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히로인(3)
* * *
다음 날 아침. 알람에 맞춰 몸을 일으켰다. 어제 있었던 일 탓에 잠을 꽤 설쳤지만, 그래도 딱히 몸에 피로감이 남거나 하진 않았다.
뭐, 일단 초인이라 이거지.
아예 밤을 새워도 하루 정도는 끄떡없을 텐데, 하물며 밤을 새운 것도 아니고 조금 설친 정도였으니. 그 정도로 피곤을 느낄 리는 없었다.
물론 그건 몸뚱이 얘기고, 정신적인 피로는 또 다른 영역이었지만. 그래도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어느 정도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 들기는 했다.
이내 일어나 몸을 적당히 정돈한 뒤, 가만히 침대에 다시 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보다 오늘부터는 뭘 해야 하나.’
아예 놀 수는 없었다. 얘네 집에서 지낼 때야 안전하겠지만. 그렇다고 천년만년 여기서 뻐길 수는 없었으니까.
사관학교가 다시 문을 열면 결국 기숙사로 돌아가게 될 텐데, 한 번 뚫린 곳이 두 번 뚫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적들도 있으니.’
원작을 기준으로 한다면 아직 등장까지 꽤 시간이 남아있긴 했지만, 이미 원작이 뒤틀려버린 이상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후반부의 미쳐버린 파워 밸런스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시간은 없었다.
물론 이 몸이 가진 한계라고 해봐야 A+의 궁술이니, 그게 후반부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터였다.
‘그럼 일단 수련인가.’
저번에 한 번 고민했던 대로, 궁술을 최대한 빨리 끌어올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일단 전력에 직접적으로 보탬이 되지 않는 정령술보다는 궁술이 훨씬 나았으니까.
그리고 정령술을 수련하려면, 필연적으로 이도영과 붙어 있을 필요가 있는데, 그건 아직 좀 곤란했다.
‘마나 회복도 껄끄러운데, 지금.’
마나 회복을 넘어서 정령술 수련까지 한다? 그건 무리였다. 당장 오늘 마나 회복할 생각만 해도 난감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뭐, 다행히도 어제 대화를 나누면서 부족했던 마나까지 모조리 회복한 덕분에, 오늘 아침부터 이도영과 몸을 맞댈 필요는 없었지만.
몸을 맞댄다고 하니 어째 어감이 이상하지만, 손을 잡거나 하는 얘기다.
그리고 또 하나. 정령술의 랭크가 올라간 탓에 어제 그 곤란한 일을 겪었는데, 여기서 또 정령술의 수준을 올린다? 내게 그럴 깡은 없었다.
물론 경지가 올라가면 나아질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악화될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이도영의 감정이 넘쳐흐를 때 그게 내게 아주 조금 새어 들어오는 정도지만, 혹시라도 흘러들어오는 감정의 빈도나 양이 더 늘어난다면, 솔직히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생각을 마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제 김유진이 아침 먹으러 가자고 한 시간이 거의 다가오고 있었다.
뭐, 식사를 굳이 같이해야 하냐 할 수도 있지만, 집주인이 먹을 때 같이 먹는 게 예의기도 하고, 솔직히 혼자 식당에서 밥 달라고 할 자신이 없기도 했다.
그런 잡다한 생각을 하며 문을 연 순간이었다. 이내 어제 나를 참 곤란하게 한 장본인의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반짝이는 녹색의 머리카락과 눈이 인상적인 미남. 그래, 이도영이었다.
“….”
급격히 어색해진 분위기. 갑작스러운 마주침에 당황한 나와는 달리 이도영은 태연한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딱 마주친 걸 보면 아예 날 기다린 모양이었다. 하기야 어제 저녁과는 달리 아침을 따로 먹을 리가 없으니, 당연히 나랑 같이 가려고 하겠지만.
그런 간단한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멍청한 내 머리에 탄식하기도 잠시, 이도영을 보자마자 이내 어제의 기억이 오버랩되기 시작했다.
이도영에게서 밀려왔던 감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기억. 그때의 그 감정을 떠올린 순간 다시 밀려오는 긴장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
“….”
돌처럼 딱딱히 굳은 몸속에서 긴장으로 두근거리는 심박수만이 느껴졌다. 철벽을 치려고 했지, 철벽이 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뇌가 명령을 잘못 내린 모양이었다.
당황한 머리에 온갖 헛소리가 떠오르던 도중이었다. 나를 바라보던 이도영이 웃음을 지었다.
그 예상치 못한 미소에 멍한 시선을 보내기도 잠시, 이내 이도영이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 시아야. 어제는 잘 잤어?”
단순한 아침 인사. 어제의 그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도영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 건은 묻으려는 모양이었다. 그에 급하게 입을 연 순간이었다.
“그…으.”
아, 삑사리났다.
자고 일어난 탓에 목이 잠긴 데다가, 하필 긴장한 상태에서 다급하게 말을 내뱉은 탓이었다.
평소처럼 말하기는커녕 끼이익 하고 올라가 버린 음정. 그를 자각한 순간 밀려온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아, 젠장….’
쪽팔림도 쪽팔림이었지만, 지금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철벽 컨셉으로 가려고 했는데, 철벽은 개뿔. 아주 의식하고 있다는 티는 다 내고 있었으니까.
물론 당연히 그런 쪽으로 의식하는 건 아니었지만, 얘가 그걸 구분하겠냐고.
황급히 목을 가다듬은 뒤, 방금 전 실수를 덮어씌우듯 입을 열었다.
“그, 그래. 너는 잘 잤어?”
“응, 덕분에 푹 잤어.”
‘덕분에는 뭔 소리야?’
뭐, 내 덕분에 푹 잤다는 건가? 고백을 거절당해서 푹 잤다? 무슨 반어법이라도 되는 건가? 아니, 말하는 걸 보면 비꼬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설마 고백을 거절당했다고 비꼴 정도로 인성이 돼먹지 않은 놈은 아니기도 했고, 애초에 어감도 그런 쪽은 아니었으니, 방금 말이 반어법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고백을 까여놓고 푹 잤다는 건 또 이상하잖아. 상식적으로 고백을 거절당했으면 좀 실의에 차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는 꼴을 보면 또 기분이 이상할 것 같긴 하지만.
‘…뭐, 나야 가벼운 고백이었으면 좋긴 한데….’
아니, 정정한다. 가벼운 감정으로 고백한다고 딱히 좋진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지금처럼 당혹감을 느끼는 걸 넘어서 아예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진지한 고백이라면 받아줄 수는 없어도 최소한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대충 찔러 보기로 고백하는 건 불쾌하기 짝이 없었을 테니까.
뭐, 그래도 그때 느꼈던 감정을 곱씹어보면 도저히 그런 가벼운 고백은 아니었으니, 그런 가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아주 진심이 가득 담기다 못해 흘러넘치고 있었으니까. 감정 꽉 찬 돌직구면 돌직구였지, 찔러 보기일 리가 없었다.
‘아니, 그럼 뭔 소리야. 대체?’
아무리 생각해도 맞물리지 않는 대답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이도영의 얼굴을 보자 생각 뒤로 작게 짜증이 올라왔다. 아주 얼굴에서 광이 나고 있었으니까.
나는 지 고백 때문에 잠도 설쳤는데, 정작 당사자는 아주 잘 잔 모양이었다. 얼굴 때깔이 얼마나 좋은지, 아주 빛이 날 정도로.
뭐, 원래도 꽤 잘생긴 편이었고, 각성한 뒤로 검술 수련을 시작하면서 하루하루 더 얼굴에 각이 잡히고 있었으니, 딱히 잠을 잘 잔 탓은 아니겠지만.
물론 그렇다고 짜증이 가시지는 않았다. 이도영의 얼굴을 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애초에 얘가 잘생기건 말건 나랑 뭔 상관이야.’
아니, 그래도 못생긴 것보단 잘생긴 게 낫긴 하지. 그래, 얼굴은 그렇다 치자.
하지만 다른 사실 하나는 여전히 좀 불쾌했다. 어느새 이도영의 키가 나보다 커져 있었으니까.
하기야 각성하고 난 지 꽤 시간이 흘렀으니, 슬슬 클 때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얘를 올려봐야 한다는 건 자존심상 좀 그랬다.
그리고 저번에 확인했듯이 몸에 근육도 꽤 붙었던 걸 보면, 누가 주인공 아니라고 할까 봐, 아주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지어 아직 완전히 각이 잡힌 것도 아닌데, 벌써 여자 깨나 울릴 외모인 걸 보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두려울 수준이었다.
‘그 얼굴을 가지고 하필 나한테 이러고 있는 게 문제지만.’
어째 미묘해진 기분에 눈가를 살짝 좁힌 순간이었다.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이 불편한 듯, 이도영이 얼굴을 긁적였다.
그 반응을 보고서야 정신이 들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
컨셉이 아예 박살이 나든 말든, 아무 생각 없이 외모나 구경하고 있었으니. 참 멍청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뭐, 잘생기긴 했지만, 남자가 잘생기건 말건 내 알 바는 아니잖아.
잡생각도 잠시, 이내 머리를 굴려 빠르게 대책을 떠올렸다. 이미 망한 컨셉이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어떻게든 되살려야 했다.
생각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그, 가자. 유진이 기다리겠다.”
그리 좋은 화제 전환은 아니었지만, 일단 상황에 맞는 말이긴 했다. 곧 약속한 시각이긴 했으니까.
애써 당황을 숨기고 발걸음을 옮기는 시늉을 보인 순간이었다. 귓가에 이도영의 말이 들려왔다.
“응. 그런데 시아야, 그전에 한마디만 해도 될까?”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자, 따스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도영의 얼굴이 보였다.
그에게서 쏘아지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이내 이어지는 이도영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 어제 일을 신경 쓰고 있다면, 안 그래도 돼. 대답은 이미 해줬으니까.”
역시 티가 난 모양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아니, 방금까지 그래놓고 티 안 나길 바라는 게 도둑놈 심보긴 하지만. 아주 신경 쓰고 있다고 광고를 하고 있었으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그 말에 긍정할 수는 없었다. 이미 금이 갈 대로 간 컨셉. 아니, 금이 갈 것도 없이 조형조차 못 한 컨셉이지만 자존심 때문이라도 긍정할 수는 없었다.
“응, 미안. 내가 이상한 소리를 했네.”
그리고 그런 내 대답을 들은 이도영이 알겠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었다.
최대한 맞춰주겠다는 태도. 분명 고맙다고 해야 하는 태도였지만, 저렇게 나오니까 오히려 더 쪽팔렸다.
‘젠장…’
또다시 붉어지려는 얼굴을 최대한 억눌렀다. 여기서 또 그렇게 반응하면 삼진 아웃이었다. 겨우겨우 얼굴을 진정시킨 뒤, 이도영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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