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히로인(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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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황한 기색을 필사적으로 숨기고 답변을 고민했다. 사실 그대로 답하면 되지 않냐 싶겠지만, 그걸 듣고 난 후의 반응을 예측하기 힘들었으니까. 얘가 이도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는 지금은 더더욱.
‘애초에 말하기 좀 그런 화제기도 하고.’
아예 고백을 기억 속에 묻어버리려고 노력하는 중인 상황에서, 그 사실을 굳이 까발리는 건 그리 내키지 않았다.
뭐, 말이야 묻어버린다지만, 지금 처한 상황도 그렇고, 아까 전까지 행동하던 것도 그렇고, 어쩔 수 없이 더럽게 신경 쓰이긴 했다. 알아챈 걸 보면 역시 티도 풀풀 나는 모양이고.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사실을 밝히기엔 조금 고민이 남아 있었다.
애초에 김유진이 알아봐야 딱히 해결될 일도 아니고, 저번에 잠시 떠올렸던 가능성도 아직 머릿속 한구석에 남아 있었으니까. 원작 히로인 플래그라는 가능성이.
원작에 휘둘린 탓에 그렇게 판단한 건 아니었다. 여태 그런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도 이해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의심 가는 점이 하나 있었다.
‘엄밀히 따지면 이것도 동거잖아?’
물론 집 크기를 보면 통상적으로 의미하는 동거랑은 뜻이 백만 광년은 떨어져 있었지만, 아무튼 한집에서 사는 건 맞으니까. 그것도 외간 남자를 초대해서.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 아마.’
아니, 뭐. 순수한 호의일 확률이 제일 크긴 했다. 애초에 그런 감정이 있었다면 나랑 이도영을 붙여서 배정하지도 않았겠지. 아니, 아예 나를 초대하지도 않았겠지.
‘그건 또 아닌가?’
이도영만 부르는 건 부자연스러워서 어쩔 수 없었던 걸지도. 별 쓸데없는 음모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김유진의 눈을 보자마자 자괴감에 휩싸였다. 투명한 시선에선 두둑한 호기심과 약간의 걱정만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그래, 쟤가 그럴 성격은 아니긴 한데….’
괜한 의심을 했다는 사실에 속으로 미안해하던 도중이었다. 이내 그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억이 떠올랐다. 솔직히 내가 그렇게 말하는 건 꽤 우스운 일이었으니까.
‘애초에 그런 쪽으로 생각하면 내가 더하면 더했지.’
김유진이야 집에 남아도는 방을 하나 내어줬을 뿐이지만 나는 저번에 아예 집에 초대까지 했으니까.
물론 그때는 그런 감정은 터럭조차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건 내 입장이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할수록 내가 뭐라고 할 자격은 없었다.
그래, 적어도 김유진은 이도영이랑 같은 침대는 안 썼을 테니까.
‘젠장.’
그 기억을 떠올린 순간, 수치심이 무럭무럭 피어나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 당시보다 더 쪽팔린 느낌이었다.
그때는 원초적인 민망함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그냥 같은 침대에서 잤다는 게 조금 그랬을 뿐. 정작 이도영이 나를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건 몰랐던 때였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그때는 그 해프닝도 해프닝이지만, 까딱하면 내가 걔를 죽일 뻔했다는 게 신경 쓰여서 그 해프닝을 오래 곱씹을 새도 없었고.
그리고 그때 그렇게 기억 속에 묻혔던 해프닝을 지금 다시 떠올린 순간, 같이 묻혔던 수치심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아, 미치겠네.’
언제부터 이도영이 내게 그런 감정을 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말을 들어보면 아마 꽤 오래된 듯했으니까. 그 감정의 크기에 차이는 있어도, 감정의 태동 자체는 꽤 이를 거라는 건 짐작할 만했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 그때 그 상황은 생각보다 더 민망한 상황이었다는 뜻이었다. 그때 이도영이 보인 반응을 다시 떠올린 순간, 머리가 급격히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진짜, 이건 좀 아니긴 하네….’
아무리 자기합리화를 돌리려고 해도, 도저히 돌아가지 않는 수준의 행동이었다. 그때 이도영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도 하기 힘들었다.
그래, 내 잘못이 크다. 젠장.
그리고 그 순간, 결국 수치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붉어진 내 얼굴을 본 김유진이 쐐기를 박듯 입을 열었다.
“역시, 무슨 일 있었구나?”
표정 관리를 하기는커녕 아예 광고를 하지 못해 안달 난 수준이었으니, 들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다만 억울한 하나 게 있다면, 지금 이 반응은 어제 있었던 일 때문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물론 어제 내가 고백으로 혼나지만 않았으면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 거라는 걸 고려했을 때, 부분적으로 이유가 될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게 메인은 아니었으니까.
의미 없는 억울함을 느끼기도 잠시, 이내 생각을 마쳤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을 포기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멘탈이 슬슬 한계에 달하고 있는 탓이었다.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
이 상황에서 변명할 말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애초에 변명하기엔 이미 타이밍이 한참 늦어도 늦었으니까. 방금 질문에선 침묵 자체가 긍정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므로.
“그래…. 있었다….”
차마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뱉어내며, 붉어진 얼굴을 모른 척한 채 겨우겨우 설명을 시작했다.
*
“고백했다고? 도영이가?”
“어.”
결국 불어버렸다.
그래, 사실 오래 감출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설마 하루도 안 지나서 들켜버릴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내 연기력은 내 생각보다 더 허접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설명하는 내내 밀려든 수치심으로 다시 피가 몰린 내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김유진이 한 번 더 쐐기를 박았다.
“진짜?”
“…그래.”
그래, 그러니까 제발 그만 물어봐.
더는 버티기 힘들 것 같은 기분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롱초롱 빛나는 김유진의 눈을 마주할 때마다 정신력이 훅 깎여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애초에 고백을 받았던 상황을 내 입으로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좀 버티기 힘든 일이었다. 그걸 입에 담을 때마다 머릿속에 다시 어제의 상황이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방금까지 생각하던 화제까지 그에 가세해서 내 정신을 후드려 패고 있었다. 여전히 반짝이는 눈으로 쏘아내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뭐, 그래도 김유진의 반응은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아주 재미있어하는 듯한 태도라든지, 흥미가 철철 넘치는 시선이라든지, 그런 걸 생각하면 뭐가 나쁘지 않으냐는 말이 절로 나오긴 하지만, 적어도 질투 같은 감정은 전혀 비치지 않고 있었으니까.
‘얘가 연기를 하고 있을 리는 없고.’
일단 참고자료로써 사용하자면, 원작에서도 그런 성격은 전혀 아니었다. 그렇긴커녕 오히려 생각하는 게 그대로 얼굴에 비치는 타입이었다.
뭐, 이건 내가 여태 느낀 김유진이란 인물상이랑 딱히 다르지도 않았으니, 원작에 휘둘리는 판단도 아니었다.
순수하게 흥미가 깃든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선. 그 시선이 살짝 부담스러워져 슬슬 눈을 피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든 생각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혹시라도 뭐, 이도영에게 그런 감정이 있거나 하진 않을까 생각하긴 했는데. 반응을 보면 개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입이 근질근질한 표정으로 보아하니, 더 캐지 못해 안달이 났으면 안달이 났지.
뭐, 그 덕에 걱정하던 일은 진짜로 괜한 걱정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김유진이 이도영에게 그런 감정을 품고 있었다면, 역시 좀 어색해질 수밖에 없으니 조금 걱정하긴 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 세계에 와서 사귄 첫 친구기도 하고, 그래도 정도 꽤 들었는데 이런 일로 멀어지고 싶진 않았다. 다행히도 이제 확실히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 생각에 긴장을 조금 풀며 어제 일에 관한 설명을 이어갔다.
고백을 거절했다는 말. 그리고 그 탓에 오늘 조금 신경이 쓰인 거라는 말. 그 말을 들은 김유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거절했다고?”
“응.”
“왜?”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한 목소리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짤막하게 답을 내뱉었다.
“그냥, 싫으니까.”
그러기도 잠시, 어째 말하고 보니 이상한 것 같아 황급히 뒤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걔가 싫은 건 아닌데,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서.”
“…없다고? 진짜?”
“어.”
당연하지. 그럴 리가 있겠냐고.
뭐, 고백받은 이후엔 어쩔 수 없이 그쪽으로 잠시 생각의 방향이 향하긴 했지만, 그건 백곰 효과 때문이니까. 흔히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더 생각난다는 그거 말이다.
아무튼 그 탓에 오늘 잠시 그쪽으로 생각이 튀었을 뿐이지, 그전에는 이도영을 이성으로 의식하거나 한 적은 없었다. 당연하지만, 했을 리가 없었다. 그래야 했다.
그러한 믿음이 담긴 즉답을 들은 김유진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마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 그를 본 순간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저번에 김유진이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 눈가를 좁혔다.
‘아직도 그 오해가 안 풀렸나 보네.’
내가 이도영을 좋아하지 않냐는 질문.
분명 그때 단호하게 부정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제대로 귀담아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된 거, 이참에 그 뿌리 깊은 오해를 뽑아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다시 설득의 말을 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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