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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4화 〉 해결책(3) (134/167)

〈 134화 〉 해결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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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학교 습격 직후, 올림포스 심처.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헤르메스가 눈을 떴다. 현재 황금의자에 유폐된 자신에게 접근할 이는 많지 않았기에, 그를 특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익숙한 기척에, 그 주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디오니소스.”

“오랜만입니다, 형님!”

흑발을 길게 기르고 황소의 것처럼 굵은 뿔이 머리에 솟아난 미청년,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쾌활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본 헤르메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용건만 말하도록.”

친근감이 가득 담긴 인사에도 불구하고 헤르메스의 얼굴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그 차가운 반응에 섭섭하다는 듯, 흑발의 미청년이 너스레를 떨었다.

“거참, 오랜만에 보는 아우에게 너무 쌀쌀맞은 거 아닙니까?”

어깨를 으쓱한 디오니소스가 과장되게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무감정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헤르메스가 싸늘하게 읊조렸다.

“네놈이 진짜 내 아우였다면 그랬겠지.”

그 말을 들은 순간, 생글생글 웃던 디오니소스의 얼굴이 정지화면처럼 완전히 굳었다. 그 상태로 헤르메스를 향한 디오니소스가 이내 히죽 웃었다. 방금과는 완전히 다른, 불쾌하기 짝이 없는 웃음이었다.

“아, 이런. 들켰네?”

그 말을 내뱉은 디오니소스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표정이었지만, 방금 행동 탓에 조롱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행동. 하지만 그 조롱에도 불구하고, 헤르메스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쯧, 재미가 없어. 원래는 안 그랬는데 말이야.”

잠시 후, 질렸다는 듯 혀를 찬 디오니소스의 몸이 꾸물텅 녹아내렸다. 마치 진흙처럼 녹아내린 피부에 이내 주글주글한 주름이 잡혔다. 그를 가만히 관조하던 헤르메스가 경멸을 담아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악취미군, 로키.”

녹아내린 사내의 몸이 다시금 변한 모습, 챙 넓은 모자를 쓴 애꾸눈의 노인. 그 외형을 한 줄로 평한 헤르메스에게 노인, 로키가 경박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글쎄, 악취미는 아니지. 내 형제의 모습을 빌리는 데 문제라도 있나?”

“그래, 오딘을 죽음으로 몰아간 게 사실상 네놈 자신이라는 것만 빼면 문제는 없지.”

무감정한 어조로 쏘아진 비난을 들은 노인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능글맞기 짝이 없는 웃음. 중후한 외모의 노인에게는 그리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 기괴함을 주고 있었다.

“뭐, 그건 반박할 수가 없지만, 어차피 그쪽도 비슷한 계획을 짜고 있지 않나?”

거기까지 말하고 고개를 으쓱한 노인이 이내 말을 이었다.

“하기야 나처럼 한때 유폐된 것까지 똑같긴 하네. 그래도 나는 목적을 이뤘으니, 따지자면 너는 나를 존경해야지, 안 그래?”

“네놈이 진짜 목적을 이뤘다면, 지금 내게 이런 농담을 하고 있진 않았겠지.”

조롱 섞인 말에도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헤르메스가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리고 잠시 후, 이내 불쾌감을 떨쳐내고 씨익 웃은 노인이 입을 열었다.

“아, 됐어. 시답지 않은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본론만 말하자고.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말이야.”

“…부탁?”

예상치 못한 요구를 들은 헤르메스의 시선에 약간의 감정이 담겼다. 미약하게 의문이 담긴 시선을 받으며 여유작작하게 고개를 끄덕인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래, 부탁. 예언을 좀 해줬으면 해서 말이야.”

“예언이라, 그렇다면 차라리 아폴론을 찾아가는 것이 나을 것을. 나는 예언에는 그리 정통하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글쎄, ‘헤르메스’라면 그렇겠지.”

의미심장하기 짝이 없는 말. 그 말을 들은 헤르메스의 얼굴이 작게 굳었다. 처음으로 변한 그의 표정에 노인이 키득,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웃음을 흘렸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냐?”

“글쎄, 시간의 신을 먹어 치웠으니 예언 정도는 쉽지 않냐는 말이면 충분할까? 그걸로 모자라면, 내 형제의 힘 부스러기까지? 하하, 욕심도 많으셔라.”

토트의 힘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설마 오딘의 힘을 일부 가져간 사실마저 들켰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허를 찔린 일격에 헤르메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한참 후, 작게 한숨을 내쉰 헤르메스가 로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걸 밝히면서까지 내게 예언을 부탁할 필요가 있나? 그쪽, 그 모습의 주인이 가지고 있던 힘도 있을 텐데.”

“아, 그건 이미 확인해 봤어. 눈여겨보던 게 있었는데, 이미 누가 써버렸지 뭐야?”

“뭐라고…?”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헤르메스를 보며, 로키가 피식 웃었다.

“설마 내 본진을 확인해 보지도 않았을까? 오딘의 눈, 처음엔 이걸 쓰려고 했는데. 아쉽게도 이건 더 못 써. 이미 누가 예언하는데 썼으니까.”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 상도덕이 없는 놈이라며 로키가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잠시 생각에 잠겼던 헤르메스가 놀랍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건 몰랐군.”

그렇다면 로키가 자신에게 예언을 요구하러 올 이유는 충분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린 헤르메스가 이내 말을 이었다.

“그래, 내게 예언을 요청할 이유는 충분하군. 하지만 내가 그를 들어줄 필요는 없지, 안 그런가?”

토트의 힘을 들킨 건 유감이지만, 그 사실로 로키가 그를 협박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토트의 힘을 끌어올리는 순간, 자신을 향한 경계 태세가 극도로 상승하는 건 매한가지일 테니, 차라리 힘을 아끼는 쪽이 그나마 나은 선택이므로.

그 말을 들은 로키가 안타깝다는 듯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온 로키가 대답을 입에 담았다.

“음, 그쪽이 내 형제의 힘도 일부 훔쳐 갔으니, 그걸 대가로 하는 건 안 되나? 시간의 신으로 모자라서 우리 쪽 주신의 힘까지 가져가다니, 조금 적선하는 게 어때?”

“그를 계산에 넣고 싶다면 내 형제, 디오니소스의 거죽부터 벗고 말하도록.”

씨알도 먹히지 않는 헛소리. 그에 차갑게 대꾸하는 헤르메스의 모습에 로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안 될 걸 알았다는 듯 너스레를 떨기도 잠시, 이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로키가 다시 제안을 건넸다.

“뭐, 이건 패스하도록 하지. 어디, 그러면 이번엔 이건 어때? 요새 그쪽이 눈여겨보는 인간이 하나 있던 것 같은데.”

그 말을 내뱉은 순간, 헤르메스가 처음으로 당황한 낯빛을 내비쳤다. 그 반응에 손가락을 가볍게 튕긴 로키가 빙고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이건 생각할 여지가 있는 모양이네?”

비꼬는 말투를 흘려넘긴 헤르메스가 로키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생각을 마친 헤르메스가 마치 씹어뱉듯 말을 내뱉었다.

“…마인이 계약을 맺은 대상이 너였군.”

“이왕이면 에인헤리(Einheri)라고 해줬으면 좋겠는데. 내 형제의 유산이거든. 그래서 어쩔 거야?”

라그나로크에 대비하여 오딘이 모은 전사단을 부르는 명칭, 에인헤랴르(Einherier). 유감스럽게도 그 권능이 라그나로크를 일으킨 주범의 손에 들어갔다.

그 역설적인 상황에 작게 탄식을 내뱉은 헤르메스가 졌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 좋다. 아무래도 내가 진 모양이군. 목적대로 해주도록 하지.”

“이거 참, 이리 쉬울 줄은 몰랐는데. 의외로 그 여자, 잭팟이었던 모양이네?”

사실상 패배를 선언하는 말. 그에 비아냥거리는 로키를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한 헤르메스가 힘을 끌어올렸다.

그의 몸을 묶었던 황금의자의 사슬이 투드득 끊어지고, 이내 헤르메스의 눈동자에 시계 초침이 그려졌다. 찬란한 금빛을 내뿜으며, 헤르메스가 로키에게 말했다.

“미래를 보게 되는 순간, 그 미래가 고정된다는 사실 정도는 이해하고 있겠지? 뭘 원하나.”

“아, 알아. 알아. 쓸데없는 얘기는 스킵하자고.”

미래를 보는 것 자체가 이미 폭력이고 약탈이라는 어느 시인의 비유처럼, 예언하는 순간 그 미래는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다. 그 운명론적인 이야기에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은 로키가 이내 목적을 입에 담았다.

“천마신교, 그쪽도 무슨 단체인지는 알고 있겠지? 그들이 목적을 이뤘는지 확인해 주면 돼.”

“…흠.”

작게 침음성을 흘린 헤르메스의 눈에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째깍째깍 돌아가는 시계 초침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잠시 후, 헤르메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결과를 입에 담았다.

“유감이지만 보이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계의 힘이 개입한 모양이군.”

“으음, 그래?”

미래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전혀 실망하지 않은 표정. 오히려 싱글 웃어 보이는 로키에게 헤르메스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애초에 원한 게 이것이었나?”

“맞아,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성공한 모양이네.”

“뭐, 그 따위 것은 어찌 됐건 상관없다. 약속한 말은 지키도록.”

“아, 그래. 그쪽이 눈여겨보고 있는 인간은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그럼 고생하라고.”

그렇게 말한 로키의 모습이 한 번 더 녹아내렸다. 주름졌던 피부가 다시 탱탱해지고, 외눈이었던 눈이 녹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어느새 허리춤까지 길게 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유시아의 외형을 취한 로키가 조롱하듯 말을 이었다.

“조만간 다시 봐요. 라그나로크가 일어나면 그쪽도 풀려나게 될 테니까.”

“….”

더는 어울리기도 싫다는 듯, 아예 눈을 감아버린 헤르메스의 몸이 황금의자에 다시 묶이는 걸 바라보며 키득 웃은 로키가 걸음을 옮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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