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 고민(2)
* * *
잡념을 떨쳐내려 더욱 수련에 매진했지만, 완전히 묻어버릴 수는 없었다. 뭐, 그래도 막 떠올렸을 때보단 한참 나아졌다. 우울에는 운동이 제격이라 했던가. 꽤 맞는 말이었다.
활을 내리고 힐끗 시선을 돌려 잔여 마나를 확인했다. 깨작깨작 아껴서 사용한 덕에 아직 마나는 꽤 남아있는 상태.
슬슬 수련을 마칠 시각이었으니, 이대로 가면 마나가 꽤 많이 남을 듯했다.
‘굳이 다 쓸 필요는 없지만….’
또 안 쓸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마나는 이도영이 돌아왔을 때 다시 가득 채울 예정이니, 굳이 남겨두는 것도 낭비이기도 하고.
‘차라리 빨리 써버리는 게 낫겠다.’
고랭크를 적용하면 확실히 남는 양도 꽤 되니, 차라리 한 번에 써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잠시 숨을 들이마신 뒤, 여태 최대한 낮춰서 적용했던 궁술 랭크를 단숨에 최대한 높였다.
“….”
순식간에 손에 제 몸처럼 달라붙는 활대의 감각을 느끼며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에 마나를 가득 불어넣은 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를 놓았다.
쐐애액!
여태 쏘아냈던 것과는 소리부터 달랐다. 난폭한 기세로 쏘아진 화살이 과녁을 향해 쇄도했다. 단단한 과녁을 마치 두부처럼 꿰뚫은 화살을 본 후,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뭐, 나쁘진 않네.’
마지막에 쏜 화살에 힘을 가득 담은 덕분인지, 꽤 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상쾌한 시선으로 과녁을 바라보며 활을 내려놓자 이내 김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아야, 끝났어?”
“어.”
흐른 땀을 목에 걸어 둔 수건으로 훔친 뒤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저녁 식사를 할 시간이었다. 다만, 어제 저녁과 마찬가지로 식사를 하는 인원은 나와 김유진뿐이었다.
‘이도영은 저녁 식사를 하고 온다고 했으니까.’
어제는 내가 집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일찍 온 거지. 원래는 저녁 늦게야 들어온다고. 그 덕분에 저녁 식사까지는 이도영을 마주하는 걸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뭐, 그래봐야 어차피 저녁 식사 이후엔 보겠지만.
어차피 마나를 회복하려면 마주할 필요가 있었으니, 결국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미묘하게 술렁이는 감정에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아직 이도영을 평소처럼 대하는 건 조금 무리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다시 생각에 빠지려던 찰나, 김유진의 말이 귓가에 다시 파고들었다.
“시아야?”
“…아, 아. 그래.”
“뭐해? 가만히 서서?”
잠시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그걸 또 캐치한 모양이었다. 혹시 많이 피곤하냐며 걱정하는 김유진에게 고개를 저어 대답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진짜 괜찮은 거 맞지?”
“어, 그냥 잠시 딴생각을 해서 그래.”
“딴생각…. 응, 괜찮다면 다행이네.”
그 말을 들은 김유진이 잠시 내게 묘한 시선을 보냈다. 뭐, 금세 평소의 김유진으로 돌아왔지만.
이내 걸음을 옮기던 도중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김유진에게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식당으로 향했다.
*
식사하는 동안, 딱히 별다른 이야기가 나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이도영과 관련된 화제는 불편할 거라고 생각한 듯, 김유진이 관련된 화제를 피해서 말한 덕이었다.
뭐, 쓸데없는 배려라고 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꽤 도움이 되는 배려였다.
확실히 아직 이도영과 관련된 이야기는 조금 부담스러웠으니까. 고백도 고백이지만, 수련 도중 궁상을 떨었던 것도 있어서 더더욱.
그래, 결국 거리감의 문제였다.
이도영이 바라는 일만큼 가까워지는 건 무리지만, 그렇다고 아예 멀어지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실력 관련해서는, 단순히 관계를 넘어서 자존심까지 엮여 있었다.
‘솔직히 괜히 지는 것 같잖아.’
실력이 딸리는 탓에 빠져야 한다는 건, 자존심에 꽤 스크래치였으니까. 심지어 지금은 내가 앞서고 있는 형국이니 더더욱.
물론 그렇다면 시스템을 이용하는 건 괜찮냐 싶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아니, 애초에 다른 놈들은 전부 어릴 때부터 수련을 시작했는데, 나는 빙의하기 전까지 활을 잡아본 적도 없잖아. 당연히 시스템 정도는 있어야지.
그렇게 장난삼아 자기합리화를 되뇌던 도중, 끝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직접 되돌아보면 꽤 우스운 모습이었으니까.
“에라이.”
분명 얼마 전까지는 이 정도로 철면피는 아니었는데, 어느새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었다. 그에 혼자 웃으며 고개를 저어 잡생각을 털어냈다.
‘그러고 보니 슬슬 올 때가 된 거 같은데. 문자도 왔고.’
마나 회복을 위해 이도영과 약속을 잡아 뒀는데, 곧 시간이었다. 그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저벅저벅
타이밍 참 기막히게도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이도영이었다.
“시아야, 있어?”
“어, 지금 나가.”
그 말을 내뱉은 뒤 앉은 몸을 일으켰다.
어제와는 달리,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마나 회복을 할 생각은 없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얼굴을 맞대기에는 아직 좀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문을 열어 이도영을 마주하자마자, 밀려온 어색함에 한참을 침묵했다. 그렇게 시선만이 오가기도 잠시, 이내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가자.”
내가 들어도 퍽 퉁명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어째 그 말을 들은 이도영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천연덕스럽게 이도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내할게.”
부정적인 감정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 얼굴에 괜히 복잡한 기분이 든 순간이었다. 이도영이 옅은 미소를 걸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 다시 떠오르려는 기억. 어제의 기억이 떠오를까 황급히 눈을 피했다.
“….”
볼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이도영을 따라 옆에서 걸었다. 좀 떨어진 채로.
*
한참 이도영을 따라간 끝에 도착한 장소는 작은 테라스였다.
이미 해는 제 모습을 감춘 지 오래지만, 달빛이 꽤 밝은 덕에 그리 어둡진 않았다.
뭐, 사실 조명 덕이 더 크지만, 달빛 덕분이라고 하는 게 더 운치 있으니 정정하진 않겠다.
‘…운치 있어서 뭐하냐, 근데?’
분위기고 뭐이고 간에, 지금 나는 어째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다.
테라스에 비치된 원형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은 채, 우리 둘은 입을 꾹 닫고 침묵에 잠겨 있었다.
뭐, 용건은 이미 메시지로 전부 설명했으니 사실 딱히 대화를 나누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아까 마나 회복 때문에 부른 거라고 말했으니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내가 지금 평소처럼 행동할 깡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예 아무 말도 안 하면 신경 쓰는 것 같고.’
그렇다고 뭐라고 내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기엔 내가 지금 딱히 꺼낼 화제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어색해서 눈도 못 마주치는데, 무슨 말을 하겠냐고.
아무튼 그래서 나는 지금 꽤 난처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굳이 문자를 쓰자면 사면초가, 신조어로 말하자면 가불기였다.
여기서 우스운 점은, 내가 이러고 있는 게 오히려 더 신경 쓰는 티를 내는 행동이라는 점이었다.
이쯤 되면 어제 정한 행동 방향 자체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었지만, 자존심상 무르기에도 좀 그랬다. 딱히 다른 방법이 생각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이 삼천포로 빠지려던 순간, 갑작스레 나를 바라보던 이도영이 입을 열었다.
“예쁘네.”
“…뭐?”
갑작스러운 일격에 허를 얻어맞은 표정을 지은 순간이었다. 내 얼굴을 본 이도영이 이내 손가락을 들어 테라스 바깥을 가리켰다.
“…?”
그에 당황하며 그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이내 절경이라 할 만한 풍경이 시야에 가득 담겼다. 눈에 비친 광경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예쁘네.”
“응, 오늘 보름달이 뜬다고 했거든. 그래서 그런지 더 예쁜 것 같아.”
뭐, 그 말 대로 확실히 괜찮은 풍경이었다. 잠시 바깥 경치를 바라보며 감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이내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도영과 눈이 마주쳤다.
“….”
다시 밀려오기 시작한 어색함에 고개를 숙였다. 또다시 나와 이도영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이도영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자.”
마나 회복을 재촉하듯 내민 손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색하긴 하지만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감사의 말을 전한 뒤 이도영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 고마워.”
손을 잡자마자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맞닿은 피부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그리고 그와 함께 흘러 들어오는 마나.
마나 회복이라는 행위가 주는 편안함에 빠진 채, 이내 고개 숙인 시야에 담긴 손을 바라보았다. 분명 꽤 오래전부터 한 행동이었지만, 어째 오늘은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의문이 떠오른 지 얼마 후,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내 손과 마주 잡은 이도영의 손이 꽤 변해 있는 탓이었다.
‘손, 꽤 커졌네.’
분명 각성 직후에는 마법사다운 말랑말랑한 손이었는데, 이제는 곳곳에 굳은살이 박혀 딱딱한 느낌이 있었다. 그뿐 아니라 손 자체의 크기도 꽤 커져 있었고.
‘…성장했다는 건가.’
하기야 이미 키도 어느새 나를 한참 추월한 상태였으니,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멈춰 있던 성장이 시작된 지도 꽤 됐으니까.
물론 아직도 그 차이가 익숙하진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직 마냥 신기했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수련 도중 떠올랐던 그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기 시작했다. 신체도 신체지만, 이도영의 실력 또한 무서울 정도로 성장하고 있을 테니까.
아니, 오히려 실력 향상 속도에 비하면, 몸이 자라난 속도는 비교조차 되지 못할 거다. 안 그래도 재능 덩어리인 놈이, 지금은 대마법사에게 직접 가르침까지 받고 있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내가 한참 우세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완전한 각성, 엘릭서, 대마법사의 개인 교습. 전부 원작에서는 없거나 잠깐에 불과한 일이었으니까. 지금 이도영의 성장 속도는 원작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 플러스 요소가 많았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실력이 느는 속도는 원작보다 빠르면 빨랐지, 느리진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떨쳐냈다고 생각한 답답함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멍청하게 뭐 하는 짓이냐.’
괜한 자괴감에 속으로 자학의 말을 내뱉었다. 혼자 지지리 궁상은 다 떨고 있었으니, 참 한심한 꼴이었다.
그렇게 한참 불편한 감정에 시달리던 도중이었다. 이도영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미안해.”
“…뭐가?”
갑작스러운 사과.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이도영을 바라보았다. 뜬금없는 말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리고 내 되물음을 들은 이도영이 말을 이었다.
“고백 말이야. 네가 나를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색해지기 싫어서 오늘 괜히 모르는 척 행동했거든.”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이도영이 그렇게 대답했다. 아니, 뭐. 그 행동에 담긴 의도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갑자기 이 이야기가 나온 이유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이도영의 말을 더 듣자, 이내 얘가 왜 갑자기 이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네가 이 정도로 불편해할 줄 알았으면, 그러지 말 걸 그랬어. 내 욕심 탓에, 괜한 짓을 해버렸네.”
“불편이라고…?’
“응. 불편.”
불편한 기색이 은연중 새어 나갔다. 그 말을 들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직후, 그렇지 않다는 직감이 들었다.
겨우 그 정도라고 하기엔, 지금 연결을 통해 느껴지는 미안함의 크기가 과했다. 그리고 또 갑작스러웠다.
아침에는 전혀 이러지 않다가 지금 갑자기, 고작 그런 불편한 기색 하나로 이렇게까지 미안해한다는 건 솔직히 확률이 낮은 가설이었다.
그리고 그 대신 원인으로 짐작할 만한 게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당장 지금 내가 이렇게 판단하는 근거이기도 했으니까.
감정공유. 아무래도 이게 단방향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정령술은 쌍방 연결이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내가 방금 느낀 감정. 그 감정이 흘러 들었다면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 생각이 떠오른 순간, 이내 다시 당혹감이 밀려왔다.
‘아니, 근데 내가 그런 건 고백 때문이 아닌데.’
고백이 조금 부담스러웠던 건 맞지만 지금 내가 기분이 나빠졌던 건 그 이유 탓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 이도영은 지금 성대하게 헛다리를 짚은 셈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다시 이도영의 말이 이어졌다.
“오늘 난감하게 해서 미안해.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마나 회복도…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정정하려던 움직임도 잠시, 이내 귓가에 들려온 말에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다른 방법? 어떻게?”
“어딘가에 특성을 담거나 해서 전해주면 될 테니까. 봉인의 안정화는…김시우 님께 부탁드리면 어떻게든 되겠지.”
꽤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혹할 만한 이야기기도 했다. 굳이 어색하게 얼굴을 마주할 필요 없이 마나를 회복할 수 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달콤한 말에 설득된 순간, 이내 내게 흘러 들어온 감정에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을 넘어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감정. 그 진심 어린 미안함을 체감한 순간, 차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뭐, 애초에 받아들일 생각도 없었고.’
결국 이 제안은 아예 얼굴을 맞대지 말자는 뜻이었으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잠시 어색함을 피하고자 아예 관계가 멀어지는 길을 택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결정을 내린 순간, 이도영이 마지막이라는 듯 말을 전해왔다.
“방은…내가 유진이에게 옮겨 달라고 부탁할게.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 시아야.”
씁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이도영이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 위에서 맞잡은 손이 뒤로 빠지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순간, 떨어지려는 손을 꽉 잡은 채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
“…응?”
당황스러운 시선이 마주 잡은 손으로 꽂혔다가, 이내 내 얼굴로 향했다. 떨리는 눈동자가 내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순간 느껴진 불안 섞인 기대를 마주한 채,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고백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러지 마.”
마주 잡은 손이 강하게 쥐어지는 걸 느끼며, 담담한 눈으로 이도영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