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랭킹 갱신(4)
* * *
삼파전에서 성공적으로 승리를 거둔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이 끝났다. 시험 종료를 알리는 소리를 듣고 성적을 확인했다. 뭐,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유시아 조 – 1위]
[이설화 조 – 2위]
[박휘성 조 – 3위]
[김유진 조 – 4위]
기대 이상으로 높은 성적. 단숨에 1위를 달성한 순위가 조금 놀랍게 느껴졌다. 마찬가지로 이설화가 2위까지 올라간 것도 그렇고. 그러기도 잠시, 이내 바로 밑에 표시된 이름들을 보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그들만의 리그도 아니고.’
초원에서 전투를 치렀던 네 조가 사이좋게 랭킹 상위권을 나눠 먹고 있었다. 물론 전투 전까지 박휘성과 김유진의 조는 1위, 2위였던 데다가,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험도 같이 끝났으니, 사실상 다른 조가 그들을 역전할 시간도 부족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가만히 생각에 잠기기도 잠시, 갑자기 뿜어진 빛이 몸을 에워쌌다. 시험이 종료되었으니 이제 시험장에서 내보내겠다는 거겠지. 그 사실을 긍정하듯 이내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시야가 급변했다.
파앗!
전송 이후, 빛이 사라진 주변의 풍경은 완전히 바뀌어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초원 한복판이었는데, 지금은 웬 넓은 건물 안이었으니까.
공간이동, 아무리 사관학교라지만 꽤 사치스러운 마법이었다. 가볍게 감탄을 흘리며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이었다.
“윽….”
“괜찮아?”
공간이동은 처음인 탓에 찾아온 현기증에 몸을 비틀거렸다. 휘청거리는 나를 본 이도영이 급히 내 팔을 잡았다. 잠시 잃었던 균형을 다시 세운 뒤 이도영에게 감사를 전했다.
“아, 고마워.”
“별거 아냐.”
“그래도.”
뭐, 진짜 별거 아니긴 했지만. 그렇다고 긍정하긴 좀 그러니까.
대충 감사를 표하기도 잠시, 이내 근처에서 이설화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다른 조니까 다른 곳으로 전송된 모양이었다. 아니면 다른 반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뭐, 그건 딱히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차피 이설화야 알아서 잘할 테니까. 생각을 마치고 이도영과 함께 방을 나섰다.
*
“시아야!”
건물을 나서자마자 익숙한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려 소리의 방향을 향하자, 낯익은 붉은색 머리카락이 내 눈에 담겼다. 김유진이었다.
“어, 안녕.”
“안녀엉?”
가볍게 인사를 건네자 김유진이 말끝을 늘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이내 김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쥐잡듯이 잡았으면서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그러기야?”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김유진을 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농담 따먹기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글쎄, 나는 받은 대로 돌려준 것뿐인데.”
“으으….”
내 대답을 들은 김유진이 분한 듯 침음성을 흘렸다. 뭐, 진심은 아닌 듯 이내 웃음을 머금긴 했지만. 그렇게 놀고 있던 도중 옆 건물에서 익숙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이설화였다.
“너희는 여기로 전송됐나 보네.”
“어, 너는 저기로?”
“응.”
내 말에 대답하기도 잠시, 시선을 돌린 이설화가 김유진을 바라보았다. 둘 사이에 시선이 오가고, 괜한 침묵에 김유진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은 순간이었다.
“오늘은 재밌었어.”
“그, 그래?”
“응. 너도 마법 잘 쓰더라.”
갑작스레 이설화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내 칭찬임을 알아챈 김유진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설화를 본 김유진의 얼굴에 작게 웃음기가 돌았다.
‘쉽네.’
칭찬 한 번 들었다고 저런 반응이라니. 아니, 물론 콤플렉스의 장본인에게서 듣는 칭찬이니 꽤 각별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좀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순진해 빠졌으니, 참.
‘그나저나 웬일이래.’
이설화가 저런 칭찬을 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아무래도 내가 저번에 김유진에게 신경을 써주라고 했던 게 유효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말고.
“그런데 다른 애들은?”
“먼저 갔어. 나는 너희 기다리려고 남은 거고.”
“…그냥 가도 되는 거야?”
이도영의 질문에 김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위야 정해졌지만, 그렇다고 성적이 바로 나올 리도 없으니, 시험을 마치면 바로 하교해도 되는 모양이었다. 하교라고 해봤자 기숙사 행이겠지만.
뭐, 그나저나 시험 종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꽤 시간이 남았었는데. 그 시간 동안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에 감사하단 말을 전하자, 김유진이 방실방실 웃었다.
그렇게 한참 대화를 나누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김유진이 깜빡하고 있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휘성이도 여기 있었는데?”
“휘성이?”
꽤 친근해 보이는 호칭에 고개를 갸웃하자, 이내 김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되물었다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뭐, 박휘성이 끼어들었을 때 한 말을 고려하면, 실습 기간에 친해진 모양이었다. 둘 다 사교성이 좋은 편이니, 친해지는 건 어렵지 않았을 테고.
딱히 말을 정정할 이유는 없어 가만히 김유진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김유진의 뒤쪽, 출구 쪽에서 조금 전까지 눈에 담았던 얼굴이 보였다.
“그러게, 저기 오고 있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김유진의 뒤쪽에서 박휘성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조금 굳은 얼굴이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박휘성의 얼굴이 밝게 변했다.
“아, 시아야. 시험 끝났나 보네?”
“응.”
시험장에서 싸웠던 일 탓에 어색한 기분인 건 나뿐인 모양이었다. 박휘성은 평소랑 똑같이 태연한 태도였으니까.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박휘성이 말을 이었다.
“시아 너, 역시 엄청 세더라. 오늘도 잘 배웠어.”
“어…그, 그래?”
전혀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듯한 태도에 괜히 눈을 피하기도 잠시, 이내 박휘성이 예상치 못한 말을 입에 담았다.
“응. 아, 그러고 보니 예화가 너한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하더라. 자기가 말이 심했대.”
“예화?”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자, 이내 이도영이 내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나랑 말싸움이 붙었던 마법사 이름이 예화였다고.
‘근데 얘는 그걸 어떻게 알아?’
옆 반이니까 딱히 접점도 없을 텐데. 의문 섞인 시선을 보내자, 이내 이도영이 쓴웃음을 지으며 설명했다. 아까 초원에서 말싸움할 때, 박휘성이 이름을 불렀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고.
‘그러고 보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이름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아서 깜빡했던 모양이었다. 애초에 바로 탈락시키기도 했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의식을 되돌리자, 어째서인지 박휘성이 이도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휘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다고 전해줘.”
“직접 사과 안 들어도 괜찮겠어?”
“어차피 내가 이겼으니까, 딱히 별 신경 안 써.”
그 말을 들은 박휘성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째 미묘하게 기분이 나빠진 탓에 눈을 가늘게 좁히자, 이내 그를 본 박휘성이 퍼뜩 표정을 정돈하고 내 말에 대답했다.
“그러면 다행이네.”
티 안 나게 안도하는 목소리. 뭐, 그 마법사랑 같은 조였기도 하고, 그래서 싸움도 붙었으니까. 티는 안 냈지만 조금 신경이 쓰이긴 하는 모양이었다. 어색함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휘성이 너, 어디 갔었던 거야?”
“아, 조원들 배웅해주고 왔거든.”
“그런 것치곤 꽤 오래 나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애초에 자기도 조원들 가는 길까진 따라갔었다고 말하는 김유진의 대답에 박휘성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김유진이 빤히 박휘성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어째 어디서 들어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랑 얘기 좀 나누느라 그랬단다.”
시선을 돌리자, 냉막한 얼굴의 사내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채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김유진의 놀란 목소리가 다시 고막을 울렸다.
“아버지?”
놀란 표정의 김유진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김시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니, 이 양반이 여길 왜 와?
*
“시험장 결계 때문에 오셨다구요?”
“그래, 설치할 때는 이상이 없긴 했지만, 혹시나 해서 말이다.”
한참 김유진과 김시우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시험장 결계를 설치한 게 김시우였다는 사실은 원작에선 나온 적 없는 정보였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시험장에 이 정도의 결계는 없었다고 하던데. 설마 대마법사께서 설치하신 줄은 몰랐습니다.”
박휘성의 말에 따르면, 작년까지는 결계가 없었던 탓에 시험을 치르다 부상을 입는 생도도 많았다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번 해에는 김시우가 결계를 설치한 덕에 아무도 다치지 않고 시험을 마칠 수 있었다고.
“그래, 혹시라도 사고라도 나면 안 되니 말이다.”
“…설마 이번 해에 결계를 설치하신 거, 유진이 때문인가요?”
그 말을 듣자마자 피어오른 의문에 질문을 던지자, 이내 김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을 본 김유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짜요?”
“…흠. 그건 그렇고, 특성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하던데.”
원작대로 팔불출인 건 똑같은 모양이었다. 화제를 돌리려는 듯, 티 나게 이도영에게 질문을 던진 김시우를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예, 소량이지만.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량이라, 내 딸을 상대로는 소량으로 충분하다는 건가?”
“아…그, 그게….”
짓궂은 질문에 난처한 표정을 지은 이도영을 본 김시우가 이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농담이네.”
어째 첫인상이랑은 다르게 꽤 경박한 모습이었다. 뭐, 딸 앞이라서 그런가? 채신머리 없는 아버지의 행동이 부끄러운 듯, 김유진이 괜히 얼굴을 붉혔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생각났다는 듯 김유진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아버지. 휘성이랑 무슨 얘기를 하신 거예요?”
“…그건 말해주기 힘들겠구나.”
별생각 없이 던진 질문 탓에 갑자기 무거워진 분위기에 김유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김시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이야기는 이쯤 하도록 하지. 오늘은 딸을 데리러 왔을 뿐이니.”
“아, 벌써 가시려구요?”
“그래, 외부인이 사관학교 안에 오래 있으면 좀 눈치도 보이니 말이네.”
설마 대마법사에다가 결계까지 설치한 사람이 좀 오래 있겠다고 눈치를 줄 리가. 되지도 않는 핑계였지만, 딱히 반박할 생각은 없었다. 뭐, 조금 불편하긴 헀으니까.
우우웅!
김유진의 손을 잡은 김시우가 손을 가볍게 움직인 순간, 바닥에 마법진이 그려졌다.
이내 마법진이 빛을 뿜고, 둘의 신형이 모습을 감추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김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인들이 움직임을 보였으니 주의하는 게 좋을 거네. 사관학교 안까지 침투하긴 힘들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
방금 그 말은 나와 이도영에게만 전한 듯, 다른 이들에게선 별 반응을 볼 수 없었다.
자세한 설명 없이 휑하고 사라져버린 김시우의 모습에 당황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이내 눈살을 팍 찌푸렸다.
아무래도 쉴 팔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