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1화 〉 진전(5) (81/167)

〈 81화 〉 진전(5)

* * *

“시아야, 도영이가 이겼어!”

“어, 그러게. 쟤가 이겼네.”

의외의 결과에 놀란 듯 방방 뛰는 김유진의 반응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예상을 벗어난 결과에 당황스러운 기분이 앞섰다. 아니, 저렇게 빨리 성장할 수가 있나?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아….”

무심코 이도영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마자,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이도영과 눈이 마주쳤다. 첫 승리가 기쁜 듯 이도영은 입가에 환한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어느 정도 진정된 머리로 생각의 방향을 돌렸다.

‘뭐, 이긴 게 나쁜 건 아니긴 한데.’

오히려 예상보다 빨리 강해졌으니 다행이라고 봐야겠지. 성장은 빠를수록 좋으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이도영에게 수고했다는 눈짓을 보내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옆자리에서 김유진이 이도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얘는 대체 뭐하는 거래.’

고작 대련에서 이겼다고 보이는 반응이라기에는 조금 과한 반응. 그 반응을 본 이도영이 쑥스럽다는 듯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 눈꼴시린 모습에 작게 눈가를 좁혔다.

“응?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냐.”

하기야 원작에 비해 쟤도 친화력이 더 높아졌을 테니, 김유진이나 이설화랑 더 빠르게 가까워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면 이도영의 성장 속도가 늘어난 덕분일지도 모르고. 어느 쪽이든 희소식이었다.

‘그래도 대놓고 내 앞에서 꽁냥대는 건 좀 보기 그런데.’

커플 사이에 혼자 애매하게 끼어 있으면 되게 어색하거든.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내 덕분에 저렇게 강해진 건데, 자기들끼리 놀기 전에, 적어도 이도영은 먼저 내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갑자기 피어난 불만에 눈살을 찌푸린 순간이었다. 대련이 종료된 후, 링에서 내려온 이도영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쓸데없는 불만을 지운 뒤,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쟤, 어떻게 저리 강해진 거지?’

완벽한 각성, 엘릭서 섭취. 늘어난 플러스 요인을 감안하면 원작보다 빠른 성장 자체는 이해할 수 있다. 아니, 이러고도 원작이랑 비슷한 속도로 성장했다면 그게 더 문제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빠른 성장 속도는 이상한 수준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마나량은 어떻게 늘린 거야?’

아무리 기초 마법이라고 해도, 얼마 전까지 그조차 얼마 못 쓰는 수준이었을 텐데. 방금 난사한 마법의 수는 명백히 규격 외의 숫자였다.

물론 다른 이들에 비교하면 아직 평균에도 못 미치는 수준은 맞았다. 실제로 지금 1학년의 하위권 마법사 수준으로도 방금 마법의 숫자 정도는 뽑아내고도 남을 테니까. 방금 이도영이 상대했던 놈도 마나가 부족해서 진 건 아니었다. 마법의 시전 속도에서 밀린 탓에 당한 거지.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이도영은 몇 주 전에만 해도 매직 미사일 스무 발도 쓰지 못하는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이상하게 머릿속에 남아있는 장면을 되새겨 보았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날린 공격, 어째 익숙한데.’

투박하기 짝이 없는 마나 덩어리. 그건 효율을 떠나서 마법사의 전투법조차 아니었다. 원시적이기 짝이 없는 공격 방식. 왠지 익숙한 느낌에 눈가를 좁힌 순간이었다.

“어…?”

이도영이 가까이 다가온 순간,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마나가 회복될 때 느껴지던 청량감이었다.

하지만 이게 왜? 계약 이후, 권능이 안정화된 후에는 이도영의 몸에서 마나가 뿜어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아니, 단 한 번 있었다. 엘릭서를 먹인 이후, 권능이 폭주했을 때. 그리고 마나 덩어리를 날리는 건, 그때 사용했던 전투방식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표정이 와작 일그러졌다.

‘이 새끼 설마….’

고작 대련에서 이기겠다고 권능을 끌어다 쓴 거야? 이도영이 내게 가까이 다가올수록 강해지는 청량감에, 작게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잘못했다가 폭주라도 했으면 어떡하려고? 물론 내가 있으니 설령 권능이 폭주했다고 해도 금방 진정시킬 수는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제 몸이라고 너무 막 쓰잖아.

표정을 굳히고 이쪽을 향하는 이도영에게 마주 걸음을 옮겼다. 안 그래도 가까웠던 거리가 금방 좁혀지고, 이내 코앞에 다가온 이도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시…시아야?”

이도영의 손을 거의 낚아채듯이 잡고 한참 걸음을 옮겼다, 옆에서 쭐래쭐래 따라오는 김유진이 내게 묘한 시선을 보냈다. 그를 무시한 채 한참 이도영을 끌고 구석을 향해 걸었다.

“저, 저기….”

“가만히 있어.”

“…응.”

인적이 드문 곳에 멈춰 선 뒤, 이도영의 손을 꼭 붙잡은 채 다급히 몸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권능은 별 이상 없이 안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후,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몸은 멀쩡하네.”

“그, 그래?”

내 말을 들은 이도영이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뒤, 표정을 굳히고 이도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왜 그랬어?”

“…응?”

내 질문을 받은 이도영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잖아.”

“아….”

굳이 왜 대련에서 권능까지 사용한 거냐는 질문. 권능에 대해 대놓고 말하기엔 김유진이 신경 쓰이는 탓에 조금 돌려 말했지만, 다행히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성공한 듯 이도영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게….”

말하기 불편한 듯 어째 머뭇거리는 태도에 대답을 독촉하듯 이도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이도영이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 이상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이내 이도영이 입을 열었다.

“미안, 더는 참기 힘들어서 홧김에 그랬어.”

“…뭐?”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참고 넘기기에는, 오늘 걔가 너무 심하게 나오더라고. 그래서….”

뭔 소리야, 갑자기. 권능을 왜 썼냐니까.

아무래도 내 말뜻을 잘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뭐, 왜 싸웠냐고 물어보는 줄 알았나? 아니, 싸운 것 자체는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지. 나 때문에 싸운 거라며.

어째 방향이 좀 틀어진 오해에 질문을 정정하려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김유진이 동그란 눈으로 이도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에, 그럼 도영이 너, 여태 힘을 숨겼던 거야?”

‘아니, 넌 또 뭔 헛소리야.’

힘숨찐 주인공은 이미 한참 전에 유행 끝났다고. 그보다 애초에 얘가 숨길 힘이 어딨어. 아직 못 쓰는 힘은 더럽게 많지만. 아니, 방금 권능을 썼던 거 보면 그것도 아닌가?

원래 주제에서 한참 멀어진 주제에 난감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이내 둘이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괜히 뻘쭘해진 기분에 가만히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묘한 소외감에 조금 기분이 나빠지려던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힘을 숨겼던 게 아니라, 시아 덕분에 엄청 빨리 실력이 늘어난 거라고?”

“응.”

“진짜?”

갑작스레 김유진이 내게 확인하듯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내게 쏘아진 강렬한 시선에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뭐. 내 덕이라면 내 덕이긴 한데. 그래도 은혜는 아네. 미묘하게 좋아진 기분에 작게 미소를 짓던 도중, 겨우 정신을 차렸다.

‘아니, 근데 이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왜 권능 썼냐고 뭐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다시 화제를 원래대로 돌리려 말을 고르던 순간이었다.

“시아야, 어떻게 한 거야?!”

“아니, 그….”

‘아, 이거 망했네.’

김유진의 눈에서 따가울 정도로 강한 시선이 쏘아졌다. 홍채에 그려진 불꽃 형태가 일렁거리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 강렬한 눈빛에 멍하니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멍하니 김유진을 바라보던 도중이었다. 어째 이 대화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잠깐만. 이거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이거, 원작에서도 비슷한 대화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정작 대상이 달랐다. 아니, 왜 이도영이 아니라 내가 실력 상승 비법에 대해 질문을 받고 있는 거냐?

생각도 잠시, 계속 쏘아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려 이도영에게 도와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 눈짓을 받은 이도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도와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아, 진짜 돌겠네.’

슬슬 두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푹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니, 도와달라니까 그걸 무시하네. 은혜도 모르는 놈.

***

신장 위구르 자치구. 천산(?山). 인적이 끊긴 산맥 깊숙한 곳. 인간의 손길은 전혀 닿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곳에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에 해진 가방을 메고 있는 추레한 행색의 사내였다.

거지꼴이나 다름없는 모습을 한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듯, 발걸음을 멈춘 사내가 이내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무질서한 걸음걸이를 한참 이어가던 사내가 얼마 후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 순간, 주변의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

태연한 표정으로 그 변화를 지켜보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으슥하던 산속의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불길한 어둠이 짙게 깔린 건축물이 사내의 눈앞에 나타나 있었다. 가만히 그 건축물을 응시하던 사내가 이내 건물의 내부로 향했다.

­끼익

낡은 마찰음을 내며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간 사내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후, 거대한 공동에 들어선 사내가 무릎을 꿇었다.

“임무, 성공했습니다.”

무감정한 목소리로 사내가 작게 읊조리자, 사내의 앞에 갑작스레 누군가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 등장에도 놀란 기색 없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는 사내를 본 인영이 입을 열었다.

“그래, 물건은 어디에 있지?”

“….”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이의 물음에 사내가 묵묵히 해진 가방을 내밀었다. 가방을 받아 든 이가 이내 가방에서 내용물을 꺼냈다. 그리고 내용물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 주변에 만연하던 검은 기운, 마기가 순식간에 정화되었다. 어둠이 걷히고, 열린 문에서 새어 들어온 빛이 공동 내부를 밝혔다.

“…수고했다.”

마기가 걷힌 공동. 어둠이 사라진 공동에는 거대한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 동상의 앞에 선 이, 백발의 노인이 묵묵히 손에 들린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노인이 무릎을 꿇은 사내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다른 신도는 어디에 있지?”

“…당했습니다.”

“상대는?”

무감정한 문답이 오가고, 이내 무릎을 꿇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한국, 영웅사관학교의 생도입니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의 얼굴이 작게 꿈틀했다. 그를 본 사내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신도라고 하나, 신앙심 하나 없던 이입니다. 임무를 등한시하고 사적인 목적에 열중하던 이이니, 교주께서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생도라.”

사내의 말을 끊고, 노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깃든 냉랭한 어조에 사내가 고개를 다시 푹 숙였다. 잠시간 침묵이 흐르고, 이내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헌신 덕에, 곧 신께서 모습을 드러내실 것이다.”

“….”

“마땅한 응징조차 제대로 행하지 못하는 교를 감히 신께 보일 순 없겠지.”

“…그 말씀은.”

묵묵히 사내를 바라보던 노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죽여라. 교의 명예를 위해.”

“명, 받들겠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노인의 손에서 흘러나온 짙은 마기가 손에 쥐어진 물건을 뒤덮었다. 마기에 반발하듯 물건에서 불똥이 튀기도 잠시, 이내 마기에 뒤덮인 물건이 칠흑같이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검게 물든 물건을 쥔 노인이 걸음을 옮겼다.

노인이 자취를 감춘 후, 사내가 천천히 무릎을 세웠다. 잠시 동상을 응시하던 사내가 이내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공동의 입구가 닫히고, 이내 다시 공동에 마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닫히는 입구에서 새어 들어온 빛을 받았는지, 동상에 새겨진 글자가 작게 반짝였다.

천마신교(???). 공동의 문이 닫힌 이후, 다시 장내에 깔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네 글자가 잠시 빛을 발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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