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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화 〉 고민(1) (127/167)

〈 127화 〉 고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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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말을 수차례 반복한 결과, 어떻게든 김유진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뭐, 어째 이해한 시늉일 뿐인 듯도 하지만, 이 이상 뭐라고 하기엔 내가 피곤했다.

어색해진 분위기도 잠시, 이내 다시 수련을 시작했다. 그러자 확연히 늘어나기 시작하는 궁술 실력에 조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뭐, 처음엔 굳이 수련할 필요까지 있나 싶긴 했지만.’

여태 궁술이나 정령술을 체화시킨 경험을 되새겨 보면, 굳이 수련할 필요 없이, 스킬 랭크를 끌어올린 채 유지하기만 해도 어느 정도 체화는 가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내가 굳이 수련을 하게 된 이유는 명약관화했다. 시간당, 그리고 마나 소모당 효율 때문이었다.

‘역시 수련하는 게 더 효율이 높아. 애초에 가만히 있기엔 마나가 아깝기도 하고.’

단순히 스킬을 지속해서 사용하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 신체에 경험은 남는다. 그리고 지닌 실력보다 높은 수준의 궁술을 체감할 수 있다는 건, 다른 이들에겐 충분히 기연이라고 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재능이 없는 현대인에 불과했으니, 발전을 위해서는 더욱 효율적인 수련을 추구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수련에서, 스킬을 계속 유지하는 건 낭비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너무 높은 수준의 랭크를 적용하는 것도 낭비였다.

지금 내 실력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 수련을 위해서라면 그 정도만 적용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쐐액!

스킬을 적용하기 전보다 훨씬 날카로운 기세로 날아가는 화살. 그 화살을 쏘는 움직임에 집중한 뒤 시스템을 해제했다. 완벽하던 자세가 조금 불안정해지는 걸 느끼며 의식적으로 방금 전 자세를 되새겼다.

아까 전 느꼈던 근육의 움직임, 날숨과 들숨의 타이밍, 적절한 수준의 긴장.

그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다시 움직이자, 방금처럼 완벽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발전한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얼추 나아진 자세에 만족하며 다시 화살을 쏘아냈다.

­쐐애액!

스킬을 적용했을 때보단 못하지만, 그 전에 비해 확연히 나아진 솜씨.

활에 대한 재능은 딱 일반인 수준이고, 딱히 이전에는 활을 잡아본 적도 없던 나였지만, 이제는 시스템이 아니어도 충분히 뛰어난 궁수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뭐, 이런 수련을 하는데 누가 못 늘겠냐마는.’

그 어떤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아도 이 정도의 효율은 나올 수가 없다. 시스템을 적용했을 때와 비교하면, 자기가 뭘 잘못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단순히 잘못된 자세를 아는 것을 넘어서,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해설지까지 친절하게 몇 번이고 직접 경험할 수 있으니, 실력이 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생각보다 더 성장이 빠르네. 이 추세대로라면 2학기 들어설 시점이면 궁술은 완벽하게 마스터하겠는데.’

뭐, 계속해서 수련을 이어간다는 전제 하의 이야기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말이 되지 않는 성장세였다.

원작 후반부에서는 의미가 없는 정도의 실력이라고 하지만, A+ 수준의 경지는 그렇게 만만한 경지는 아니었으니까.

실제로 S랭크 수준의 실력자는 나름 영웅 강국이라는 한국에도 5명밖에 존재하지 않으니. A+의 실력이라는 건, 그 다섯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에게는 꿀릴 일이 없다는 말이었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다섯이 아니라 여섯이지만.’

잠깐 S랭크 실력자들의 분포를 살펴보면, 정부 측에 하나, 대형 길드에 넷이 나뉘어 속해 있다.

그리고 넷 중 둘은 같은 길드 소속이니, 까딱하면 정부가 길드에 도리어 집어 삼켜질 수도 있는 구도였다.

그런데도 정부가 길드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고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건, 단 한 명 덕분이었다.

딱히 적극적으로 세력을 형성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실력만으로 나라 전체를 짓누를 실력을 갖춘 존재. 그의 존재만으로 괜히 짓눌린 길드들이 알아서 자제하고 있는 형국이었으니까.

뭐, 그 정체는 내게는 퍽 익숙한 이름이었다. 내 첫 친구의 아버지이자 지금 신세를 지고 있는 상대, 김시우가 바로 그 대상이었으니까.

잠시 이야기가 삼천포로 샜지만, 말을 정리하자면 A+에 달하는 실력은 그만큼 대단한 경지라는 뜻이었다. 사관학교 1학년들에게 상대하라고 하기엔 미안할 정도로.

애초에 이도영이나 다른 원작의 히로인 같은 재능충들도 2학년은 되고 나서야 다다른 경지였으니 당연한 이야기이긴 했다. 아직 백소월도 다다르지 못한 상황이었으니까.

‘뭐, 그래도 걔는 최대한 길게 잡아도 이번 해 안에는 닿겠지만.’

그리고 이도영의 성장세 또한 원작보다 빠르니, 아마 이도영도 원작보다 일찍 그 수준에 이를 것 같았다.

뭐, 검과 마법을 병행한다는 특징을 고려하면 실질적인 전투력으로 맞먹는 건 더 빠를 수도 있고.

‘…그러면 길게 잡아 2년, 짧으면 1년 반 정도인가.’

그 후면 아마 내가 파워 밸런스의 선두에 서긴 힘들어지겠지. 물론 아예 바로 퇴물이 되거나 하는 건 아니다. 적어도 비슷한 실력일 때까지는 어느 정도 활약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다른 이들이 내 이상의 실력을 갖추게 되는 시점부터는 역시 더는 도움이 되긴 힘들 것이다.

아직 한국 내부에서는 무소불위에 가까운 실력이라고 하나, 결국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면 전력이 되진 못할 테니까. 뭐, 후반부에는 A+랭크 수준의 실력자는 우후죽순 나오기도 하고.

즉, 정리하자면 나는 언젠가 이야기의 흐름에서 이탈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이내 조금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뭐. 예전에는 그게 목적이었던 적도 있었다.

그리 먼 옛날도 아니었다. 적당히 원작에 개입해서 방향을 좋게 바꾼 다음, 원작 주인공 일행에게 맡기고 나는 유유자적 방관한다. 그런 생각을 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도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생각했지. 더는 내가 도움이 되지 않는 시점에서, 굳이 내가 이도영과 같이 다닐 필요는 없으니까.

실력이 떨어지는 동료는 결국 짐 덩이에 불과하므로, 그쯤 되면 내가 빠져주는 게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면 위험에 빠질 일이 없다는 점에서 생존을 목적으로 하는 내 입장에서도 좋은 일이었고. 윈윈이라면 윈윈일 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생각을 하면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예상보다 더 정이 들어버린 탓이었다.

다른 이들이, 친구들이 선두를 달릴 때 나 혼자 뒤처져 있어야 한다는 건 조금 우울한 일이었으니까.

­콰아앙!

그렇게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도중이었다. 옆자리에서 들려온 폭음에 시선을 돌렸다. 김유진이 수련 도중 마법을 쏘아낸 모양이었다.

이전에 겨뤘을 때보다 현격히 상승한 마법의 위력. 그리고 위력 뿐만 아니라 시전 속도나 정밀도 또한 대단히 늘어나 있었다. 그 빠른 성장에 작게 감탄을 흘렸다.

‘벌써 저 정도인가.’

시스템의 보조를 받아 수련하는 나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에 버금갈 정도로 대단한 성장. 원작에 비해도 한참 더 빠른 성장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분명 기뻐해야 할 일임에도 조금 미묘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더 빠를지도 모르겠네.’

1년에서 2년을 잡았지만, 더 빠르게 따라 잡힐지도 모른다. 김유진이 저 정도인데, 다른 이들이라고 놀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애초에 내가 수련에 박차를 가해야 하겠다고 생각한 사관학교 습격이 다른 이들에게도 계기가 되지 않을 리는 없었다. 원작대로라면 조금 쉬엄쉬엄 수련했을 이들도, 경각심을 더 열심히 수련하고 있을 테니까.

사관학교 테러 자체는 끔찍한 사고였지만, 그 영향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고 있었다. 생도들의, 주인공 일행의 실력이 더욱 빠르게 늘어난다는 방향 말이다.

그리고 한계가 분명히 정해진 나와는 달리, 다른 이들은 충분히 내 이상으로 강해질 수 있었다. 이 영향으로 인해 높아진 수련 강도는 그 시기를 더 앞당길 터이고.

그렇다면 그 시기에 이르게 된 순간, 더는 내가 뭘 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나보다 한참 강해진 이들에게 더 이상 내 조력은 필요 없어질 테니까.

물론 정령술이라는 예외가 있긴 하지만. 봉인이야 다른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고, 굳이 같이 다닐 필요는 없으니까.

정령술의 버프 효과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전투력이 너무 떨어지는 이를 데리고 다니는 건 전투력 면에서 득보다 실이 큰 일이고.

뭐, 이렇게 말은 해도 벌써부터 멀어질 걱정을 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성장 속도가 더 빨라진 걸 고려해도, 아직 따라 잡힐 걱정을 하기엔 일렀으니까.

하지만 언젠가 떨어질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걸 떠올리면, 역시 조금 기분이 처지긴 했다.

전부 과하게 정이 들어버린 게 문제였다. 그러지만 않았다면 성장하는 걸 보며 온전히 기뻐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성장이 더 늦어지거나 하는 걸 바라진 않았다. 더욱 빨리 성장할수록, 결국 내가 정을 붙인 이들이 다치거나 위험해질 확률이 낮아질 테니까. 목적을 헷갈릴 정도로 내가 멍청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가만히 생각에 잠기기도 잠시, 이내 피식 속으로 내게 비웃음을 흘리며 다시 활을 들었다.

‘좀 할 만하니까 별 궁상을 다 떠네.’

벌써 고민하기엔 이르기도 한참 이른 일이었다. 그리고 뭐, 떨어진다고 해도 사이가 꼭 멀어지는 건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고민을 머리 한구석에 치워버린 뒤, 다시 수련을 재개했다.

하지만 경쾌하게 쇄도하는 화살과는 달리, 약간 남은 답답함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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