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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화 〉 진전(2) (78/167)

〈 78화 〉 진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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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한 얼굴로 이도영과 눈을 마주쳤다. 하얗게 변한 머릿속에서 변명거리가 수십 개 떠올랐다가 그대로 파묻혔다. 이도영이 보내는 당황 가득한 시선에 속으로 이를 갈았다.

‘아니, 왜. 왜 매번 이딴 식이지?’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매번 왜 이러는 건데.

밀려오는 스트레스에 슬슬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수치심으로 붉어지려는 얼굴을 최대한 억제하며 무덤덤한 척 입을 열었다.

“…일어났네.”

애초에 시작은 치료행위가 맞았으니까. 난 쪽팔려 할 필요 없다. 없다고. 필사적으로 자기합리화를 돌리며 빠르게 변명을 시작했다.

“그…되게 위험한 상황이었어. 까딱하면 죽을 뻔했으니까.”

“저…. 저기.”

“영약을 먹고 나서, 네 몸에 있던 힘이 마구 날뛰기 시작하더라고. 그래서….”

“시…시아야! 잠깐만!”

“…어?”

아, 깜짝이야. 빠르게 변명을 읊던 도중, 이도영이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당황한 시선으로 이도영을 응시하자 이내 이도영이 붉게 물든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알겠으니까…. 일단 내려와서 말해 줄래?”

“아.”

그 말을 듣자, 이제야 내가 무슨 자세를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변명에 정신이 팔려서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나는 지금 이도영 위에 엎어진 상태로 상체만 일으킨 상태였다. 즉, 이도영의 아랫배를 깔고 앉은 채로 말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 미안.”

“괜찮으니까….”

빨리 내려와 달라는 시선. 할 말을 잃고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몸이 떨어지기 무섭게 끊긴 충만감에 살짝 든 아쉬움을 털어내고, 이내 침대 근처에 놓아뒀던 의자에 엉덩이를 뉘었다.

“….”

설명하던 도중 일어난 해프닝으로 이야기가 끊겨버린 탓에, 어색한 침묵이 장내에 맴돌았다. 또 붉어지려는 얼굴을 최대한 정돈한 뒤, 다시 설명을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저….”

아, 겹쳤다.

말문을 트려던 순간, 기막히게 입을 연 타이밍이 겹쳐버린 탓에 나와 이도영이 그대로 입을 닫았다. 또다시 어색한 분위기가 깔리고, 잠시 후 이도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먼저 말해.”

“…그래.”

이걸 배려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멍한 표정도 잠시, 이내 아까 하려던 설명을 되풀이했다. 엘릭서를 먹자마자 권능이 폭주했다는 것. 권능을 제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것. 설명을 마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마디를 더했다.

“그…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다른 의도는 없었으니까….”

그 말을 내뱉던 도중, 조금 찝찝해진 기분에 말꼬리가 길게 끌렸다. 잠들기 전까지는 치료 외에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조금 전에는 순간 사심이 든 것도 사실이니까.

‘그게 그런 쪽 감정은 절대 아니긴 하지만.’

생각하기도 불쾌한 그런 감정은 절대로 아니지만, 살짝 눈 딱 감고 조금만 더 잘까 하는 유혹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니까. 생각도 잠시, 이내 미묘한 기분을 떨쳐내고 말을 끝맺었다. 이도영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응?”

이건 무슨 의미지?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반응에 멍하니 이도영을 바라보았다.

“그런 의도가 없다는 거 말이야. 알고 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어…그, 그래.”

담담하게 말을 이은 이도영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반응은 진짜 뭐지. 전혀 예상 못 한 반응인데. 아니, 뭐. 알고 있다면 다행이긴 한데. 어째 찜찜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하자, 이내 이도영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하나만 물어봐도 돼?”

“어, 물어봐.”

“영약을 먹고 나서 내가 죽을 뻔했다고 했지? 그래서 방금…그 시아 네가 옆에 누워있었던 거고?”

“…그래.”

방금 있었던 일을 말하는 순간, 그걸 떠올린 듯 이도영의 얼굴이 미묘하게 붉어졌다. 그에 따라 같은 색으로 변하려는 얼굴을 숨기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이도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처음 내가 영약을 받았을 때, 그대로 먹었으면 큰일 날 뻔했던 거네?”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오늘은 내가 옆에서 권능을 제어한 덕에 살았지만, 만약 처음 손에 쥐여 줬을 때 바로 먹었으면 그대로 끝장이었을 테니까.

‘…잠깐만, 이런 미친.’

하마터면 진짜 훅 갈 뻔한 거네?

까딱하면 세계 멸망 루트로 직행할 뻔했다는 걸 깨닫자, 긴장으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와, 진짜. 진짜 망할 뻔했다.

‘진짜 큰일 날 뻔했네.’

오늘 먹여서 다행이다. 아니, 같이 있어서 다행이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순간이었다. 이도영이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깨달은 사실에 무의식적으로 침음성을 내뱉었다.

“아…. 그….”

고의는 아니었다고 해도, 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얘를 죽일 뻔한 거였다. 그 사실을 이해하자 이내 미안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었다고는 해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미안.”

사과를 건넨 뒤,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할 말이 없었으니까. 의도는 그게 아니었다고 해도, 까딱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그 순간, 이도영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

“…?”

어째 망설임 하나 없는 말에 놀란 시선으로 이도영을 바라보자, 이도영이 내게 피식 웃음을 보였다. 아니, 까딱하면 죽을 뻔했다니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도영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고의로 그런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이미 몇 번이나 도움을 받은 덕에 살 수 있었는데, 이런 걸로 굳이 따지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말한 이도영을 보며 당황 섞인 말을 중얼거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 착한 거 아닌가. 호인도 정도가 있지. 하마터면 진짜로 죽을 뻔했는데, 나한테 화 한 번 안 낸다고? 복잡한 기분에 조심스레 이도영에게 질문을 건넸다.

“진짜 괜찮아?”

“응, 괜찮아.”

이 정도로 흔쾌하게 대답하면 오히려 더 미안해지는데. 눈을 마주치자 또 올라온 미묘한 감정에 가만히 눈을 피했다. 찝찝한 기분에 입을 꾹 다물자 이내 장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얼마 후, 갑자기 이도영이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 그러면 나중에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부탁?”

무슨 부탁? 갑작스레 나온 제안에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뭘 시킬지는 모르겠지만. 뭐, 이상한 거라도 시키겠어? 끽해봐야 뭐 해달라는 수준이겠지.

“…뭐, 그걸로 괜찮다면야.”

“응, 고마워.”

아니, 고마울 것까지야. 오히려 내가 고맙지. 결국 내 잘못이었는데. 뭐, 잘해주려고 그런 거긴 하지만, 진짜 큰일 날 뻔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이도영을 바라보자, 눈이 맞은 이도영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 이유 모를 반응에 의문 섞인 시선을 보낸 순간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엘릭서 효과는 제대로 들어간 건가?’

일단 멀쩡한 걸 보면 흡수는 제대로 한 것 같은데, 어째 아직까지 못 물어보고 있었다. 아직 남은 죄책감에 우물쭈물 눈치를 살피던 순간이었다. 할 말 있냐는 듯한 이도영의 시선에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몸은 괜찮아?”

“몸?”

무슨 소리냐는 듯 이도영이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영약을 먹은 효과는 있었냐고.”

“아.”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탄성을 내뱉은 이도영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되게 효과가 좋더라고. 마나량도 마나량인데, 감응력이랑 제어력이 엄청 늘었어. 그리고 잠을 설친 것 지곤 컨디션도 되게 좋은 것 같고.”

“…잠을 설쳐?”

“아.”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이도영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잠을 설쳤다고?’

하긴 그럴 만하긴 했다. 권능을 조정하는 동안 계속 고통이 느껴졌을 테니, 잠을 제대로 잤을 리가 없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적어도 나는 고통은 없었으니, 나보다는 얘가 더 피곤했을 테고.

게다가 그나마 잠이 들었을 때, 내가 머리로 들이받은 탓에 잠에서 깼으니까. 피곤할 만도 하지. 그 생각을 한 순간, 다시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미안해.”

“으, 응?”

어라, 이게 아닌가? 갑자기 웬 사과냐는 이도영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까 깨운 탓에 중간에 일어난 거 아냐?”

“아, 그…렇지?”

내 질문을 들은 이도영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이 반응? 살짝 의구심을 갖기도 잠시, 이내 고개를 흔들어 의심을 털어버렸다. 뭐, 굳이 나 때문이라는 눈치는 주기 싫었나 보지.

생각을 마치고 빤히 이도영을 바라보자, 이내 이도영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보내자 이도영이 입을 열었다.

“…이제 더 할 일은 없지?”

“아, 응.”

“그럼…이만 가봐야 할 것 같네.”

난데없는 말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할 일은 전부 끝나기도 했고, 이제 나도 좀 지치니까. 분위기도 어째 계속 어색한 게, 같이 있으면 쉬어도 쉬는 게 아닐 것 같기도 하고.

먼저 방에서 나오자, 이내 옷을 갈아입은 이도영이 따라 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는 모습을 가만히 구경하기도 잠시, 이내 이도영이 내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월요일에 보자.”

“…그래. 잘 가라.”

어째 다시 깔린 미묘한 분위기에 어색해하기도 잠시, 이내 인사를 들은 이도영이 현관을 나섰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고요해진 집 안 분위기에 살짝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뭐, 월요일에 다시 볼 테니까, 별 상관은 없지만.

그렇게 감상에 빠지기도 잠시, 슬슬 긴장이 풀리자 다시 밀려오는 피로에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침대에 다시 누운 순간, 마나가 회복될 때의 그 시원한 청량감이 느껴졌다.

‘…어제 나온 마나가 아직 남아있었나 보네.’

이도영이 입었던 옷에 마나가 남았던 것처럼, 어제 이도영이 사용한 덕에 이불이랑 침대에도 마나가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생각도 잠시, 이내 밀려오는 청량감에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올렸다. 시야가 깜깜해지고, 이불에 남아있던 마나가 몸에 흡수되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잠을 청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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