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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9화 〉 중간 실기 시험(8) (89/167)

〈 89화 〉 중간 실기 시험(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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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장에 들어선 지 세 번째 날, 시험 마지막 날이 되었다. 야영지에 설치해둔 텐트를 그 자리에 그대로 내버려둔 채 이동을 시작했다.

“텐트는 안 챙기려고?”

“어, 어차피 쓸 일도 없잖아.”

“하긴 그렇긴 하네.”

별 의미 없는 대화를 나누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정찰을 이어가던 도중, 틈이 날 때마다 흘깃흘깃 이설화의 표정을 살폈다. 아침에 있었던 일에 대한 오해는 해명을 끝냈지만, 쟤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헛소리를 딱 잘라서 부정하긴 했는데, 정작 그에 대한 이설화의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보니 확신이 안 선다고 해야 하나?

그래? 이 한 마디를 남기고 입을 닫았으니,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건지, 아니면 그냥 굳이 토를 안 달고 넘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반응이 저런 것부터가 이해가 안 돼.’

아직 히로인 플래그가 제대로 꽂힐 시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봉사활동 부도 같은 조고, 이래저래 친분도 쌓은 것 같은데, 저렇게까지 쿨하다는 게 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사실상 히로인 실격이라 이거지.

뭐, 원작에서도 무슨 이벤트가 있어서 친해졌다고 하기보다는 단순히 자주 보다 보니 친해진 느낌이긴 했으니, 지금 시점에서는 아직 그렇게 신경을 안 쓰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정도로 무신경하다는 건 좀 그렇긴 했으니까.

‘아니, 뭐. 은근 질문을 던지는 거 보면 아예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진 않은데.’

얼마나 생각에 잠겼을까? 이내 답답해진 심경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사실 내가 이도영 연애 사정까지 고민해 줄 필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도영이 연애를 하는 꼴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보는 내가 배알이 꼴리는 것도 꼴리는 거지만, 미래를 위해 성장에 힘쓰기만 해도 모자랄 판에 연애질이나 하는 꼴은 보기 싫었으니까.

‘어째 꼰대가 된 느낌이긴 한데….’

학생이 무슨 연애야? 공부나 해야지! 뭐 이러는 꼰대가 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딱히 이도영의 연애에 긍정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뭐, 그렇다고 플래그를 의도적으로 막기까지 하진 않겠지만, 도와줄 생각은 없다, 이거다. 내가 부순 플래그는 뭐 알아서 다시 꽂던가 하시고.

‘어디서 내 앞에서 연애질을 하려고.’

뭐, 이렇게 말은 하지만, 애초에 아직 그런 감정이 있는 히로인도 딱히 없는 것 같았다. 김유진은 단순히 친구 수준인 것 같았고, 이설화 또한 어제오늘 관찰한 결과, 별 감정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으니까. 뭐, 애초에 이설화는 저런 컨셉인 애라서 진짜 어떤 감정을 품고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아, 그러고 보니 백소월도 있었지.’

봉사활동도 몇 번 갔을 텐데, 그사이에 친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네. 뭐, 첫 플래그부터 보기 좋게 망가졌으니,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긴 한데. 그나저나 히로인 참 많네.

‘저 셋이 끝이 아니라는 게 더 놀랍긴 하지만.’

그 생각을 하자마자 들기 시작한 미묘한 기분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이도영을 바라보았다. 어째 참 여복이 많은 놈이었다. 주인공이니 당연하긴 하겠지만. 얼굴도 저 정도면 꽤 괜찮은 편이었고.

“…왜 그래?”

“아무것도 아냐.”

한참 이도영을 쳐다보고 있자, 이내 내 시선을 받은 이도영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얼빵한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기야 아직 플래그 꽂은 여자도 없는데, 벌써부터 이러기엔 좀 그런가. 잡생각을 흩어버린 뒤 이내 다시 정찰을 재개했다. 뭐, 나중에 플래그가 더 쌓이면 그때 생각해도 되니까.

*

“아무래도 한바탕 싸움이 있었던 모양이네.”

“그러게.”

이동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는지, 엉망진창으로 망가진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공격의 파편이 튀었는지, 줄기 부분이 으스러져 쓰러진 나무를 보면 싸움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뭐, 오늘 이런 장소를 발견한 게 한두 번은 아니었지만.

슬슬 시험이 종반부에 들어간 탓에, 조별 간 싸움이 매우 잦아진 모양이었다. 허용 면적이 줄어드는 속도도 매우 빨라졌으니까, 더욱 그러할 테지. 물론, 단순히 접촉 빈도가 늘어난 것만이 원인은 아니겠지만.

“곧 시험도 끝이니까, 아무래도 초조하겠지.”

‘곧’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게 긴 시간이지만, 아무튼 시험이 슬슬 막바지에 이른 건 사실이었다. 성적이 낮은 이들이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다른 조를 습격하게 할 정도로. 즉, 쉽게 말해 점수를 얻기 위한 PK 행위가 더욱 활성화되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성적이 어느 정도지?”

“잠시만, 지금 확인해볼게.”

질문을 들은 이도영이 휴대폰을 켜서 순위를 확인했다. 순위는 예상보다 꽤 많이 내려가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최상위까지는 아니어도 상위권은 유지하고 있었는데, 중위권까지 떨어졌으니까.

아, 물론 이건 아직까지 탈락하지 않은 조들만 따졌을 때 얘기였다. 탈락한 조들을 전부 포함하면 최상위권은 아니어도, 상위권은 가뿐히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화면을 들여다보기도 잠시, 실시간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지, 탈락하는 조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살아있는 조만 따졌을 때는 중위권, 전체적으로 따졌을 때는 상위권 정도인가….”

“나도 너희랑 비슷해.”

“그래?”

이내 자신의 순위를 확인한 이설화도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고 난 뒤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이대로 가면 만족스러운 성적을 얻진 못할 것 같았다.팀플레이를 한 덕에 사냥 속도 자체는 빨라졌지만, 그 반대급부로 점수 획득량은 절반으로 떨어졌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안정성과 속도를 고려하면 팀을 이루는 게 이득이긴 했지만.

뭐, 탈락한 조들까지 고려하면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해도 상위권 정도는 따 놓은 당상이긴 하겠지만, 겨우 그 정도로 만족하기에는 2박 3일간 한 고생이 너무 많았으니까. 이내 결정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안 되겠다.”

“응?”

“이대로는 성적이 망할 것 같다고.”

아무래도 몬스터를 사냥하는 흔해 빠진 방식은 졸업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애초에 지금 시간쯤 되면 몬스터 사냥보다 다른 조를 쓰러뜨리는 게 포인트 수급량이 더 많으니까. 면적이 좁아진 탓에, 마주하기도 힘든 몬스터를 사냥하느니, 차라리 다른 조를 쫓아 기습하는 게 더 나았다.

거기에 더해, 다른 조를 공격하는 건, 경쟁자 제거까지 겸하는 일이었으니까. 일석이조, 일거양득이라 이거지. 원거리 폭격에 최적화된 팀 구성을 고려하면 기습에 최적화된 구성이기도 했고. 생각을 마치고 당당하게 목표를 밝혔다.

“경쟁자 제거로 방향을 트는 게 나을 것 같네. 이렇게 된 거 1등 한 번 해보지, 뭐.”

“나는?”

“…너는 2등 하던가.”

이설화의 질문에 대충 대답한 뒤 행선지를 정했다. 목적지는 배틀 로얄 게임에서 항상 PK의 성지인 장소, 중앙이었다.

*

­카가가가각!

“뭐, 뭐야?!”

이설화의 마법이 다른 조를 향해 날아간 순간, 그쪽에서 펼쳐진 방어 마법이 이설화의 공격을 가로막았다. 방어도 잠시, 순식간에 금이 가기 시작하는 방어 마법을 본 상대 조원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그리고 이설화의 마법을 버티지 못한 방어 마법이 깨져버린 순간, 내가 쏘아낸 화살이 적 마법사의 신형을 관통했다.

“기습이야! 다들 피해!”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벗어난 적 사수가 이내 이쪽을 향해 화살을 쏘아냈다. 그 짧은 순간에 내 위치를 파악한 듯, 정확하게 겨냥한 사격이었다. 하지만 굳이 피할 정도로 위험한 일격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까앙!

순식간에 수십 겹이 중첩되어 펼쳐진 이도영의 실드가 화살의 앞을 가로막았다. 몇 겹의 실드를 관통하기도 잠시, 이내 수십 겹의 실드를 뚫지 못하고 힘을 잃은 화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 한 번 활시위를 당겼다.

“끝이네.”

“응.”

이내 쏘아낸 마법과 화살이 적의 궁사마저 처리하고, 원거리 공격 수단을 잃은 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물론 그걸 놓칠 만큼 우리 팀이 약하지는 않았다. 이설화와 짤막하게 대화를 나누며 도망치는 적을 향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지금 순위가 어느 정도야?”

“나는 6위.”

“그럼 우리는 5위인가.”

도망치는 조의 숨통을 완전히 끊은 뒤, 휴대폰을 들어 순위를 확인했다. 열심히 다른 조를 사냥한 보람이 있는지, 예상대로 5위가 맞았다.

급격히 오른 순위에 미소를 짓기도 잠시, 이내 또다시 다른 조를 찾아 이동을 시작했다. 가만히 발걸음을 옮기며 방금 처리한 조에 대한 감상을 남겼다.

“그나저나 되게 쉽긴 하네.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면 대부분 상위권일 텐데.”

“그…런가? 난 충분히 센 거 같았는데….”

뭐, 사실 급조한 마법으로 이설화의 마법을 잠시나마 막아낸 데다가, 그 마법에 휩쓸렸음에도 근접 계열이 바로 탈락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면 충분히 강한 조는 맞았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상대가 우리 팀이었다는 거겠지.

궁사와 마법사 1위가 모였으니, 원거리 공격력은 최강에 가깝고, 당연히 기습도 용이했으니 전투에서 난해함을 겪는 게 이상한 수준이었다. 물론, 근접 전투 계열이 없는 탓에 접근을 허용하면 좀 위험하긴 했지만, 그거야 그 전에 쓸어버리면 되는 거니까.

“뭐, 걔네도 약한 조는 아니었어. 우리가 더 강해서 그렇지.”

이번에도 제대로 활약하지 못한 게 여전히 신경 쓰이는 듯, 의기소침한 목소리를 내뱉은 이도영을 대충 달래며 걸음을 옮기던 순간이었다. 이내 시야에 스친 익숙한 낯에 발걸음을 멈추고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이내 그 얼굴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한쪽 입가를 끌어당겨 씨익 미소를 지었다.

“유진이네.”

발칙하게도 우리 조를 기습했던 장본인이 중앙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 조를 습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조를 사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눈꼬리를 접었다. 아무래도 그때의 공격을 설욕해줄 기회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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