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진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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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 링 위에 올라선 이도영은 묵묵히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상대는 중상위권에서 최근 상위권까지 올라간 마법사. 누구에게 묻는다 해도 백이면 백, 이도영의 승리를 점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최근 이도영의 성장세가 어마어마하게 늘었다고 해도, 둘 사이에는 그 몇 주 만에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는 막대한 실력의 차가 존재했으니까.
비록 최상위권, 김유진이나 이설화 같은 이들에게는 감히 댈 수 없는 실력이라고 할지라도, 그와 이도영 사이에는 더한 실력의 격차가 존재했다. 그리고 짧은 시간 만에 그 격차를 좁힐 만큼 마법이라는 길은 쉬운 길이 아니었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시작하기 전에 기권하지 그래?”
비웃음 가득한 표정을 지은 채, 강혜성이 이도영을 향해 조롱하듯 입을 열었다. 자신이 이도영에게 질 리가 없다는 듯 태연자약한 목소리였다.
“뭐, 오늘은 조금 열 받았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주제는 알아야 할 거 아냐?”
멸시가 가득 담긴 말과 함께 강혜성이 이도영에게 조소를 보냈다. 시비를 걸어온 쪽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도영은 그 말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강혜성이 그에게 시비를 걸어온 것부터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유시아를 언급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지만.
던전 공략 체험을 위한 조를 결성할 때, 유시아에게 대놓고 면박을 당한 이후, 강혜성은 종종 이도영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물론 원색적인 비아냥이나 욕설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일단은 그도 영웅사관학교의 생도였으니까. 자칫하면 커리어에 오점이 남을 일은 꺼려졌을 터.
그리고 그러던 이가 하필 오늘 그에게 수위를 넘은 시비를 걸어온 이유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오늘 아침, 자신과 유시아가 금요일에 같이 외출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니까. 아마 교문에서 같이 나가는 걸 누군가 목격한 모양이었다. 꽤 사람이 많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강혜성이 자신에게 시비를 건 이유는, 질투겠지.
“그 여자랑 어울리다 보니 자기 수준을 까먹기라도 한 모양인데. 아니면 요즘 좀 컸다고 자신감이라도 붙은 건가?”
우습게도 면전에서 폭언을 들었음에도, 강혜성은 아직 유시아에 대한 감정이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금요일에 둘이 같이 외출했다는 소문 하나만으로 선을 넘은 시비를 걸어올 정도로. 자신을 향한 시선에서 일렁거리는 원색적인 감정에 이도영은 순간 웃음을 터뜨렸다.
“…웃어?”
“아, 미안.”
분개한 상대에게 진심 없는 사과를 건넨 이도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쪽의 오해와는 달리, 유시아는 여전히 이도영에게 전혀 그런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를 알 리 없는 상대는 숫제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이도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만, 이제 그만 준비하도록. 곧 대련을 시작하겠다.”
“예.”
“…예.”
그렇게 시선을 교환하던 도중이었다. 신유정이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에 대답한지 얼마 후, 가만히 둘을 노려보던 신유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대련을 시작하기 전 미리 말해두도록 하지. 대련 수업, 아울러 사관학교의 강의는 단순히 너희들의 사적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넘어가겠지만, 다음에도 이런 목적으로 강의 시간에 싸움을 벌인다면 징계를 각오해 두도록.”
“알겠습니다.”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질책이 담긴 시선에 이도영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는 여전히 이도영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이건가. 그러기도 잠시, 이내 대련이 시작되었다.
“하, 진심으로 해보려는 거야? 어이가 없네.”
자세를 잡은 이도영을 바라보며 혀를 찬 강혜성이 가볍게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텅 비어 있던 허공에 이내 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모여든 바람이 형체를 이루어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촌각. 각성 이전의 이도영이라면 대응하기 힘들 정도의 시전 속도였다.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퍼퍼펑!
“…어?”
이도영이 손을 한 번 가볍게 휘저은 순간, 허공에서 무수한 매직 미사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즉발로 쏘아진 매직 미사일이 형태를 이룬 바람을 직격했다. 순식간에 흩어지는 마법을 본 강혜성이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강혜성의 표정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방금 시전했던 마법은 에피타이저에 불과했다는 듯, 허공에 강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충분히 상위권에 걸맞은 실력. 쪼개진 바람이 각각 무기의 형태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내 허공에 맴돌던 바람이 이도영의 몸을 향해 쇄도했다.
우우웅
그에 대한 이도영의 대응은 간단했다. 각성 이전, 부족한 제어력으로는 대부분의 마법을 시전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택한 것이 선택과 집중. 부족한 마나를 쥐어짜 수련에 힘쓴 결과, 부족한 제어력으로도 기초 마법만은 보통 마법사들보다 빠른 속도로 시전할 수 있었다.
물론 어마어마한 차이는 아니었지만, 한없이 말을 듣지 않는 마나에도 불구하고 해낸 쾌거였다.그리고 봉인이 풀린, 엘릭서를 섭취한 덕에 더 이상 제어력에 허덕이지 않는 이도영은, 그 속도를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
심장에 깃든 서클을 강하게 회전시킨 이도영이 날아오는 마법을 차분히 응시했다. 이전에는 마치 야생마처럼 날뛰던 마나가 이제는 손발처럼 자유롭게 움직였다. 시전한 마법은, 기초 마법, 실드.
이도영의 손짓에 맞춰 형성된 수십 겹의 방어막이 이도영의 전신을 뒤덮었다.
파파파파팡!
한 발에 한 겹. 마치 짜고 치기라도 한듯, 정확히 날아오는 마법의 갯수에 맞춘 실드가 일제히 마법을 막아냈다. 그리고 얼마 후, 방어를 마친 이도영이 살짝 표정을 찡그렸다.
‘마나가 모자라.’
예상보다 방어하는 데 소모한 마나가 많았다. 아직 서클에 마나가 꽤 남아있다고 하나, 장기전으로 가면 승산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공격일변도. 생각을 마치고 즉시 허공에 매직 미사일을 형성해 쏘아냈다.
“크…으윽!”
거의 즉발에 가까운 시전 속도. 대응할 틈도 주지 않고 날아오는 매직 미사일을 간신히 막아낸 강혜성이 이를 갈았다. 고위 마법은커녕, 어린애들이 처음 마법을 배울 때나 사용하는, 하찮기 그지없는 기초 마법에 궁지에 몰렸다. 그 상황이 주는 굴욕감에 얼굴을 찌푸린 강혜성이 다시 바람을 끌어모았다.
“싸구려 마법밖에 못 쓰는 반푼이 새끼가!”
순식간에 휘몰아치는 바람이 날아오는 매직 미사일을 모조리 터뜨렸다. 그 사실에 강혜성의 얼굴에 순간 통쾌함이 가득찼다. 그러기도 잠시, 이윽고 다른 매직 미사일이 뒤를 이어 쏘아졌다.
퍼어어엉!
기관총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로 끊임없이 쏘아지는 매직 미사일의 향연. 방어를 위해 급하게 마법을 시전한 탓에 강혜성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이…개 같은!”
누가 봐도 강혜성이 수세에 몰렸음을 부정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이도영 또한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서클에 모여 있던 마력이 슬슬 동나기 시작했으니까. 슬슬 바닥나기 시작한 마력에 이도영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각성 이후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고는 하지만, 마력의 증가에는 한계가 있었다. 보유한 마력의 양은 짧은 시간 내에 늘리기 힘드니까. 그나마 엘릭서를 먹지 않았다면, 실드를 시전했을 때 이미 대련이 끝나고도 남았으리라.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은데.’
한계에 가까워진 마나량과 상대의 모습을 총합해본 이도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밀어붙인다면 분명 이길 수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서클의 마나가 전부 떨어진다. 본능적으로 그를 직감한 이도영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아니라 시아였다면 이렇게 오래 걸리지도 않았겠지.’
유시아, 김유진, 이설화, 그리고 박휘성 같은 학년 최상위권의 강자들이라면, 저 정도의 상대는 순식간에 끝낼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한 이도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지금 이 정도로도 대련한 의의는 충분히 달성했다고 볼 수 있었다. 상대에게 엿을 먹인다는 목적은 이미 달성했고, 자신이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도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성장 속도를 감안하면, 친구들이 위치한 수준까지 금방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진다고 무슨 불이익이 있는 것도 아니니, 굳이 이길 필요까지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지고 싶지 않아.’
더 이상 친구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도움만 받고 싶지는 않았다. 도움을 받기보다는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특히 더욱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 생긴 지금은 더더욱. 여기서 패배한다면,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은 더욱 요원할 것만 같았다.
피시시
그러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강혜성이 바람을 더 유지하지 못하고 자세를 무너뜨린 순간, 동시에 서클의 마나가 바닥을 드러냈다. 소강상태로 접어든 링 위에서 이도영이 상대를 노려보았다.
‘젠장….’
단 한 발. 일격이면 상대를 끝낼 수 있는 상황. 필사적으로 서클을 회전시키려 했지만, 과열된 서클은 더 이상 마나를 끌어당기지 못했다. 서서히 자세를 회복하는 상대를 바라보는 이도영의 주먹에 힘이 실렸다. 그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신체에 깃들어 있던 봉인이 깨졌을 때의 기억. 마인과 두 번째로 조우했을 때의 기억이 흐릿하게 이도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분명 그때, 이도영의 서클은 빈약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때 분명, 흐릿한 기억 속의 자신은 지금보다 더한 양의 마법을 가뿐히 난사했었다. 그 이유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 특성.’
봉인이 풀린 이후, 이도영은 자신의 몸속에 어떠한 힘이 깃들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아와 접촉할 때마다 신체 깊숙한 곳에서 공명하던 힘. 그게 아마 자신의 특성이겠지. 그리고 이도영은 또한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전부 다루는 건 위험해.’
각성 직후, 흐릿한 기억 속에 유일하게 선명히 남은 끔찍한 고통이 떠올랐다. 위기 상황도 아니고, 고작 대련에서 이기기 위해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그 생각도 잠시, 이내 자신의 힘에 접근한 이도영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수틀리면 바로 폭주할 것처럼 불안정하던 이전과는 달리, 마치 고정대처럼 단단히 자리 잡힌 신체가 힘을 안정시키고 있었다. 그릇의 크기가 커져, 어느 정도의 흔들림으로는 넘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즉, 어느 정도 힘을 뽑아낸다고 해도 위험해질 일은 없다.
우우웅!
그를 직감한 이도영이 바로 제어력을 신체 내부로 향했다. 몸속 깊숙한 곳으로 파고든 제어력이 잠들어 있는 힘 일부를 조심스레 일깨웠다. 그리고 아주 적은 양. 극소량의 힘을 몸 밖으로 꺼낸 순간, 텅 비어있던 서클에 마나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새끼…!”
이를 부득부득 갈며 자세를 되찾은 상대를 바라보며, 끄집어낸 힘 덕에 어느 정도 잔량을 회복한 서클에서 마나를 뽑아내 그대로 내질렀다. 꺼낸 힘이 극히 적은 탓에 차오른 마나의 양은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휘이잉!
마법이 아닌 순수한 물리력의 총체. 형체을 이룬 마력 덩어리가 강혜성을 향해 쇄도했다. 그를 본 강혜성이 다급히 마법을 시전해 대응했다. 바람과 마력 덩어리가 충돌하고, 순식간에 바람을 뭉개버린 마력 덩어리가 강혜성의 몸을 후려쳤다.
“아아아아악!”
“그만! 대련은 끝이다!”
강렬한 피격음과 함께 마치 홈런볼처럼 휭 날아간 강혜성이 정신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본 신유정이 대련 종료를 선언했다. 링을 감쌌던 결계가 사라지고, 이내 몸에 입었던 상처가 사라지는 것을 본 이도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겼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이후, 처음으로 거둔 승리. 제대로 실감이 나지 않아 멍한 표정을 지은 이도영이 고개를 돌려 유시아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길 줄은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유시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반응을 보자, 이제야 승리했다는 자각이 들기 시작했다. 한 걸음이지만, 유시아에게 가까워졌다. 근거는 없지만 어째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밀려오기 시작한 승리감에 이도영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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