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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화 〉 진전(1) (77/167)

〈 77화 〉 진전(1)

* * *

피로로 가득한 탓에 몽롱한 정신. 비몽사몽 한 머릿속에 따스한 감각이 파고들었다. 포근하면서도 상쾌한 감각. 삐걱거리는 사고 회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무언가에서 기인한 감각임을 직감했다.

“으음….”

그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더한 포근함을 원하는 듯, 제멋대로 움직인 몸이 품 안의 무언가를 끌어안았다. 그에 보답하듯 안락하기 그지없는 감각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다시 잠에 빠져들려던 순간이었다.

‘…근데 내가 뭘 끌어안고 있는 거지.’

그 의문이 떠오른 순간, 이내 조금씩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는 잘 때 아무것도 안 끌어안고 잔단 말이야. 조심스레 눈을 뜨자 흐릿한 시야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초점이 되돌아온 시야를 통해, 내가 끌어안고 있는 것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이도영이랑 같은 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것도 이도영의 팔을 품에 폭 끌어안은 채로. 같은 베개를 쓰고 있는 탓에, 이도영의 옆모습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어….’

내가 왜 이러고 있었더라. 당황조차 끼어들지 못할 정도로 멍한 머릿속에 작은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그 순간, 흐릿한 정신에 어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

이도영에게 엘릭서를 먹인 후, 자리를 비우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이도영의 몸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얼마 전, 봉인이 풀렸을 때처럼.

“…뭐야?”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이리저리 경련하는 모습이, 그리 괜찮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뭐. 아플 거라고는 했지만.

‘저 정도면 쇼크사할 것 같은데.’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면, 정령 계약을 통해 안정을 되찾았던 권능이 다시 폭주하려는 기색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계약을 맺은 후부터는 접촉하지 않으면 마나가 회복되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마나가 사방팔방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오랜만에 느끼는, 봉인의 연결에서 느껴지는 포근함이 제외된 순수한 마나 회복의 청량감에 탄성을 흘리기도 잠시, 이내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그에 화답하듯 머릿속에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예상이 빗나간 것 같구나.]

“…뭐?”

그 천연덕스러운 목소리에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제 말만 믿고 엘릭서를 쟤 입에 반쯤 강요로 쑤셔 넣었는데, 이딴 식으로 나오시겠다고?

밀려온 빡침에 반쯤 으르렁거리듯 입을 열자, 이내 헤르메스가 조금 난처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본래 엘릭서는 육체를 신의 것으로 승화시키는 힘을 지녔지. 즉, 물이 담겨있는 그릇을 서서히 넓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어느 정도 권능이 불안정해지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저 아이의 권능이 참으로 기이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게 문제였구나.]

기이한 상태?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이어지는 헤르메스의 설명을 듣자 어째서 지금 이런 상황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몸에 절대 담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권능이, 봉인이 풀렸음에도 불구하고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 하지만 그건 언제라도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에 불과하니, 조금의 자극만 있어도 무너져내리는 거다.]

즉, 이도영의 권능은 사상누각이나 다름없는 상태. 어찌어찌 안정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엘릭서가 들어가서 육체를 뜯어고치기 시작하자, 영향을 받은 권능이 지금 붕괴하기 시작한 거라고.

굳이 예를 들자면, 넘치기 직전까지 물을 가득 따른 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의 수위가 컵보다 높아져도 표면장력에 의해 물이 넘치지 않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권능을 담은 이도영의 몸은 정령 계약을 통해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고.

‘그리고 지금 들어간 엘릭서는, 그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물컵의 용량을 늘리는 과정에서 안을 마구 휘저어버렸다는 뜻이고.’

아니, 차라리 물컵보다는 젠가가 나은 설명일지도 모르겠다.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잃고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젠가를 튼튼하게 다시 쌓으려던 과정에서, 실수로 균형을 유지하던 젠가를 빼버렸다고 하면 이해가 쉽겠지.

아무튼, 그 행동의 결과로, 지금 이도영의 권능이 다시 날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사실에 암담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한 가지 방법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애초에 이도영의 권능이 안정을 유지하고 있던 이유가 정령 계약이라면, 정령술을 이용하면 다시 권능을 안정적으로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 방법의 검증을 위해, 헤르메스에게 질문을 던지자 금세 대답이 돌아왔다. 답변은 긍정적이었다. 거기에 더해, 헤르메스가 한 가지 방법을 더 알려주었다.

[그에 더해, 만약 신체를 접촉한다면 그대의 몸이 품은 봉인의 영향을 받아 더욱 쉽게 안정을 되찾겠지.]

‘아니, 지도 방법 알았으면서 왜 망한 것처럼 말하고 그러냐.’

괜히 쫄았잖아. 그나저나 신체 접촉은 아까 그랬던 것처럼 손이라도 잡으라는 건가? 속으로 작게 투덜거린 순간이었다. 머릿속에 헤르메스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은 좋지만, 내 부탁도 하나 들어주지 않겠느냐?]

부탁? 무슨 부탁?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저번처럼 힘을 흡수할 거라면, 나와 연결된 통로는 잠시 닫아다오.]

“어….”

저번처럼 힘을 흡수해? 난데없는 말에 멍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이내 처음 정령 계약을 맺었을 때의 상황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지금 또 그때처럼 마력을 흡수할 거면, 패스를 닫아 달라 이거지? 그 말을 이해하자마자 밀려온 수치심에 표정을 찌푸렸다. 와, 대놓고 맥이네. 짜증 섞인 표정으로 패스를 닫아버린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

이도영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는 어마어마한 마나에 표정을 굳혔다. 아무래도 더 지체할 시간은 없는 것 같았다.

[정령술(SS)가 적용됩니다.]

다급히 다가가 이도영의 손을 잡자 폭주가 약간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바로 몸 안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세 배나 늘었음에도 순식간에 갈려버리는 마나 덕분에, 급격히 이도영의 몸이 안정을 되찾았다. 그 사실에 안심하기도 잠시, 이내 마나가 전부 소모되자마자 다시 권능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니, 미치겠네.”

뭐 어쩌라는 거야. 한숨도 잠시, 이도영을 바라보던 도중, 시선이 이도영의 얼굴로 향했다. 그리고 시선이 이도영의 입술에 닿한 순간, 갑작스레 떠오른 생각에 급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아니지. 그건 진짜 아니야.’

지금도 긴급 상황이긴 한데. 그 정도로 급한 건 아니잖아. 차라리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한계까지 머리를 굴리던 순간이었다. 방금 전 헤르메스가 뱉은 말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분명 신체 접촉을 통하면 안정화가 더 쉽다고 했지?’

그렇다면 접촉 면적이 늘어나면 상태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 마나 회복량도 늘어날 테고. 그 생각을 검증하기 위해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이도영의 팔에 내 팔을 맞대보았다.

‘…맞네.’

근데 이걸 기뻐해야 하나. 미묘한 표정도 잠시,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포옹이 낫지, 다시 입을 맞추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심지어 그때처럼 잠시간도 아니고, 권능이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해야 하는데.

‘그 정도면 솔직히 권능 폭주가 아니라 호흡곤란으로 죽겠다.’

뭐, 그리고 포옹 정도면 딱히 문제없잖아. 그…축구 같은 거 보면, 세레머니로 자주 포옹하고 그러니까. 머릿속으로 합리화를 마친 뒤, 이불을 걷고 침대 위에 올라갔다.

“읏….”

이불 안에 들어가 몸을 맞대자마자 머릿속으로 밀려온 감각에 순간 숨을 삼켰다. 접촉면에서 밀려오는 마나와, 호흡기를 통해 흡수되는 마나의 감각이 섞여, 강렬한 쾌감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 압도적인 감각에 정신을 놓기도 잠시, 이내 급격히 회복되는 마나를 사용해 폭주하는 권능을 안정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창문 사이로 슬슬 동이 트는 것이 보일 무렵이었다. 한계까지 집중한 끝에, 겨우겨우 권능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를 확인한 순간 밀려온 피곤함에 순식간에 정신이 퍼지기 시작했다.

몸은 그리 피로하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더럽게 피곤했다. 급격히 밀려오는 피로감에 졸음이 쏟아졌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기 시작한 햇빛이 가물가물한 시야에 비쳤다. 아, 그러고 보니 밤 샜구나.

‘나가서 자야 되는데….’

소파로 가야 한다는 생각도 잠시, 이내 쏟아지는 수마가 의식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이도영과 맞닿은 부위에서 밀려온 포근함에 전신의 긴장이 턱 풀렸다. 묵직하게 내려오는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눈을 감았다.

*

‘그래, 그렇게 된 거였지.’

어제 있었던 일을 흐릿한 정신으로 되새겼다. 아직 피로가 가시지 않은 듯,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아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멍한 정신을 계속해서 공격하듯, 맞닿은 신체에서 포근한 감각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 포근함에 잡아먹혀 다시 잠들기 직전, 간신히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일단…나가서 소파에서 더 자야겠다.’

안정화도 끝났으니까, 굳이 같은 침대를 쓸 필요는 없었다. 물론 같이 자는 게 더 기분이 좋을 것 같긴 한데. 하지만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고 회로로도, 그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은 할 수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올리자, 흐릿한 시야에 아직 잠에 빠진 이도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직도 품에 끌어안고있던 이도영의 팔을 놓고 몸을 살짝 뒤로 뺐다. 약해진 포근함에 아쉬운 기분이 들기도 잠시, 이내 멍하니 이도영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이대로 침대에서 나가면 같은 침대에서 잤단 사실은 들키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조금만 더 같이 자고 싶긴 하지만, 혹시라도 깼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변명하는 건 상상하기도 싫으니까. 밀려온 유혹을 간신히 떨쳐내고 몸을 일으켜던 도중이었다.

“…아!”

일어나던 과정에서 매트릭스에 짚었던 손목을 삐끗한 탓에, 한순간 균형을 잃은 몸이 그대로 이도영의 몸 위에 겹쳐졌다. 급격히 중력에 따라 기울어진 상반신이 이도영의 몸을 짓눌렀다.

그 과정에서 이도영의 가슴팍에 살짝 코를 부딪친 탓에, 이도영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실수로 숨을 들이킨 순간이었다.

“으읏….”

어제 권능이 폭주한 탓인지, 아직 옷에 남아있던 마나가 호흡기를 통해 몸에 흡수되는 감각. 신체 접촉을 통해 마나가 회복될 때와는 달리, 따스한 포만감이 사라진 순수한 쾌감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익숙한 감각에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도영의 품에 파고들어 숨을 들이켠 순간이었다.

“시…시아야…?”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들이켜던 숨이 툭 하고 멎었다. 삐걱거리는 목을 억지로 움직여 고개를 들었다. 이도영이 당황이 넘쳐흐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상황을 인지한 순간, 순식간에 밀려든 수치심에 머릿속의 사고 회로가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잠깐만. 아니, 그거 아니야. 그거 아니라고. 아니, 맞긴 한데. 아무튼 아니야.

아, 돌겠네 진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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