영의 뒤를 따랐다.
*
식당을 나온 후, 이도영을 이끌고 한적한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인적이 없는 장소에 도착한 뒤 몸을 돌려 이도영을 바라보았다. 나를 따라 발걸음을 멈춘 이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할 얘기라는 게 그거 맞지? 마나 말이야.”
“응, 맞아.”
어째서인지 말을 더듬더듬 내뱉는 이도영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이도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도영이 평소에 그랬듯이 마나를 회복하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여태까지 수십 번은 한 일임에도, 아직까지 어색하다는 듯 이도영이 눈을 피했다.
그 반응을 보며 내게 내민 손을 살포시 잡았다.
이도영의 손에 내 손이 닿자, 이내 어제와 마찬가지로 전신에 따스한 충만감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충만감에 머릿속이 멍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
내게 손을 잡히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이도영이 몸을 퍼뜩 떨었다. 그리고 이도영이 크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혹감이 가득 섞인 시선에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마나 회복 방법이 바뀌어서 그래.”
“…방법이 바뀌었다고?”
왜?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긴 왜야. 저번에 계약해서 그렇지.
그 말을 전하자, 이내 이도영이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이 새끼. 또 그때 그거 생각했나 보네. 젠장, 나도 떠올랐잖아.
“….”
이도영 덕에, 한참 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장내에 맴돌았다. 그리고 얼마 후, 어느 정도 이도영의 반응이 식은 틈을 타서 잽싸게 입을 열었다. 엘릭서 얘기는 물어봐야지.
“…저기, 하나만 물어봐도 돼?”
“어, 어? 응.”
내가 먼저 입을 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살짝 눈을 크게 뜬 이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 맴도는 분위기 탓인지, 머리가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그건 지금 한창 마나를 회복하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아까부터 들뜨기 시작한 머리를 진정시키며 이도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준 약, 왜 안 먹은 거야?”
“아….”
내 말을 들은 이도영이 잠시 신음성을 내뱉었다. 아니, 그래서 왜 안 먹었냐고. 살짝 눈가를 좁히자, 그제야 이도영이 입을 열었다.
“그…먹으면 되게 아플 거라고 했잖아?”
아니, 설마 아픈 거 싫다고 안 먹은 거야? 어이가 없네. 내 표정을 본 이도영이 황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아니, 혹시라도 기숙사 안에서 먹었다가, 무슨 오해를 살지도 모르니까….”
아, 그래서였어?
방금 전 그것에 비하면 생각보다 납득할 만한 이유였다. 고통을 못 이기고 비명을 지르거나 했을 때, 혹시라도 오해를 살까 걱정해서 먹지 않았다고.
뭐, 이해할 만한 사유긴 한데. 근데 그래도 먹긴 먹어야지. 기껏 줬는데.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언제 먹을 건데?”
“음…고아원도 수리 중이니까…. 조금 나중에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기숙사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먹었다가 까딱하면 오해를 살까 봐 걱정된다고. 그 말을 듣자 당혹스러운 감정이 피어났다. 아니, 이러면 곤란한데.
‘최대한 빨리 먹어야 무럭무럭 클 거 아냐.’
얘가 조금이라도 더 성장해야, 내가 편해질 확률이 높아지는데. 그 말을 듣고 한참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얼마 후, 머릿속에 간단한 해답이 떠올랐다. 다시 입을 닫은 이도영을 보며 떠오른 답을 입에 담았다.
***
이도영은 유시아의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약하게 깨물었다. 마나 회복을 이유로 맞잡은 손. 유시아와 손을 잡은 순간부터 이도영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마나 회복 탓일까, 그게 아니라면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잡았기 때문일까. 무슨 이유가 정답인지는 알 수 없지만, 거세게 뛰는 심박이 맞잡은 손을 통해 소녀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 이도영이 불안에 떨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소녀가 그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그녀가 준 영약을 왜 먹지 않았냐는 질문. 그 질문을 받은 이도영의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다.백지가 된 머릿속에서 이도영이 어찌어찌 변명을 짜내 입에 담았다.
다행히도 변명을 들은 소녀는 그 변명에 납득한 모양인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이도영이 이내 얼굴을 붉혔다.
이도영이 소녀가 준 영약을 먹지 않은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사실, 비명소리 같은 건 걱정한 적도 없었다. 이도영이 영약을 먹지 않은 진짜 이유는, 그저 소녀가 처음으로 준 선물이 아까웠을 뿐이었으니까.
그 스스로도 우스운 이유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도영이 영약을 먹지 않은 이유는 그저 소녀가 처음 준 선물을 없애 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멍청이.’
자신이 생각해도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를 알면서도, 이도영은 여전히 영약을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한심함을 느끼며, 이도영은 영약을 먹을 것을 독촉하는 소녀의 말에 열심히 핑계를 주워섬겼다. 자신에게는 마음 놓고 영약을 섭취할 수 있는 환경이 없다는 지리멸렬한 핑계였다.
그리고 한참 후, 그 핑계를 듣고 잠시 고민에 빠졌던 소녀가 입을 열었다.
“약을 먹을 장소가 없다고?”
“…응.”
조금만 깊게 생각해도 허술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닌 핑계였지만, 다행히도 소녀는 납득해준 모양이었다. 그 반응에 안도하기도 잠시, 이내 다시 자신의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이유 때문에 소녀의 성의를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그 생각에 이도영이 다시 자학에 빠지려던 순간이었다.
“그럼 우리 집에서 먹으면 되겠네.”
“…뭐?”
“다른 사람한테 오해를 살까 봐 걱정된다며?”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 될 정도로 엄청난 발언이었다. 그 말을 듣고 당황한 표정을 지은 이도영의 얼굴과는 달리, 눈앞의 소녀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나를 회복하고 있는 탓에 미묘하게 붉게 상기된 소녀의 얼굴은 이도영이 순간 숨을 삼키게 만들었지만.
그런 뜻이 아님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순간 오해를 할 정도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안색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지 못한 듯, 태연하게 이도영을 바라보던 소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집에선 그런 걱정할 필요 없어.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소녀의 입에서 또다시 흘러나온 폭탄 발언. 그 말을 들은 이도영의 머릿속에서 순간 사고 회로의 퓨즈가 끊겼다.
멍한 표정도 잠시, 이내 이도영의 머릿속에서 여러 상상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상상에, 차마 더 소녀를 바라볼 수 없었던 이도영이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