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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화 〉 히로인(2) (123/167)

〈 123화 〉 히로인(2)

* * *

고백을 거절한 뒤, 나는 멍하니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 들었던 말이 아직도 귀에서 맴도는 느낌이 들었다. 새하얘진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조차 제대로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머리를 가득 채운 당혹감이 한도를 넘어섰다. 짓씹듯 당황의 말을 중얼거리며 허공을 응시했다.

돈을 찍어 바른 침대는 편했지만, 그와 대조되게도 속은 전혀 편하지 않았다. 아직도 귓가에서 맴도는 이도영의 말을 떠올리며 생각에 잠겼다.

‘날 좋아한다고?’

진짜 이해가 안 가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음의 짐을 좀 덜려고 사실을 밝히려 한 건데, 짐을 덜기는커녕 껄끄러움만 수백 배로 늘어난 채 돌아왔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주변에 다른 여자들 많잖아. 왜 나야, 진짜?’

도무지 어이가 돌아오지 않는 상황에 속으로 푸념을 되뇌었다. 박휘성은 그렇다고 쳐도, 이도영 얘는 내게 이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주변에 여자가 없는 것도 아니고, 아는 여자만 해도 한가득인데. 그것도 능력이건 외모이건 하나 안 꿇리는 애들이.

‘아니, 그래도 외모는 내가 좀 더 낫긴 하지만.’

생각해보니 걔네는 순수 인간인데 이 몸뚱이는 하프라지만 엘프의 피가 섞였으니, 외모 자체는 내가 조금 더 낫긴 했다.

근데 그건 결국 취향 차 수준이고, 크게 유의미한 차이는 아니니까. 뭐, 그래도 아예 차이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능력도…솔직히 내가 더 중요하긴 하지?’

물론 김유진은 뒷배경이 빵빵하고, 이설화는 나보다 기본 전투력이 높고, 백소월은 검술을 가르쳐주는 둥 쓸 데가 많긴 했지만. 역시 영혼 계약 같은 걸 고려하면 가장 필요한 사람은 나였으니까.

‘아니, 그래도 그런 것 때문에 이럴 만큼 정신머리 없는 놈은 아니지….’

이도영이 외모와 능력 때문에 그럴 정도로 속물적인 놈은 아니었으니 이걸 고려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그 요소들을 제외한 채 성격으로 비교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도 한 번 성찰했던 것 같지만, 역시 내 성격은 딱히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정정한다. 솔직히 말해서, 좋은 편이 아닌 게 아니라 그냥 더러운 성격이었다. 여태 언행을 되돌아보면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신예화랑 아주 개판을 쳤으니.’

전에 한번 싸웠다고 해도 심정상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닌데, 그냥 욕을 박아버렸으니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내 성격이 좋은 편은 절대 아니었다.

그나마 요즘은 괜찮지만, 이도영이랑 계약하기 전까지는 숨도 제대로 못 쉬는 탓에 만년 스트레스가 넘치는 상태였던 걸 고려하면 더더욱. 그때는 내가 생각해도 거의 미친년 수준으로 날카로웠으니까.

그걸 실시간으로 겪은 게 이도영이랑 김유진인 걸 고려하면, 지금 이 상황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박휘성이야 나랑 자주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으니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 쳐도, 이도영은 옆에서 그러는 걸 전부 봤는데도 이러니 더 이상한 일이었다.

‘진짜 특이 취향이라도 있는 건가.’

박휘성도 그렇지만, 혹시 성격 나쁜 게 취향이라거나. 아니, 근데 그런 취향은 좀 변태 같은데.

“…아, 모르겠다.”

머리에 열이 올라 슬슬 지끈지끈 밀려오는 두통에 생각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됐건 간에, 도저히 예상치 못한 사태임은 틀림없었다. 원작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으니까.

‘애초에 원작에서는 히로인이랑 사귀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잖아.’

원작에 휘둘리지 않기로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원작에서 이렇게 엇나가는 건 좀 그렇지 않나? 다른 것도 아니고 주인공 성격인데.

물론 내가 개입한 이상, 어느 정도 비틀리는 건 이미 예상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큰 변화였다.

원작에서는 히로인들이 그렇게 달라붙을 때도 연애 감정은 전혀 품지 않았던 놈이, 아예 그를 뛰어넘어서 고백을 해버렸으니까.

‘애초에 내가 바꾼 게 얼마나 된다고.’

끽해야 친구 하나 늘려준 거 하고 정령 계약 덕에 원작에 비해 각성을 조금 더 깔끔하게 끝냈다는 차이 정도밖에….

“아, 잠깐만.”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이내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정령 계약 덕에 이도영이 깔끔하게 각성할 수 있었다는 건, 원작의 이도영은 각성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리고 정령 계약 당시, 영혼이 권능에 마모되고 있었다는 걸 고려하면, 원작의 이도영은 각성 이후 시한부가 되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영혼이 망가지고 있었다는 건, 마인이라는 예시와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다는 뜻.

물론 권능이 마기만큼 난폭한 힘은 아니니 영혼 자체의 마모 속도는 느렸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부작용은 있었을 터.

그리고 그런 부작용 중 가장 보기 쉬운 건, 감정의 폭주나 억제.

즉, 원작의 이도영이 히로인과 관계를 쌓거나 하는 일 없이 사이다패스처럼 행동한 건 사실 부작용의 일종일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부작용이 없지.’

계약 덕분에 그런 일은 원천봉쇄했으니까. 감정 없는 사이다패스 시한부라는 미래는 막아냈다는 거다.

그래, 참 좋은 일이었다. 부작용을 막았다는 것 자체는 참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긴 한데.

“그게 왜 하필 이렇게 돌아오냐고….”

그 탓에 연애세포가 살아난 이도영이 나한테 고백을 박아버린 게 문제지. 은혜를 원수로 갚아도 정도가 있지, 설마 고백으로 혼나게 될 줄은 진짜 몰랐다.

또다시 밀려온 난감함에 이마를 짚었다. 박휘성은 이제 얼굴 보기도 힘들 테니 그나마 나았지만, 이도영은 아니었으니까.

당장 내일 아침부터 다시 얼굴을 맞대야 하는 데다, 봉인이나 마나 회복 같은 걸 고려하면 그럴 때마다 어색해서 죽을 게 뻔했다.

뻔히 보이는 미래에 가만히 베개에 얼굴을 박은 채 또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한참을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른 결과, 어느 정도 행동 방향을 결정할 수 있었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아예 이도영을 떼어내거나 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내가 이도영과 떨어질 수 없는 몸이기도 했지만, 겨우 이런 것 때문에 어색해지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그래도 이 세계에서 사귄 첫 친구, 아니 두 번째 친구이기도 하고, 당분간 같이 사는 객식구 동지기도 하니까.

‘그리고 어차피 같이 다닐 수밖에 없기도 하니, 뭐.’

사관학교가 다시 정상적으로 개학해서 기숙사로 돌아가봤자 어차피 학교에서 같이 다녀야 하는 건 마찬가지였으니, 결국 피할 수 없이 찾아올 어색함을 최대한 빨리 털어내는 게 상책이었다.

‘일단 그냥 없었던 일인 척 해야겠지….’

확실하게 거절 의사는 밝혔으니까, 포기하지 않는다고 해도 성격상 대놓고 들이대진 않을 거다. 내가 난감해할 걸 뻔히 알면서 그럴 놈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아예 포기해준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를 확신할 수밖에 없는 근거가 있었다.

‘개 같은 계약 같으니….’

고백의 말을 들었을 때, 이도영과 연결된 통로에서 갑작스럽게 이도영의 감정이 흘러 들어왔으니까. 그때 잠시간 말을 내뱉지도 못할 정도로, 짙은 감정이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웠었다.

‘정령술에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정확히 말하면 부작용보다는 원래 기능에 가까웠다. 정령술 수준이 높아질수록, 영혼 결속이 강해지는 건 필연이었으니까.

즉, 오늘처럼 당혹스러운 사고가 벌어진 이유는, 박휘성을 구할 때 체화한 정령술이 결국 감정을 공유하는 정도까지 이른 탓이었다.

아무튼 그 덕에 느낀 감정을 되새겨보면, 이도영이 쉽게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가벼운 감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가볍기는커녕 순간 내가 휩쓸릴 정도로 강렬한 감정이었으니까. 고작 몇 달 만에 쌓은 감정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짙은 감정이었다.

­두근

“…젠장.”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자마자 다시 뛰기 시작한 심장에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느낀 충격이 너무 강렬한 탓에 아무래도 부작용이 생긴 모양이었다. 요란하게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것도 어떻게든 해야겠지.’

어느 정도 긴장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이 정도로 심하게 반응하는 건 좀 과했다. 물론 꽤 충격적인 일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반응할 만한 건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이런 반응은 대놓고 ‘나 신경 쓰고 있다’라는 표현이기도 했으니, 지쳐서 포기하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이런 떡밥을 던져 줄 수는 없었다.

물론 단순히 충격이 과한 탓에 생긴 부작용이니까. 차츰차츰 충격이 가시면 사라질 테니 심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이유로 심장이 뛰었다는 건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심장이 제 박자를 되찾자마자 잠시 떠오른 가정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우스갯소리도 못 되는 농담이었다.

“뭐, 아무튼 방향은 대충 정해졌나.”

행동 방향 자체는 정해졌다. 대충 두 글자로 다시 요약하자면 철벽이었다. 속되게 말해, 지쳐서 나가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방법이었다.

‘그거 말고도 다른 방법은…. 역시 애매하네.’

김유진이나 다른 원작 히로인을 이용하는 방법도 생각은 해봤지만, 내가 티 안 나게 둘을 엮을 만한 대인관계 능력이 있을 리가 없었으니 퇴출.

물론 다급해지면 혹시 모르겠지만, 지금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예의도 아니니까, 그건.’

받아줄 수는 없으니 거절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그런 기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그리고 엮는다면 지금 가장 확률이 높은 게 김유진인데. 걔네 둘이 엮이면 내가 곤란해지잖아.

자고로 커플 사이에 낀 외톨이 한 명이 제일 고통받는 건 국룰이거늘.

그런데 내가 굳이 그런 눈꼴 신 일을 자초한다? 당연히 그럴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김유진은 딱히 이도영한테 그런 감정도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순간이었다. 연이어 떠오른 의문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근데 진짜 아무 감정 없는 거 맞나?’

상식적으로 아무 감정 없는 이성을, 아무리 친구라지만 제집에서 재울 수가 있나?

음, 어째 이건 좀 더 확인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친구라고 해도 이성인데, 아무리 집이 크다고 해도 그런 제안을 하는 건 역시 좀 묘하긴 하지?

뭐, 그래도 그게 지금 할 일은 아니었다. 생각을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대충 방향을 정하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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