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개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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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망한 기분이 들어 그저 눈을 깜빡였다.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내가 그를 구했다는 그 말부터가 틀렸다.
내가 박휘성을 구한 게 아니라, 박휘성이 나를 구한 거였으니까. 나는 그저 그 과정에서 맺은 계약을 해제했을 뿐. 애초에 내가 없었다면 박휘성이 마인으로 타락할 일도 없었으니.
즉, 구해줬다는 말은 내가 들을 말이 아니라는 거다.
그 말은 오히려 내가 박휘성에게 해야 하는 말이었으니까. 경황이 없어서, 그리고 그때는 상황이 급박했기에 여태 입에 담지 못하고 있었을 뿐.
생각을 마치고 방금 그 말을 부정하려던 순간이었다. 내 표정을 보고 내 생각을 예측한 듯, 내 말을 가로챈 박휘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시아야, 내가 계약한 건 네 탓이 아니야.”
납득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내가 아니었다면 박휘성이 마인 계약을 맺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그리고 생각이 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인지, 박휘성이 이내 내게 질문을 던져왔다.
“네 말대로라면 나는 결국 마인이 됐을 거라고 했지?”
“…맞아.”
입맛이 씁쓸해지는 질문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순간, 내 대답을 본 박휘성이 미소를 지었다. 그 이상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박휘성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시아야. 나는 지금 마인이 아니잖아.”
“그건….”
그거와 이건 다른 이야기였으나 바로 반박하기는 힘든 말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을 고민하기 위해 머뭇거리던 도중, 박휘성이 다시 한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리고 네가 아니더라도, 나는 어떻게든 언젠가 마인이 될 상황이었으니까. 네 탓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줘.”
“…뭐?”
마인이 될 미래를 알고는 있었다고 했지만, 원작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애초에 원작의 억지력 따위도 느껴본 적 없었고.
그런 내 입장에서 박휘성이 지금 내뱉은 말은 꽤 당황스럽게 다가왔다. 그 감정이 여실히 드러난 내 얼굴을 본 박휘성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때 너는 기절해서 못 들었겠지만, 그때 그 마인이 나한테 그랬거든. 내가 마인이 된 건 모두 계획대로였다고.”
“계획이라고?”
“응, 계획. 애초에 테러의 목적부터가 두 가지였던 거야. 시아 너와 도영이. 그리고 나.”
“그게 무슨….”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아 멍한 표정으로 박휘성을 바라보았다. 테러는 정황상 나와 이도영을 노린 게 확실했고, 애초에 박휘성은 신교와 엮일 일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금세 박휘성의 입에서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테러를 주도한 쪽의 세력은 시아, 너와 도영이를 노린 게 맞아. 하지만 다른 마인. 그 특별한 마인 말고 일반적인 마인들의 참여는 그 세력 말고 다른 존재가 개입한 거였거든.”
“다른 존재라고?”
“응, 그 마인이 말하길, 나랑 계약을 맺었던 그 악마가 테러를 도왔다고 하더라. 내가 자신과 계약을 맺게 하려고.”
전혀 몰랐던 사실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모든 마인이 신교라는 세력의 마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꽤 귀한 정보였다. 그리고 악마라는 존재의 개입 또한 마찬가지였고.
그 사실에 지금 처한 상황조차 잊고 생각에 잠기기도 잠시, 이내 박휘성의 말이 내 집중을 깨뜨렸다.
“그러니까 내가 마인이 된 건 너 때문이 아니야. 오히려 선후관계가 반대인걸. 나는 너 때문에 마인이 되었던 게 아니라, 마인이 됐던 상황에서 네 덕에 구원받은 거니까.”
“….”
방금까지 고민하던 생각이 순식간에 밀려나고, 그 자리를 당황이 가득 채웠다. 나를 바라보는 눈에 배인 감정이 너무 짙어 숨이 막혀왔다.
영겁과도 같은 침묵이 흐르고, 그 속에서 빙긋 웃은 박휘성이 고요를 깨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시아야, 네가 내 마음을 모르는 척했다는 말. 그것도 사실 잘못된 말이야.”
“뭐…?”
“내가 처음 고백했을 때, 네가 했던 말. 너는 단순히 둘러댄 거라고 하겠지만, 그 말은 정확한 지적이었거든.”
또다시 들려온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깜빡였다. 내가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흐릿한 탓에,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이내 내 얼빠진 표정을 본 박휘성이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고백했을 때, 내게 나는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너한테 의존하고 싶을 뿐이라고 했잖아.”
“아.”
그래, 그랬었던 것 같긴 하네.
진짜 대충 둘러댄 말일 뿐이었는데, 역시나 박휘성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모양이었다.
괜히 밀려오는 죄책감에 얼굴을 굳히기도 잠시, 이내 또다시 박휘성의 말이 이어졌다.
“네 말대로 그때 나는 너를 좋아해서 고백한 게 아니었어. 그저 어머니를 대신할 사람을 찾고 싶을 뿐이었으니까.”
“….”
내 죄책감을 덜어주려는 듯한 내용. 그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눈을 피했다.
그 목소리 안에 품은 무거운 감정이 진하게 전해졌지만, 나는 그 감정에 응해줄 수 없었기에.
“하지만 지금은 달라. 시아야, 아까 내 감정을 모르는 척해서 미안하다고 했지?”
“…그래.”
“그러면, 이번엔 솔직하게 답해줬으면 해. 무조건 받아주는 걸 원하는 건 아니야. 그냥,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뿐이니까.”
그 뒤에 이어질 말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눈을 피했음에도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는 시선, 그리고 그 시선에서, 목소리에서, 태도에서, 박휘성은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나를 향한 열기를 드러내고 있었으니.
그리고 그를 입증하듯, 박휘성의 입에서 이미 두 번이나 들었던 말이 흘러나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시아야. 너를 좋아해.”
이미 예상한 말. 박휘성을 부를 때부터 대비했던 말이지만, 그 대비가 무색하게 부담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찬란한 금빛을 품은 눈. 마인이라는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났음을 증명하는 그 눈이, 따스한 온기를 품은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느껴진 감정에 말문이 막혔다.
이 세계에 빙의한 후가 아니라, 그전까지 포함해도 이 정도로 진지한 감정은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거절해야 하는 경험은 더욱 없었기에, 차마 거절의 대답을 입에 담기가 어려웠다.
지금 더 이상 박휘성에게 나쁜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기에, 더더욱.
애초에 원작 때문에 선입견을 품은 내가 일방적으로 편견을 드러냈을 뿐, 오히려 그는 좋은 사람이었으니까.타인을 위해, 나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을 정도로 좋은 사람.
그래, 신예화가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내가 악당으로 보였을 테니까.아니, 굳이 그쪽까지 가지 않더라도, 객관적으로만 봐도 여태 나는 박휘성에게 잘못을 저지른 게 맞았다.
그리고 그렇기에, 더는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솔직하게 답해달라는 말까지 들었음에도, 동정 따위로 대답을 유보하는 것은 박휘성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
생각을 마치고, 굳은 몸에서 힘을 풀었다. 나를 바라보는 금색의 눈을 가만히 마주하며, 두 눈에서 전해지는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긍정한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음은 고마워. 고맙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아.”
“역시….”
“응, 네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어. 미안.”
이미 내 대답을 예상한 듯 박휘성이 작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그 반응에 입맛이 씁쓸해지기도 잠시, 이내 박휘성이 말을 이었다.
“사과할 필요 없어, 시아야.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이건 그냥, 내 이기심이었으니까.”
그 자신은 이기심이라고 칭했지만, 그를 이기심으로 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애초에 자신의 고백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부터가, 내 부담을 최대한 줄여주려는 의도였으니.
또다시 밀려온 말로 정의하기 힘든 감정에 말을 잃은 순간이었다. 내 손을 양손으로 맞잡은 박휘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게 미안하다고 하지 말아줘. 오히려 나는 네가 내 말을 진지하게 고민해줬다는 게 고마우니까.”
“…응.”
그 말에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박휘성이 내게 부탁 하나를 건넸다.
“그래도 시아야. 혹시 무리가 아니라면, 하나만 부탁할 수 있을까?”
“부탁…? 뭘?”
“그냥, 하나만 기억해줬으면 해.”
미안함 속, 작은 의문이 비치는 내 시선을 마주한 박휘성이 눈꼬리를 휘어가며 웃었다.
거절당했음에도 전혀 상처를 티 내지 않는 그 태도에 또 말을 잃기도 잠시, 이내 박휘성의 말이 이어졌다.
“나를 선택해주는 것까지 바라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적어도, 네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 하나가 있다는 건 알아줬으면 해. 그것만으로 충분하니까.”
그 말이 끝나자 고요한 침묵이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침묵 속에서 가만히 대답을 고민했다.
그는 선택지라고 했지만, 내가 고를 일은 없을 터였다. 애초에 이 몸뚱이의 성별은 여성이라고 해도 내 정신까지 그런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저 기억해달라는 부탁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박휘성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대답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안해. 부담 주기는 싫었는데, 또 부담을 줘버렸네.”
그 말을 마친 박휘성이 이내 몸을 일으켰다. 묵묵히 그 움직임을 쫓아 시선을 옮겼다. 문으로 다가간 박휘성이, 이내 뒤돌아 내게 인사를 건넸다.
“다음에 또 보자. 이제 사관학교에선 못 보겠지만. 항상 잘 지내기를 바랄게.”
“…그래. 잘 가.”
마주 인사하는 것을 끝으로 이내 박휘성이 병실을 나섰다. 문이 다시 닫히고, 이내 서서히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씁쓸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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