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마인(1)
* * *
덮쳐온 마인을 쓰러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흐릿한 눈동자는 이지를 상실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고, 단순히 본능에 따라 가진 힘을 휘두르는 마인 따위에게 질 정도로 조원들의 실력이 빈약하진 않았으니.
물론, 영혼이 붕괴한 대신, 품은 힘의 규모가 어마어마한, 생물보다 재해에 가까운 마인이라면 이야기는 또 달랐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마인은 그 정도의 힘을 품고 있지는 않았다.무예를 구사하진 못하나, 말을 할 정도로는 이지가 남아 있었으니.
그리고 그 마인을 쓰러뜨리는 데 일등 공신이라 칭할 만한 이는, 의외로 이시혁이었다.
원작에서는 딱히 묘사가 없던 이였기에 잊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수준 높은 검술을 보여줬으니까.
그 수준은, 적어도 같은 반 신입생들에게는 댈 바가 아니었다.
하기야 이시혁의 랭킹은 3학년에서도 상위권이라는 것 같으니. 신입생들에게 비교하는 건 꽤 가혹한 일이겠지.
기준에서 뒤처지는 순간, 가차 없이 제적을 때려버리는 사관학교에서 2년을 넘게 버텼다는 뜻이니 말이다.
3학년에서 아무나 뽑아도 웬만한 영웅 수준은 될 테니, 그중 상위권을 차지한 이시혁 정도라면 충분히 대단한 실력자인 건 맞았다.국가에서 작정하고 벼려낸 엘리트 중 상위권이라는 의미이니.
아무리 지금 1학년이 아카데미물 국룰인 황금 세대라고 해도, 아직 저 수준에 다다른 이는 드물다는 거다. 굳이 따지자면, 나와 이설화 뿐이겠지.
마인을 쓰러뜨린 뒤 웃으며 입을 여는 이시혁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나마 제일 약한 시기의 마인이라 다행이었네.”
아직 긴장이 채 가시지 않은 조원들을 차분히 달래는 모습. 과연 3학년 상위권 생도다운 연륜이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시선을 돌린 뒤 이동을 재개하며 흘깃 잔여 마나량을 확인했다. 예상보다 더 적은 소모량에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
‘마나는…딱히 별로 쓰진 않았네.’
실기 시험 이후, 한동안 궁술을 체화하는 데 힘쓴 덕분이었을까?
마나를 사용하지 않아도 꽤 수준급의 궁술을 발휘할 수 있었기에 굳이 마나를 쓸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수준 이상의 궁술을 사용할 때의 마나 소모량도 꽤 줄어들어 있었고.
더하여, 이도영에게서 흡수한 권능도 꽤 많이 남아 있었으니. 아무래도 마나가 전부 소모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몸에 품은 권능 덕분에 지금도 조금씩 마나가 회복되는 걸 느끼고 있었기에, 근거 있는 확신이었다.
그리고 공기 중 퍼진 미약한 마기를 접한 권능이 날뛰어 주는 덕에, 이전과 같이 호흡 곤란을 겪는 일도 없었고.
‘생각보다 더 순조롭네.’
가용할 수 있는 마나는 충분한 양이 남아 있었고, 조원들의 수준은 생각보다 뛰어났다.
덮쳐오는 마인의 숫자가 그리 많지도 않았으니, 탈출을 확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피해라! 당장!]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고 이동하던 도중, 한동안 듣지 못했던 헤르메스의 목소리가 갑작스레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즉각 이해할 수 없는 경고. 하지만 그 경고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이미, 머리가 판단을 내리기 전부터 몸이 움직이고 있었으니.
등골이 섬찟하게 다가온 육감. 그 육감의 지시에 따라, 본능적으로 마나를 끌어올린 육체가 땅을 박찼다.
그리고 내가 자리를 피한 직후, 조금 전까지 내가 있던 위치에 검은 기둥이 솟구쳤다.
콰아아아아아앙!
아니, 바닥에서 솟구친 게 아니었다. 옆에서 날아와 내리꽂힌 공격.
땅바닥에 그대로 때려 박힌 공격이 폭발하며 마기를 쏟아낸 것이, 마치 기둥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그 강대한 마기를 확인하자마자 장내에 순식간에 긴장이 가득 찼다. 나를 포함한 조원들이 급격히 전투 태세에 들어갔다.
그리고 막 진형을 갖춘 순간, 등골이 쭈뼛할 정도로 강렬한 기세가 이쪽을 향해 쏘아졌다.
“무…무슨…!”
“…히이익!”
어마어마한 기세, 여태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있었던 이시혁조차 얼굴에 당황을 비칠 정도로 무지막지한 기운이었다. 등골을 쉴 새 없이 내달리는 위기감에 전신이 빳빳하게 굳었다.
그리고 자신의 위세에 압도당한 이들을 보며,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특별한 인상은 아니었다. 평범한 외모에, 그리 월등하진 않은 체격.
하지만 그러한 외양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 이 섬뜩하기 짝이 없는 기운을 느낀 이가 외양 따위에 눈길을 줄 리가 없었으니.
터벅터벅 걸어오며 차가운 시선으로 조원들을 바라보던 사내가, 이내 무감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훌륭한 실력이군. 설마 그 공격을 피하다니.”
뜬금없는 칭찬. 하지만 그 칭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이는 없었다. 그에게서 쏘아지는 기세는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형형하게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으니까.
“후으으…흐윽….”
조원 중 특히 심약한 이, 2학년 검사의 호흡이 질려가는 게 귓가에 들려왔다.
사실상 공격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패도적인 기세.
그 막대한 기세를 겨우 떨쳐낸 이시혁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그 답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마인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
이시혁의 질문을 들은 마인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대화를 끊었다. 마인의 말은 길지 않았다. 길 필요도 없었다.
“적. 그 한마디 외에 대화가 더 필요한가?”
너희들의 적이라는 말. 그 무엇보다 직관적인 대답이었으니.
대답을 들은 이시혁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타협할 방법은 없는 겁니까?”
“….”
남자는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다는 듯, 침묵을 고수했다. 그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닫은 이시혁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전투 태세에 돌입하는 이시혁의 모습을 보며 마나를 최대한으로 끌어 올렸다.
지금 저 마인의 기세를 고려하면, 힘을 아낄 여유는 전혀 없었다.
아니, 한계까지 힘을 끌어내도 과연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상대였다.
A+. 극한까지 끌어올린 궁술이 내게 한계 이상의 안력을 제공했다.
지금까지와 비할 바 없이 선명해진 시야, 달인에 이른 전투 감각으로 마인의 빈틈을 훑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그 결과를 보자마자 당혹감에 빠져들었다.
‘빈틈이…없어?’
내가 당황에 빠지거나 말거나, 자세를 잡은 이시혁의 검이 마인을 향해 휘둘러졌다.
극한까지 달한 쾌검. 감히 영웅급에 달했다고 칭할 만한 수준, 아니 그 이상의 검술이었다.
현재 내가 궁술을 최대한 끌어올린 상태가 아니라면, 형태조차 좇기 힘든 쾌검이 마인의 목덜미를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깡!
“좋은 일검이었다.”
이시혁의 검은 마인의 목을 베어내지 못했다. 아니, 목덜미에 닿는 것조차 해내지 못했다.
마인이 뻗은 두 손가락. 가볍게 들어 올린 검결지에 막힌 검이 분하다는 듯 파르르 검명을 토해냈다.
“하…하하.”
그리고 압도적인 실력 차에 쓴웃음을 지은 이시혁을 향해, 마인의 팔이 휘둘러졌다.
빠아악!
“…!”
신음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날아간 이시혁이 근처 잔해에 충돌했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먼지가 일고, 이내 정신을 잃은 이시혁의 몸이 축 늘어졌다.
그 처참한 모습에 이를 악물고 마인에게 화살을 쏘아냈다.
방금 전 움직임으로, 완전무결하던 마인의 자세에 순간이나마 빈틈이 드러났다.
쐐애액!
최대치까지 끌어올린 궁술로 쏘아낸 화살. 극한의 예기를 품은 세 발의 화살이 마인의 급소를 향해 날아들었다.
차례대로 미간, 심장, 그리고 하복부.
이지를 잃지 않은 특수한 마인.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그들의 약점인 하복부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화살이 쏘아졌다.
그리고 마법사가 쏘아낸 마법 또한 그 뒤를 이었다.
쿠우우우웅!
아무래도 이시혁에게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었던 모양인지, 여태 보여주던 것과는 다른 폭급한 기세로 쇄도하는 마법.
마법사가 쏘아낸 무수한 마법이 내 화살의 꼬리를 물며 마인의 몸을 덮쳤다.
“흐음….”
그리고 그에 대항하듯 마인이 뻗어낸 검결지에 어마어마한 마기가 깃들었다.
순식간에 유형화된 마기가 뭉쳐 형태를 이루고, 형태를 이룬 마기가 선명하기 짝이 없는 실체를 이루었다.
검결지에 한순간에 형성된 검기. 하지만 그로는 역부족이었다.
최고 랭크, A+에 달한 궁술이 만들어 낸 마력 화살은 기(?)를 넘어, 강(?)에 달했으니. 고작 검기 따위에 튕겨 나갈 리 없었다.
그 뒤를 이은 마법은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화살에 그 몸이 꿰뚫리고도 남을 터.
하지만 어째서 저 정도 수준의 무인이, 강기(??)가 아닌 검기(??)를?
그 의문도 잠시, 이내 마인의 코앞까지 도달한 마력 화살에 집중을 최고조까지 끌어 올린 순간이었다.
마인의 손가락에 맺힌 검기가, 찬란하게 빛을 뿜었다.
키이잉!
칠흑같이 검은 검기 속에서 드러난 푸른 빛. 마치 밤하늘의 별빛처럼 아름다운 빛이었다.
검기성강(??成?).
초월에 달한 무인만이 사용할 수 있는 진정한 강기(??).
단순히 검기를 뭉쳤을 뿐인 강(?)과는 다르게, 의지를 품은 검기가 스스로 빛을 내뿜는 초월의 증빙.
“하…맙소사.”
마인의 검결지에 깃든 찬란한 빛을 보자마자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꾸덕꾸덕 접혀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단순한 강(?)이 아닌, 강(?)을 사용하는 무인을, 이 구성원으로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A+랭크의 궁술 따위로 그를 쓰러뜨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강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초월의 경지. S랭크에 발을 디뎠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나쁘지 않은 공격이었다.”
이쪽에는 필사의 일격이었음에도, 가볍기 그지없는 품평. 그 오만한 말에도 아무도 반박을 입에 담지 않았다. 담을 수가 없었다.
검기성강(??成?), 그 압도적인 실력의 증명을 이미 두 눈으로 확인한 이후였으니.
그리고 경악에 잠긴 우리들을 눈에 담은 마인의 몸이, 순간 다시 자취를 감췄다.
눈에 제대로 비치지도 않는 속도. 견고한 방어 마법이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고, 이내 마법사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꺼…어억!”
다행히도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지만, 전투를 이어가는 건 불가능한 부상이었다.
괴상한 단말마를 내뱉은 마법사의 몸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그리고 그를 본 한 조원의 입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히…히이익!”
심약하기 짝이 없던 2학년 검사. 방금까지 벌벌 떨고 있더니, 결국 정신이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공포에 질려 검조차 버리고 도망치는 검사를 본 마인의 눈이 크게 찌푸려졌다.
“허어, 동료조차 버리고 도망치는가.”
우우우우웅!
마인의 손가락에 다시 한번 찬란한 빛이 깃들었다. 그리고 그 빛이 반원을 그리자, 이내 도망치던 검사의 다리가 그 움직임을 멈췄다.
“어…어…? 어?!”
급격히 기울어지는 자신의 시야에, 검사의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골반 윗부분, 허리 부분부터 깔끔하게 잘려 나간 자신의 육신이 시야에 담겼을 테니.
촤아아아악!
“아아아아악!”
피를 뿜는 분수대 따위로 전락해버린 자신의 몸을 본 검사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그나마 육체 계열의 초인이었기에 품은 강인한 생명력이 목숨의 잔불을 필사적으로 이어붙이고 있었지만 그것도 찰나.
이내 그 생명력마저 한계에 달했는지, 빠르게 혼탁해진 검사의 눈이 이내 빛을 잃고 완전히 흐려졌다.
“….”
차갑게 식어버린 검사의 시체를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여태 마인을 몇 소멸시키긴 했지만, 정작 진짜 사람이 죽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다.
그에 혼란에 빠진 내 얼굴을 본 마인이 무감정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읊조렸다.
“흐음, 타인의 죽음을 직관한 건 처음인가.”
그에 욕설을 내뱉을 정신조차 남지 않았다.
바닥을 질펀하게 물들인 붉은 색 피가 머릿속에 잔상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내게 차가운 시선을 보낸 마인이 말을 이었다.
“나약하구나.”
경멸 섞인 마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이내 마인의 손가락에 또다시 막대한 마기가 결집했다.
그리고 곧, 세로로 휘둘러진 검결지에서 쏘아진 참격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피해라!]
머릿속을 울리는 헤르메스의 경고.
그에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참격이 슬로우 모션처럼 느릿하게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끝이다.’
피하기엔 이미 늦은 공격. 곧 내 몸을 처참하게 도륙할 참격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이었다.
퍼억
갑작스럽게 옆에서 가해진 충격이 내 몸을 사정없이 밀쳐냈다.
급격히 흔들리는 감각에 당황에 빠지기도 잠시.
서겅
섬뜩한 절삭음이 내 귓가를 간질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겐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에 감았던 눈을 뜨고 옆을 바라보자, 이내 방금 전 절삭음의 원인이 내 눈에 담겼다.
내 몸을 밀쳐낸 박휘성의 팔이, 잘려 나간 채로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