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히로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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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의 말을 입에 담은 이도영이 묵묵히 유시아의 눈을 마주했다. 당황 섞인 시선이 담긴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담겨 있었다. 그 눈에서 쏟아지는 감정을 직시하며, 이도영이 속으로 작게 독백했다.
‘역시, 거절하겠지.’
후회가 남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그녀가 관계가 변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남기긴 했지만, 실제로 그 말처럼 둘 사이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일 리는 없었으니까.
그녀가 고백을 받아주건, 아니면 거절하건, 어떻게든 관계가 변하게 될 것이라는 건 필연적인 사실이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지금 그의 고백은 거절당할 확률이 더욱 높았다.
하지만 애초에 수락할 것을 기대하고 한 고백이 아니었기에, 그것이 이도영에게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만약 받아들여 준다면 기쁘기 그지없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상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거절은 각오한 일이었으므로.
지금 한 고백은, 그저 약간의 비용에 불과했으니까. 유시아가 말한 대로 그녀가 진정으로 미래를 알고 있고, 그 미래에 얽매여 있었다고 한다면, 그 머릿속에 자리잡은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데 필요한 비용.
그녀가 알고 있는 미래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 일. 그를 들이미는 건 자신이 그녀를 좋아할 리 없다는 고정관념을 부수는 데에 가장 큰 특효약이었다. 물론, 그 외에 다른 목적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방금 전, 미래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그녀가 드러낸 미묘한 불안, 그리고 죄책감. 늘 당당하던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목적은 매우 성공적으로 달성된 상태였다. 지금 그녀의 시선에서는 그러한 감정이 전혀 비치지 않고 있었으니까.
‘이걸 이이제이라고 해야 하나.’
그의 말에 의한 당혹감이 너무나도 큰 탓에, 그 감정을 모조리 잡아먹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게 이도영에게 좋은 일이냐고 하면, 아마 조금 애매하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지만.
물론 죄책감이 남아 있는 경우 그를 조금 불편하다고 느낄 수는 있었겠지만, 그건 그녀에게 고백한 지금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러한 어색함은 고백을 거절당하는 경우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고백을 입에 담은 이유는, 단순하기 짝이 없었다. 숨겼던 사실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으니, 자신 또한 숨겼던 마음을 고백함으로써 그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의도. 그 생각도 잠시, 이내 자신을 되돌아본 이도영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그게 아니지.’
사실 그가 고백을 입에 담은 이유는 그런 이타적인 이유가 아니었다. 가슴 속에서 흘러넘치는 감정, 질투라는 녹색 눈의 괴물을 제어하지 못한 일이었을 뿐. 그저, 유시아의 생각을 바꾼 대상이 박휘성이었다는 말이 부러웠을 뿐이었으니까.
자신이 아는 미래에선 박휘성의 생존은 존재하지 않는 일이었다는 말. 그 덕에 미래가 바뀌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는 말. 그 말이 부럽기 그지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고백을 입에 담았다. 유시아의 머릿속 박휘성이 차지한 공간을 덧칠해버리고 싶었으니까.
유시아가 다른 이를 떠올리는 것조차, 다른 이에 대해 고민하는 것조차 질투할 정도로 맛이 가버린 자신을 보며 이도영이 속으로 조소를 흘린 순간이었다.
한참 당황에 빠져 있던 유시아의 입에서 질문이 흘러나왔다.
“…언제부터…그랬던 거야?”
언제부터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었냐는 질문. 당혹감 가득한 목소리로 주어진 질문을 들은 이도영이 이내 답을 내뱉었다.
“글쎄, 정확히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는 잘 모르겠어.”
감정을 자각한 날은 기억하고 있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그런 감정을 품었냐는 질문에는 명쾌히 답할 수 없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어째서인지 나를 위해주는 행동에 의문을 가졌을 때, 나를 믿는다는 말에 묘한 기분이 들었을 때, 내가 도움이 된다는 말에 괜히 뿌듯함을 느꼈을 때, 체험 실습 도중 나타난 마인의 공격에서 구해졌을 때.
여러 시간대가, 여러 가지 사건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명쾌하게 어느 순간이라고 답할 수 없었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 그러한 감정을 품었냐는 질문 자체가 무의미한 질문일지도 몰랐다.
그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순간 생겨버린 감정은 점점 제 크기를 불리고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았던 감정이, 어느새 자신조차 휩쓸릴 정도로 막대하게 불어나 있었다.
그리고 이도영은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구르기 시작한 눈덩이처럼, 한 번 크기를 불리기 시작한 이 감정은 더는 사그라들 수 없다는 걸. 어제보다 오늘 더, 그리고 내일은 그 이상으로 커질 거라는 걸.
또다시 날뛰기 시작한 감정을 필사적으로 찍어 누른 이도영이 말을 골라냈다. 넘쳐흐르려는 감정을 최대한 정돈한 채, 담담히 고백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궁금할 뿐이었거든.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걸까. 왜 나를 그렇게 믿어주는 걸까. 그게 고마우면서도 궁금할 뿐이었어.”
“….”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궁금증의 이유가 바뀌기 시작하더라고. 처음에는 그저 호기심일 뿐이었는데, 점점 네가 무서워지기 시작했어.”
“무서워졌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유시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본 이도영이 작게 숨을 삼켰다. 자신을 바라보는 호기심 담긴 시선. 그 시선을 마주한 순간 심장이 다시 쿵쿵대기 시작했으니까.
단순히 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심장 위의 서클이 자극될 정도로 심장이 격하게 박동한다. 자칫하면 권능이 감정과 함께 흘러넘칠 것만 같았다. 그를 겨우 진정시킨 이도영이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응, 아까 말했듯이, 나는 네게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었으니까. 언제라도 네 마음이 바뀌는 순간, 네가 나를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어.”
한번 말을 꺼내자 그 뒤를 잇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신이 품은 감정을 투박하게 언어로 빚어 그녀에게 드러내 보였다.
가만히 경청하는 그녀의 모습에 또 일렁이는 감정의 고삐를 당기며, 차근차근 자신의 감정을 풀어냈다.
“처음엔 단순히 친구가, 은인이 떠난다는 게 두려운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 단순한 친구에게, 은인에게 이렇게 질척한 감정을 품을 리가 없으니까.”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격하게 맥동한다. 다른 이와 대화하는 걸 보기만 해도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다른 이를 생각할 때마다 괜한 질투심이 피어났다.
그 어느 때에도 냉정해야 하는 마법사에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격렬한 감정.
그 감정을 온전히 전한 이도영의 눈이 유시아에게 향했다. 자신의 말을 들은 유시아의 눈에서 동요가 느껴졌다. 흔들리는 시선 속에서 작게 비친 열기가 이내 당혹감에 덮여 사라졌다.
그리고 여전히 시선을 마주한 채, 이도영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네 말을 들었을 때 기뻤어. 너는 나를 이용한 거라고 말했지만, 오히려 나는, 내가 네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걸 확신시켜주는 느낌이었거든.”
“…아니, 나는….”
자신의 말을 들은 유시아가 뭐라고 답변하려는 걸 끊은 이도영이, 한 마디를 더했다.
“네가 나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그래도 돼. 아니, 오히려 그래 줬으면 좋겠어. 나는 네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기쁘니까.”
그러니까 자신에게 사과할 필요 없다는 말. 오히려 상황을 알면서도 갑작스럽게 고백한 자신이 미안하다는 말. 그 말을 입에 담은 이도영이 유시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
침묵이 흐르고, 고요한 정적 속에서 가만히 시선이 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유시아가 입을 열었다.
“…미안. 사과할 필요 없다고 했지만, 역시 사과해야 할 것 같네.”
박휘성에 관해 질문했을 때 지었던 표정과 같은 씁쓸한 표정. 그 얼굴을 본 이도영이 다음에 이어질 대답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예감을 입증하듯, 유시아의 말이 이어졌다. 거절의 말이었다.
“고백은 거절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냥, 친구일 뿐이니까. 그 이상은 안 될 것 같거든.”
그 말을 내뱉은 유시아가 미안하다는 듯 이도영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깃든 감정을 느낀 이도영이 마주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담았다. 대답을 예상했으면서도, 그 대답을 요구한 건 자신이었으니까.
“…그럼 이만 갈게.”
이야기를 마치고, 이내 유시아가 방을 나섰다. 아주 잠시 있었을 뿐인데, 유시아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어쩐지 허해 보이는 내부. 그 풍경을 보며 생각에 잠기기도 잠시, 이내 방금 나눈 대화를 떠올린 이도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원래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전혀 그런 감정이 없다고 해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만약 그렇다면, 더더욱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방금 전 고백을 입에 담았을 때, 유시아와 연결된 통로, 영혼 계약의 통로에서 아주 잠깐이지만 흘러들어온 감정. 찰나에 불과하지만, 분명히 유시아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느낀 순간, 이도영은 포기할 수 없었다. 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랬겠지만, 지금은 더더욱.
지금은 아주 작은 씨앗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조차 기대하지 않았던 그에게는 의외의 선물이었으니.
“….”
방금 느낀 그 감정을 되새긴 이도영이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은 여전히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 박동을 느낀 이도영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희망이 보인 이상,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이도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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