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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5화 〉 히로인(4) (125/167)

〈 125화 〉 히로인(4)

* * *

1층으로 향하자 김유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이도영이 같이 내려오는 걸 본 김유진의 눈이 잠시 반짝였다. 살짝 움찔하려는 몸을 겨우 숨기자마자 김유진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

“그래.”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근처를 둘러보았다. 예상과는 달리 김유진 말고 다른 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김시우 말이다.

“아버님은?”

“먼저 가 계신다고 하셨어.”

아무래도 김시우는 식당에 먼저 가 있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그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이내 김유진이 나와 이도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뭔가를 눈치챈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그 반응에 애써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뭐해?”

“그냥, 잘 잤나 해서.”

“잘 잤어. 방 좋더라.”

실제로는 제대로 못 잤지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내 칭찬을 들은 김유진이 포슬포슬 웃었다. 그에 한숨을 돌리기도 잠시, 이내 이도영을 바라보았다.

“….”

다행히도 이도영도 딱히 티를 낼 생각은 없는 듯, 평소와 다른 태도를 보이지는 않고 있었다.

그를 확인하자마자 또 시선이 마주하기 전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을 때 제대로 평소처럼 행동하려면, 아무래도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제 가자. 아버님 기다리시겠다.”

말을 마친 뒤 발을 내디뎠다. 식당이 어디 있는지는 어제 이미 가봤으니 알고 있었다.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내 뒤를 김유진과 이도영이 따랐다.

*

다행히도 이동하는 동안 별일이 일어나거나 하진 않았다. 식당에 도착하자 이내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우리를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는 김시우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그래.”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식당 안에는 다시 침묵이 맴돌았다. 조금 어색한 분위기이긴 했지만 뭐, 이 정도는 그리 신경 쓰이는 정도는 아니었다.

쪼르르 달려가 제 아버지 곁에 앉은 김유진을 흘깃 바라보며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 순간이었다.

­드르륵

“자.”

먼저 테이블에 앉은 이도영이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주었다. 그에 잠시 이도영을 바라보았다.

“….”

뭐, 사실 낯설거나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하다면 익숙한 편이었다.

사관학교에서 식사할 때마다, 내가 음식을 들고 가면 옆에서 이도영이 미리 의자를 꺼내줬으니까.

애초에 사관학교의 테이블은 4인용이었고 그 탓에 나는 항상 이도영의 옆자리에 앉았으니까, 그런 배려에 딱히 뭐라고 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맙다고 했지.

그때는 그냥 성격상 친절한 건 줄 알아서 그냥 넘겼던 거였다. 편하기도 해서 굳이 하지 말라고 할 생각이 없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고백을 듣고 난 지금은 그때의 내가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아, 젠장.’

어제 그런 일이 없었다면 맘 편하게 그냥 앉았을 텐데, 하필 그런 일이 있던 다음 날이라 그런지 더럽게 신경 쓰였다. 괜히 옆자리에 앉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울 정도였으니까.

‘그러고 보니 계약 이후엔 굳이 같이 앉을 필요도 없었잖아….’

이미 습관화되어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같이 앉았었는데, 지금 되돌아보니 굳이 옆자리에 앉을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밥 먹으면서 손을 잡거나 할 것도 아니고, 식사 중 신체 접촉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전에는 가까울수록 마나 회복이 빨랐으니 그렇다 쳐도, 지금은 굳이 같이 앉을 필요가 없었다. 뒤늦은 깨달음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내 본래 주제로 사고가 회귀했다.

‘그리고 애초에 지금은 자리도 많잖아.’

사관학교와는 달리 지금 테이블의 크기는 꽤 컸다. 그리고 그 크기에 걸맞게 자리도 넉넉했다.

즉, 자리를 충분히 떨어져 앉아도 전혀 상관없다는 뜻이었다. 방금 이도영이 의자를 꺼내기 전까지만 해도 실제로 그럴 생각이기도 했고.

‘이러면 꼼짝없이 옆에 앉아야 하잖아.’

아예 이런 일이 없었던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미 앉으라고 의자를 빼 주기까지 했는데. 여기서 사양하고 다른 곳에 앉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무슨 일이 있었다는 걸 대놓고 눈치챌 만한 행동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넙죽 앉기에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고백을 듣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고백을 들어버린 상황이었으니,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내 낯짝이 그리 두껍지 못했다.

“…?”

그렇게 잠시 굳어 있는 채로, 팽팽하게 머리를 굴리던 순간이었다. 나를 바라보던 김유진의 시선에 약간의 의문이 섞이고 있었다.

그 눈빛을 본 순간,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걸음을 옮겼다.

“고마워.”

평소 사관학교에서 했던 것처럼 짤막하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옆자리에 앉았다. 괜히 신경 쓰이는 기색을 최대한 감추며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그 상태로 눈을 굴려 흘깃 이도영을 바라보자, 뭐가 그리 좋은지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당했네….’

아니, 사실 노리고 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해준 걸지도….

‘그럴 리가 있냐.’

아무리 곰 같은 놈이라고 해도 고백한 다음 날에 이러는 게 노리고 한 일이 아닐 리가 없었다. 김유진 입장에서 봤을 때는 전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이라는 게 더욱더 악질이었다.

‘곰 같은 놈인 줄 알았는데….’

곰이 아니라 여우였던 모양이었다. 괜히 치미는 짜증에 눈을 부라리려던 도중, 김유진을 떠올리며 참아내고 눈을 돌렸다. 속에서 은근하게 끓는 열을 애써 삭히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러기도 잠시, 이내 한숨 소리가 들리진 않았나 은근슬쩍 김유진의 눈치를 살피던 순간이었다. 이내 옆자리에서 예상치 못한 시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시우의 시선이었다.

“…꽤 친한 모양이군.”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로 이쪽을 향해 날아온 질문. 김유진의 시선에 정신이 팔려서 잊고 있었지만, 이곳에는 김시우도 있었다.

그리고 질문에 황급히 입을 열려던 순간, 듣기 좋은 미성의 중저음이 내 말을 가로챘다.

“예. 많이 친합니다. 항상 고마운 친구기도 하고요.”

태연하게 질문에 대답하는 이도영의 모습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친구라는 말에 괜히 조금 안심하기도 잠시, 이내 지끈지끈 두통이 밀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아, 진짜 돌겠네.’

김유진이야 학기 초부터 사정을 알고 있었으니, 이러거나 말거나 오해할 일은 없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솔직히 조금 묘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앉을 자리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굳이 둘이 달라붙어 앉아 있는 꼴은.

물론 원래는 오해하거나 말거나 아무 신경 안 썼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고백을 들었다는 사실이 내게 급격히 껄끄러움을 선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이미 망해도 한참 망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철벽이라는 컨셉은 지켜야 했으니까. 이건 내 최후의 자존심이나 다름없었다.

옆자리에서 태연히 내 칭찬을 입에 담고 있는 이도영의 모습에 괜히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식사를 이어갔다.

그리고 식사를 다 마친 순간, 슬슬 김시우와 이도영이 둘이서 사라질 시각이 되어가고 있던 때였다. 내게 김시우가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군. 딸아이와 친하게 지내 주어서 고맙네. 편하게 있다 가게나.”

“아, 예. 저야말로 신세를 지게 되어 감사합니다.”

“그래.”

대충 쓸데없는 말이 몇 차례 오가고, 잠시 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김시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활을 쓴다고 했나? 흐음….”

“예.”

그러고 보니 이 양반은 내가 정령술을 쓰는 것만 봤을 테니, 새삼 활이라는 말이 낯설기는 할 테였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생각을 마친 김시우가 입을 열었다.

“따로 활만 수련하는 곳으로 설치한 곳은 없지만, 유진이가 원거리 마법을 수련하는 곳이 하나 있네. 혹시라도 수련할 생각이 있다면 마음껏 써도 상관없네.”

오, 다행이다.

궁술 수련을 목적으로 설치한 곳은 아니지만, 궁술을 수련하는 용도로는 쓸 만한 수련장이 있다는 말에 황급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정말 다행히도 집 안에서 놀기만 하진 않을 듯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내가 말해주려고 했는데!’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유진을 바라본 김시우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인지 모를 테니, 유진이가 안내해주도록 하렴.”

여태까지 무뚝뚝하던 말투와는 달리 애정 가득한 목소리. 그 말을 들은 김유진이 고개를 파닥파닥 끄덕였다. 그에 온화한 미소를 지은 김시우가 말을 이었다.

“그래, 착하구나.”

그렇게 말하며 김유진의 머리를 쓰다듬는 김시우의 모습에 작게 호기심 섞인 시선을 보냈다. 빙의 전에도, 그 이후에도 나는 겪어본 적 없는 경험이었기에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이도영 쪽을 흘깃 흘겨보았다. 따뜻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이도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

뭐, 저쪽과는 조금 케이스가 다르지만, 이도영 또한 부모님이 없는 건 나와 마찬가지였다.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설정. 아니, 과거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에 미묘한 동질감을 느끼기도 잠시, 이내 내 시선을 눈치챈 듯 이쪽으로 향하는 시선에 황급히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 쳐다보지도 못하겠네.’

하마터면 눈 마주칠 뻔했잖아.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

­쐐애액!

쏘아낸 화살이 과녁에 명중한 걸 확인한 뒤 활을 내려놓았다. 마나는 아직 꽤 남아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조금 피로했다.

잠시 연습을 쉬고 자리에 앉기도 잠시, 이내 휴식을 시작한 내 옆자리에 김유진이 다가와 앉았다.

“수련 끝났어?”

“아니, 잠시 쉬는 중.”

“아하. 시아, 요즘 되게 열심히 수련하네.”

“뭐, 필요하니까.”

그렇게 말하는 김유진도 빡세게 수련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나보다 더 강도가 높았다.

하기야 시스템의 보조를 받는 나와는 달리 김유진은 순수하게 노력으로 실력을 쌓았을 테니, 그 실력을 쌓을 때까지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을지는 감히 내가 추측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냐.”

새삼스러운 눈길로 김유진을 바라보자, 김유진이 푸스스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그에 대충 말끝을 돌린 순간이었다. 눈을 반짝인 김유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시아야. 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돼?”

“뭐, 상관없긴 한데. 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이내 물어보라며 대충 대답을 건넸다. 그 말을 들은 김유진이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으음, 그러니까아….”

괜히 진지한 척하는 얼굴도 잠시, 이내 다시 흥미진진한 미소를 지은 김유진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에 빨리 질문하라며 재촉을 입에 담으려던 순간, 이내 김유진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을 듣자마자 내 얼굴이 당황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혹시 도영이랑 무슨 일 있었어?”

아, 젠장.

아무래도 눈치챈 모양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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