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습격(2)
* * *
얼마나 수다에 시달렸을까? 한참을 떠들던 백소월이 이제야 좀 진정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에 틈을 놓치지 않고 용건을 입에 담았다.
“아, 그것 때문에 온 거였니?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전부 처리해뒀으니까.”
“처리요?”
“그래, 으음…. 내가 관련 서류를 어디다 뒀더라?”
말을 마친 백소월이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찾는 움직임도 잠시, 이내 찾던 물건을 발견한 백소월이 작게 탄성을 흘렸다.
“아, 여기 있구나.”
몇 장의 종이를 서류철에서 꺼낸 백소월이 서류를 잠시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자, 이 서류를 보면 동아리 활동 장소가 교내로 지정된 게 보이지? 이번 부 활동 시간에는 외부 활동을 나가는 게 아니라 교내 봉사를 하기로 했어.”
교내 봉사라. 그거라면 위험해질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일단 결계의 영향력 내부에 있으니, 설령 만에 하나 마인이 침입한다 하더라도, 즉각적으로 막아낼 수 있을 테니까.
“물론 너희만 제외하고 다른 아이들은 원래대로 나가는 방안도 검토해보긴 했는데, 혹시라도 너희를 찾지 못했을 때, 마인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무차별 습격을 벌일 수도 있으니까. 아예 이번에는 교내에서 활동하기로 결정했거든.”
‘음? 이번에는, 이라고?’
백소월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엔 그렇다 쳐도, 다음 부 활동 시간에 습격이 벌어지면 어쩌려고 이러지? 그 질문에 대한 백소월의 답변은 간단했다.
“글쎄…. 나는 다음 부 활동 시간까지는 해결될 거라는 답변을 들었다고밖에 할 수 없겠네. 아, 그러고 보니 내 지인에게 요즘 대마법사 쪽에서 저번 마인 습격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 아마 대마법사께서 직접 손을 쓰시려는 게 아닐까?”
“대마법사…. 김시우 님이요?”
이도영의 말을 들은 백소월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응, 너희가 척살했던 그 마인이 속한 조직에서 너희를 노리는 거라고 했잖아? 이야기에 따르면 지금 대마법사께서 그 조직을 조사 중이시라고 하더라. 이번에 테러 사건으로 열이 오른 국가 쪽 기관에서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조직의 정체뿐만 아니라 테러의 이유 등, 아주 머리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겠다는 기세로 맹렬하게 조사 중이라며 백소월이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그것들이 테러를 한 이유도 모르고 있네.’
단순히 원작에서 그랬으니까, 라는 말로 여태 그냥 퉁 치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이 세상은 이미 현실, 행동이 일어났다면 반드시 그 이유가 있다. 모 소설의 첫 문장을 빌리자면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 라는 거지.
뭐, 아무튼 간에 멀쩡한 도시에 갑자기 테러를 저질렀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그리고 국가가 그 테러 조직을 쫓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대마법사 쪽 세력, 김시우가 움직인 이유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애초에 그 양반이 우리를 왜 이렇게 도와주는지도 모르겠는데.’
엄밀히 따지면 확실히 도와준 건 나와 이도영의 건강 상태를 봐준 것과 학교에 안전 관련 언질을 넣어준 것, 그 두 가지 정도이고. 마인 조직 탐색이야 국가에서 부탁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확실한 건 원작에 비하면 되게 가까워졌다는 거였다.
‘아무래도 이도영이 김시우랑 테러 전에 먼저 접촉한 게 원인인 것 같긴 한데.’
아니면 그냥 딸이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팔불출적 기질일 수도 있고. 솔직히 이것도 꽤 유력한 원인 중 하나였다. 그에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순간이었다. 이내 귓가에 들려오는 백소월과 이도영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 보니 마인이 속한 조직이라는 거 말이지. 생각해보면 되게 신기하긴 해. 조직이 있으려면 필연적으로 우두머리가 존재해야 할 텐데, 나는 어떻게 마인에게 그런 게 가능한지 이해가 안 가거든.”
“…마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지를 상실하니까요.”
“그래! 단기적인 연합 비슷한 거라면 몰라도, 나는 마인들이 아주 조직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어찌어찌 조직을 결성했다고 해도, 구성원들이 이지를 잃어서 폭주하는 순간 그 조직은 망가질 테니까 말이야.”
그래, 원작에서도 저런 설정 탓에 마인 조직은 초반부에는 딱히 언급되지 않았지. 하지만 마인이 아예 조직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말은 틀린 말이었다. 현재 나를 노리고 있는 신교라는 조직은 아니지만, 원작에서도 마인 조직이 존재하긴 했으니까.
그리고 마인이라면 모두 이지가 흐려지는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마인, 잔챙이들은 주어진 힘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결국 그 힘에 잠식되어 버리지만, 그중 일부는 확연히 달랐으니까.
끊임없이 주어지는 힘에 잡아먹히지 않고, 그에 대한 수련을 거듭한 끝에 끝내 그 힘에 적응을 끝마친 괴물들. 그런 괴물들이 만든 조직이 이 세계에는 존재했다. 백소월이 마인 척살에 집착하는 이유가 된 마인도 그 단체에 소속된 몸이었고. 백소월은 아직 그 마인의 정체를 모르고 있지만.
“제가 만난 마인은 달랐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응, 도영이 너한테는 자세한 기억이 없다고 했지만. 네가 해준 말만으로도 그 마인이 이지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건 알 수 있어. 그때, 네게 마인이 또렷하게 말을 걸어왔다고 했니?”
“네.”
“보통 그 정도로 명료하게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마인은 타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마인이거든? 그런데 내가 들은 소식에 따르면 너희가 쓰러뜨린 마인은 수십 년 전부터 마인이었다고 하더라구.”
이도영의 고아원 원장이 쫓을 때부터 마인이었던 놈이었으니. 즉, 이도영이 자란 고아원이 설립되기 전부터 마인인 놈이었으니, 확실히 정신이 망가져도 진즉 망가져야 하는 놈이긴 했다. 원작에서는 실제로 정신이 완전히 맛이 간 상태였고.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마인 치고는 되게 정신이 멀쩡한 것 같았는데요.”
“그게 그 마인 조직의 특이점이라고 나는 생각해. 마인들이 정신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았다거나 하는 등 말이야.”
그 말을 내뱉은 백소월이 순간 얼굴을 굳혔다. 방금 전까지 보이던 수다스러운 소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차가운 냉기로 가득한 검수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표정을 편 백소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내 예상이 사실이라면 대마법사 쪽에서 나선 이유도 추측할 수 있어. 정말로 마인이 시간이 지나도 정신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결과는 상상하고 싶지도 않거든.”
본능에 휩쓸리는 마인도 상대하기 까다로운데, 이지를 갖고 싸우는 마인은 재앙이나 다름없다며 경계하는 백소월과 그에 맞춰 대화하는 이도영을 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했으면서, 꽤 친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아주 대화가 청산유수처럼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뭐, 대화 대부분은 백소월의 말이 차지하고 있어서, 사실상 이도영은 추임새만 넣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미묘한 기분에 시선을 보내기도 잠시, 이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저 대화 상대가 됐다면 꽤 피곤할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가만히 대화를 구경하던 순간이었다. 불현듯 나와 눈을 마주친 이도영의 얼굴이 작게 굳었다.
“…?”
그 묘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다. 백소월의 질문에 대답하던 이도영이 점점 말을 줄이더니, 이내 돌연히 내게 화살을 날렸다.
“그건 저보다 시아가 더 잘 알 것 같아요. 저는 저번 동아리 활동 때 전부 말씀드리기도 했고, 그때 기억은 흐릿하기도 하니까요.”
“어…?”
아니, 잠깐만. 여기서 나한테 토스를 한다고? 이걸?
당황한 표정을 지은 순간, 나를 본 백소월이 잊고 있었다는 듯 이제야 생각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나를 보는 백소월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마치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는 듯한 모습. 김유진에게서 자주 봤던 그 반응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위기감에 소름이 돋으려는 피부를 애써 진정시킨 순간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백소월의 입이 열렸다.
“저….”
이후, 한참 동안 대화를 빙자한 언어폭력에 시달린 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적어도 위안이 하나 있다면, 내게 토스한 이도영도 함께 수다에 괴로움을 겪었다는 거 하나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얘는 내성이 있어서 별 타격이 없는 것 같았지만. 젠장.
*
“아…진짜 힘들어 죽겠네.”
“아하하…. 소월 선배가 좀 말이 많으시긴 하더라. 원래는 과묵하신 분일 줄 알았는데.”
진이 쭉 빠진 채 비척비척 걷는 나를 본 이도영이 웃음을 흘렸다. 따지자면 지가 나한테 토스한 탓에 이렇게 지친 건데, 참 양심도 없는 놈이었다.
얼마 뒤, 기숙사로 향하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남성용 기숙사와 여성용 기숙사가 위치한 곳이 다른 탓에, 기숙사로 가려면 여기서 갈라져야 했다. 이도영에게 작별을 고하기 전, 갑자기 든 생각에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뭐, 그나저나 그 선배랑 꽤 친해 보이네? 이름도 막 부르는 걸 보면.”
“아…그렇게 친해진 건 아냐.”
“흠…그래?”
둘이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걸 뻔히 내가 봤는데,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미묘한 기분에 작게 콧소리를 흘리며 이도영을 바라보았다. 친구 사이인데 이 정도 얘기도 못 하나 하는 생각에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나빠진 기분에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열었다.
“뭐, 그럼 됐어. 이만 가봐야겠네.”
그 말을 들은 이도영의 얼굴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그를 보며 담담히 작별을 고했다.
“내일 보자.”
그 말을 내뱉고 몸을 돌려 기숙사를 향했다. 뒤에서 말끝이 흐려진 목소리가 마주 작별을 고했다. 그에 알겠다는 말을 해준 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기숙사로 들어가는 길 내내, 어째 자그마하게 피어오른 짜증이 영 가시질 않았다.
아니, 간다고 이걸 또 그냥 보내네. 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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