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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화 〉 천선[??](5) (111/167)

〈 111화 〉 천선[??](5)

* * *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다.

당연하지만 낯선 천장 따위는 아니었다. 후각을 통해 느껴지는 소독약 냄새와 전신에서 느껴지는 둔탁한 통증에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또 병원인가.’

병실 침대에 누워있다는 걸 자각하기도 잠시, 어째 입원할 때마다 부상이 심해지는 듯한 기분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되짚어보면 기분 탓이 아니라 사실이긴 했다.

첫 입원은 단순한 마기 중독, 두 번째 입원은 다리에 입은 관통상에 전신 타박상, 더하여 마기 중독. 그리고 지금은, 내상이고 외상이고 가릴 것 없이 전신이 상처투성이인 상태에 더해 마기 중독까지.

‘갈수록 심해지네. 개 같은 거.’

어째 마인이랑 마주할 때마다 입원하는 건 물론이고, 점점 입는 부상의 강도가 심해지고 있었으니까. 그 와중에 마기 중독은 매번 있었다는 게 우스울 따름이지만.

그 거지 같은 상황에 속으로 투덜거리며 멍하니 침대에 누워있던 순간이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시아야, 일어났어?”

그 익숙한 목소리에 겨우 고개를 돌리자, 이내 낯익은 붉은 색의 장발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김유진이 얼굴 가득 불안을 담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몸 상태는 괜찮아?”

“나쁘진 않아. 그리 좋지도 않긴 한데.”

내 안부를 묻는 말에 대충 대답하기도 잠시, 이내 김유진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시아, 너 진짜 큰일 날 뻔했어. 꼬박 하루 동안 정신도 못 차리고…. 의사는 잘못하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다고 그러고….”

다행히도 자신의 아버지, 김시우의 회복 마법 덕에 후유증이 남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잘못하면 영구적인 부상을 입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었다는 말. 그 말을 내뱉은 김유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깨어나서 다행이야.”

“응….”

그 말에 담긴 감정에 괜히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째 쑥스러운 기분에 가만히 입을 닫자 이내 병실에 적막이 맴돌았다.

그리고 그 탓에 형성된 어색한 분위기에 몸을 이리저리 꼬기도 잠시,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다른 애들은?”

“다른 애들?”

“…있잖아. 박휘성이라든가, 이도영이라든가.”

“아, 그 애들?”

내 말을 들은 김유진이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생각에 잠겼던 김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으음…. 사실 휘성이가 뭘 하는지는 정확히 몰라. 아버지와 뭘 확인한다고 했던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는 안 알려주셨거든.”

“아버지?”

“응, 우리 아버지 말이야.”

그 대답을 듣자마자 걔가 대충 뭘 하고 있을지는 예상이 갔다.

뭐, 아마 마인 관련한 일이겠지.

마인 계약은 해제되었다고 해도, 그때 새로운 힘이 탄생하기도 했고, 또 마인 계약 해제 자체가 처음 있던 일이니까. 그런 흥미로운 일의 당사자를 김시우가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박휘성에게도 손해는 아니었다. 김시우가 무슨 인체 실험을 할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상부상조라고 봐야겠지.

그렇게 생각에 한참 잠겨있던 순간, 김유진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 그리고 도영이는 지금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

“…음?”

순간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멍한 표정을 짓기도 잠시, 이내 그 말뜻을 이해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여기서 갑자기 동거 선언을 한다고? 진짜?

‘아니, 에반데.’

무슨 조짐이라도 보였으면 모르겠지만, 여태 전혀 그런 낌새 하나 없었는데. 그사이에 이렇게까지 관계가 진전됐다고? 진짜 너무 급발진이잖아.

폭풍처럼 밀려오는 생각에 멍하니 흔들리는 시선으로 김유진을 바라보았다. 어째 괜한 배신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 정도로 사이가 진전되는 동안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었다고? 좀 너무한데.

급격히 섭섭해지는 기분에 내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지던 순간이었다. 내 표정을 살핀 김유진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그, 그게 아니라! 오해야!”

“…오해라고?”

아예 손사래까지 치며 변명하는 김유진의 모습. 그에 얼굴을 정돈하고 의문 섞인 시선을 보냈다. 어째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내가 말을 잘못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내 김유진이 내게 해명을 시작했다.

“마인이 습격할 우려가 있다고 해서, 아버지가 잠시 도영이를 보호해주겠다고 한 거야. 그, 그런 게 아니라….”

“아….”

그 소리였어?

아, 뭐. 생각해보니 그러네.

하기야 사관학교까지 습격한 놈들인데, 한 번 습격했는데 두 번은 못 할 거라는 보장은 없긴 했다.

그 설명에 표정을 풀고 고개를 주억거린 순간이었다. 이내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그러면 사관학교는 어떻게 되는 거야?”

“휴우…. 그, 아마 몇 주 정도 휴교할 거라고 하더라. 이번 습격으로 되게 큰 피해를 입었다고 했으니까.”

원래대로 돌아온 내 표정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김유진이 이내 설명을 이어갔다. 이번 테러로 인해 피해가 컸기에 당분간 휴교할 것 같다는 말. 그 말을 들은 순간 괜히 기분이 무거워졌다.

“…피해.”

나와 이도영, 고작 그 둘을 노린 습격이었지만, 다른 이들이라고 피해가 없을 리는 없었다. 양동작전이라는 명목으로 수많은 마인들이 사관학교 각지에서 날뛰었으니까. 그에 휩쓸린 이들은 분명히 존재할 터.

물론 그렇다고 내가 필요 이상으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내가 습격을 사주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나 또한 피해자였으니까. 하지만 또 아무 생각 없이 넘길 수 있는 것도 아니긴 했다.

조금 답답해진 기분에 입을 닫기도 잠시, 이내 표정을 정돈하고 김유진을 다시 바라보았다. 굳이 이런 감정까지 티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얼마 후, 김유진의 입에서 또다시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튼 그래서 도영이는 지금 우리 집에 있어. 그리고 시아 너도 퇴원하면 우리 집에서 지낼 거고.”

“…음? 나도?”

“응, 어차피 사관학교가 휴교하면 딱히 갈 곳도 없잖아. 그리고 너도 테러 목표 중 하나였다면서.”

“아니, 그…렇긴 한데.”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내 상황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습격으로 인한 휴교이니 기숙사도 문을 닫을 터.

그러면 내가 지낼 곳이라 해봐야 원래 살던 그 집밖에 없는데. 거기로 가느니 김유진의 집으로 가는 게 한참 나았으니까. 안전 면에서 보면, 대마법사의 자택만큼 안전한 곳이 있을 리도 없고.

어…. 근데 그러면 당분간 이도영이랑 같이 살게 되는 건가? 그건 좀 그런데.

어째 조금 미묘한 기분에 볼을 긁적였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김유진을 향해 감사의 말을 전했다.

뭐, 일단 나를 신경 써준 조치였던 데다가, 좋으면 좋았지, 나쁜 일은 아니었으니까.

“…고마워.”

“별것도 아닌데, 뭐. 괜찮아!”

내 감사 인사를 들은 김유진이 겸양을 떨면서도 헤헹 하며 콧대를 세웠다. 그 우스운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김유진이 활기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빨리 퇴원하면 좋겠다. 나, 친구랑 한 번 같이 지내보고 싶었거든!”

“그, 그러냐…?”

어째 과한 텐션에 좀 질려버린 순간이었다. 갑자기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근데 그 말대로면 이도영은 친구로 안 치는 거냐? 지금 너네 집에 있다며.

‘뭐, 그런 뜻이 아니란 건 알지만.’

괜히 떠오른 잡생각에 피식 웃은 뒤 대화를 이어갔다.

*

한참을 떠들던 김유진이 병실에서 나가고, 그 하루는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뭐,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어느새 소식을 들었는지 다음 날부터 하나둘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으니까. 내 인맥이 인맥이다 보니,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무사한 모양이네. 다행이야.”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의외로 이설화였다.

얘랑은 그리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는데, 솔직히 올 줄은 몰랐다.

뭐, 걔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딱히 말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기에 대화가 그리 오래가진 않았지만 말이다.

몇 마디 이야기를 끝으로 침묵이 맴돌고, 이내 이설화가 신속히 자리를 떠나갔다. 진짜 상태만 보러 온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렸다는 말을 듣고 왔어.”

그 다음 날 찾아온 이는 백소월이었다. 아무래도 그간 바빴던 모양인지, 백소월은 얼굴에 꽤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채였다.

그리고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기도 잠시, 이내 백소월이 조금 지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확인차 온 거니까,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보다 몸은 좀 괜찮니?”

“아, 예. 그리 큰 이상은 없어요.”

“그래도 부상이 컸으니까, 당분간 조심하도록 해.”

별 영양가 없는 대화가 잠시 이어지고, 또다시 병실에 적막이 맴돌았다. 그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한 분위기에 한숨을 내쉬려던 순간이었다.

“으음…. 공적인 용건은 여기까지 하고, 우리 사적인 얘기나 좀 할까?”

갑작스레 얼굴에서 피로를 지워버린 백소월이 내게 흥미로운 눈빛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사적인 얘기요?”

어째 짓궂기 그지없는 표정, 그 눈에서 일렁이는 장난기에 조금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머뭇머뭇하며 백소월에게 되물은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내게 던져졌다.

“그래서 너는 어느 쪽을 고를 생각이니?”

“…네?”

무슨 말인지 이해를 제대로 하진 못했지만, 어째 불길하기 짝이 없는 질문. 그에 무슨 의미인지 되묻자마자, 백소월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헛소리를 내뱉었다.

“도영이랑 그때 그 다른 남자애 말이야. 휘성이라고 했던가?”

“…예?”

“그래서 너는 둘 중 누가 더 좋아?”

마치 아침드라마를 직관하는 아주머니들 같은 표정. 단아한 인상에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그 언밸런스한 표정에 멍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내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백소월이 수다에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아니, 돌겠네. 진짜.’

그저 수다만으로도 내 정신이 견디기 힘든데, 그 수다의 주제까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이윽고 백소월에게서 쏘아진 압도적인 정신공격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

“아…겁나 힘들어.”

백소월이 떠나간 병실. 겨우 고요함을 되찾은 아늑한 공간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그 수다는 떠올리는 것만으로 정신에 데미지를 주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이내 그 수다의 내용을 떠올린 순간, 뒤늦게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니, 무슨 그딴 오해를….’

어째 말만 들으면 내가 박휘성이랑 이도영 사이에서 줄타기라도 하는 줄 알겠네.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뭐, 그래도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했는지는 대충 예상이 가긴 했지만.

‘역시 이도영이 신경 쓰이긴 하는 모양이네.’

신경이 쓰이는 후배 옆에 웬 여자가 하나 붙어 있으니,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불안한 기분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으니까.

뭐, 이제 와서 원작 운운하는 것도 웃기긴 한데.

그리고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백소월을 향해 묘하게 부정적인 감정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입원까지 한 사람한테 이런 견제를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의식적으로 한 건 아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애초에 이도영은 전혀 그런 생각 없을 텐데. 박휘성은…논외로 쳐도.’

원작에서 쟁쟁한 히로인들이 다 붙어도 꿋꿋하게 모르는 척 행동한 놈인데, 다른 히로인들도 아니고 내게 그런 감정을 품을 리는 없었다.

애초에 내 성격이 성격인데 그럴 리가 있나. 다른 히로인들 모조리 플래그마저 뽑힌 걸 보면, 원작에 비해도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는 없는 놈이기도 하고.

‘뭐, 박휘성 걔는 좀 이상한 타입이니까 그렇다 쳐도.’

원작에서도 자기한테 쌀쌀맞은 태도를 보인 이설화에게 집착한 걸 보면, 아무래도 박휘성 걔는 취향이 좀 이상한 모양이었다.

하필 그 대상이 나라는 게 제일 골 때리긴 하지만.

‘아니, 근데 진짜 걔한텐 뭐라고 해야 하냐.’

박휘성을 떠올리자마자 답답해지는 머릿속에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저히 결정할 수가 없었으니까.

“…아, 모르겠다.”

한숨을 푹 내쉬며 생각을 마친 순간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들어가겠다는 목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렸다.

그에 생각을 멈추고 들어온 이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머릿속에 의문이 피어났다.

아니, 다른 애들은 몰라도 니가 왜 오냐?

“안녕.”

“…무슨 용건이야?”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에 담긴 날카로운 감정에 얼굴을 굳혔다. 도저히 상대가 내 병문안을 올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애초에 눈을 보면 딱히 병문안을 하려는 의도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들어온 이의 정체는, 중간 실기 시험 때 나한테 시비를 걸었던 여자, 신예화였으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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