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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화 〉 이후(5) (76/167)

〈 76화 〉 이후(5)

* * *

얼마 후, 다시 눈을 뜬 이도영이 유시아의 시선을 마주했다. 티 없이 맑은 눈빛. 전혀 자신과 같은 사심이 보이지 않는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이도영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항상 그렇듯이, 번뇌에 빠진 것은 이도영 자신뿐인 모양이었다. 그런 의도는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은, 순수한 호의에서 나온 제안이라는 것 정도는 애초에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조금 착잡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느 정도 이도영이 평정을 되찾은 순간이었다. 유시아의 입이 다시 열렸다.

“마침 오늘 금요일이니까. 오늘 같이 가면 되겠네.”

“그…그럼 날이 너무 늦지 않을까?”

사관학교의 수업이 끝나면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그리고 저녁까지 먹고 나면 날이 너무 늦어진다. 그래서 이도영은 고아원에 갈 때마다, 새벽에 도착하는 게 꺼려져 꼬박꼬박 토요일 아침에 출발했으니까. 그 말을 들은 유시아가 왜 그런 걱정을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자고 가면 되잖아.”

“…뭐?”

연이어 귓가에 들려오는 충격적인 말에 이도영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도영에게 유시아가 여전히 평온한 시선을 보냈다.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영약이 흡수될 때까지 얼마나 걸리는지도 모르는데, 그냥 자고 가면 되지.”

“….”

“아, 그러면 이따 방과 후에 약 챙겨오면서 잠옷도 가져오면 되겠네.”

그 뒤로 이어진 유시아의 설명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말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내 조금 우울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아무리 그런 감정이 없다고 해도, 유시아에게 자신이 이성이란 자각이 있다면 이런 제안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그런 자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제안이었다.

‘당연히 쉬울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차라리 점심시간까지 보이던 어색한 태도가 나았다. 적어도 그 태도는 유시아 또한 얼마 전 이루어졌던 스킨십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마나를 회복하는 동안 유시아는, 이미 그때의 어색함을 이미 완전히 털어낸 모양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사건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물론 그게 완전히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거리감 자체는 다시 줄어들었으니까. 하지만 그 거리감이, 이성으로써 대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 친구를 대하는 거리감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게 한참 이도영이 고민에 빠져 있던 순간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감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그럼 오늘 같이 가는 거다. 방과 후에 전부 다 챙겨서 정문으로 나와.”

종소리를 들은 유시아가 이내 대화를 정리하려는 듯 말을 마쳤다. 반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유시아가 흡족하다는 듯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에 시선이 팔리기도 잠시, 이내 그에게 인사를 건넨 유시아가 먼저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한참 후, 자신이 무슨 대답을 했는지 그제야 깨달은 이도영이 헛숨을 삼켰다. 전혀 그런 감정이 섞이지 않은 제안인 것을 이해하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상상이 피어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차마 더 이상 생각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붉게 물든 얼굴을 감싸 쥔 이도영이 이내 걸음을 옮겼다.

*

어느새 오후 수업이 끝나고 방과 후가 되었다. 점심시간에 한 얘기를 독촉하려는 듯, 유시아가 보낸 시선을 받은 이도영이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숙사 안, 엘릭서를 가방에 넣고 옷장으로 향하던 이도영이 순간 발을 멈췄다. 갈아입을 옷, 정확히는 잠옷을 가져오라던 유시아의 말. 그에 따라 무슨 옷을 가져가야 할지 고민하기도 잠시, 그런 것까지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에 이도영이 짧게 자조 섞인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차피 신경도 안 쓸 텐데.”

웬만큼 이상한 옷이 아니고서야, 유시아의 성격상 신경을 쓸 리가 없다. 아니, 애초에 관심도 없겠지. 입이 씁쓸해짐과 동시에 급격하게 풀린 긴장에 다시 한 번 헛웃음을 지은 이도영이 이내 옷을 챙겨 기숙사를 나섰다.

정문에 도착하자, 유시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내 인기척을 느낀 유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이도영의 얼굴을 바라보기도 잠시, 등에 멘 이도영의 가방으로 시선을 옮긴 유시아가 입을 열었다.

“가져왔어?”

“…응, 가져왔어.”

“그래, 가자.”

긴장으로 턱 막히는 입을 억지로 움직여 질문에 대답하자, 이내 유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듯 유시아가 앞서 걸음을 옮겼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그 뒤를 따랐다.

유시아의 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렇다고 걸어서 갈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지만. 버스에서 내리고 다시 걷기 시작한지 얼마 후, 어느 건물 앞에 멈춰 선 유시아가 걸음을 멈췄다.

“들어와.”

“….”

괜히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며 이도영이 유시아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서자, 필요한 가구만 최소한으로 비치된 미니멀리즘한 실내의 인테리어가 시야에 들어왔다.

거기에 더해, 내부의 가구들은 사용감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먼지가 내려앉아 있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 삭막하기 그지없는 내부의 모습에 살짝 눈가를 좁힌 순간이었다.

“나는 보통 기숙사에서 지내니까.”

관리 자체는 가끔 사람을 불러서 하고 있지만, 정작 이 집에서 지내는 일은 없다고. 이도영의 의문에 대답하듯 그렇게 말한 유시아가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이도영이 고개를 갸웃하자, 이내 유시아가 입을 열었다.

“약은 가방에 있어?”

“아, 응.”

고개를 끄덕이고 메고 있던 가방에서 영약을 꺼내 보여주자 유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묘하게 입가에 맺힌 미소에 이도영이 잠시 시선을 빼앗긴 순간이었다. 유시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

“…뭐?”

갑자기 바뀐 화제에 이도영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유시아가 살짝 얼굴을 구겼다.

“내가 갈아입을 옷 가져오라고 했잖아?”

“아….”

“설마 안 가져왔어?”

자신을 바라보는 유시아의 시선이 점점 매서워지는 것을 느낀 이도영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좁혀지기 시작한 눈가가 다시 펴진 것을 본 이도영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어디서 갈아입어?”

“아…그러네. 음…저 방에서 갈아입으면 되겠다.”

세면실도 딸려 있으니까,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있으라는 말을 전한 유시아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다른 방에 들어간 유시아를 멍하니 바라보던 이도영이 이내 아까 유시아가 가리킨 방으로 향했다.

여전히 삭막하기 그지없는 방 안의 풍경에 머리를 긁적이기도 잠시, 이내 옷을 갈아입고 몸을 적당히 씻은 이도영이 침대에 조심스레 앉았다. 차마 침대에 누울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을 기다리자, 이내 방문이 열렸다.

“왜 안 눕고 그러고 있어?”

무심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그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옮긴 이도영이 순간 더욱 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유시아가 지금 입은 옷은 그리 노출도가 높은 복장은 아니었다. 민소매도 아닌 반소매 셔츠에, 바지는 무릎 윗부분까지는 내려온 파자마였으니까.

하지만 생도복, 아니면 환자복을 입은 모습만 봤던 이도영에게, 갑작스레 선연히 드러난 피부는 꽤나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심지어 현재 이도영이 앉아 있는 곳은, 유시아의 침대 위였으니까. 순식간에 떠오르기 시작한 상상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는 이도영에게 유시아가 태평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해? 빨리 누워.”

“으…응.”

유시아의 명령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이도영이 조심스레 침대에 반쯤 기대 누웠다. 푹신한 침대. 고급품이 틀림없는 그 감촉에 방금까지 이어지던 상상조차 잊고 이도영이 감탄을 속으로 내뱉은 순간이었다. 유시아가 손에 든 유리병의 마개를 열었다.

“자, 여기. 마셔.”

“응.”

꽤 아플 테니까 각오하라는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이도영이 유리병을 받아들었다. 유리병 안에서 찰랑거리는 액체를 응시하기도 잠시, 이내 이도영이 유리병을 입에 대고 한 번에 들이켰다. 원샷을 끝낸 이도영의 손에서 유리병을 회수한 유시아가 이도영을 침대에 완전히 눕혔다.

그리고 몇 분 후, 전신에 어마어마한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막대한 고통에 신음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그저 고통에 휩쓸리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손바닥에서 무언가 따스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감각을 해석할 겨를도 없이 밀려든 더한 고통에, 이도영이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의식을 찾은 이도영이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탓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억지로 눈을 계속 뜨지 않고, 일단 몸 상태부터 점검한 이도영이 이내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신체의 마나 감응력과 제어력이 놀라울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그 둘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마나량 또한 늘어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놀라운 증가 폭에 감탄하기도 잠시, 몸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지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에 무언가가 달라붙어 있었다. 그를 깨닫자 이내 다른 감각도 하나둘 눈치챌 수 있었다. 여전히 전신에 옅게 남아 있는 통증, 그리고 그를 압도하는 어쩐지 익숙한 포근함.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아채자마자 이도영이 번쩍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이내 흐릿한 시야가 점차 맑아지고, 눈앞의 광경이 점점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완전히 시야가 돌아온 순간, 눈에 비친 광경에 이도영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피로에 겨운 목소리로 잠꼬대를 내뱉은 유시아가, 자신의 몸에 착 달라붙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같은 침대에. 같은 이불을 덮은 채. 몸을 완전히 밀착한 채로.

그 사실을 깨닫자, 이도영의 정신이 한계를 맞이했다. 멍하니 눈앞의 얼굴을 바라보던 이도영이 다시 눈을 감았다. 차마 지금 상황을 이해할 자신이 없었다.

그 순간, 갑작스레 불편한 듯 옅게 신음성을 내뱉은 유시아가 이도영의 몸에 더 가까이 달라붙었다. 맞닿은신체 부위에서 느껴진 부드럽기 그지없는 감촉에 이도영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팔에 와닿은 말캉한 감촉의 원인을 인지하자마자,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제발 심장의 고동이 전해지질 않길 바라며, 이도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이도영은 한참 후, 유시아가 잠에서 깰 때까지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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