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나들이(2)
* * *
도저히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던 시간도 차츰 흘러가고, 이내 떨어져도 좋다는 김시우의 말이 들려왔다. 그 말을 듣자마자 손을 바로 떼어낸 뒤, 한 걸음 뒤로 떨어졌다.
피가 쏠린 탓에 붉어진 얼굴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여전히 가시지 않은 수치심에 화끈거리는 피부. 그 감정을 가득 실어 이도영을 노려보았다.
“….”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있지만, 여전히 채 다 숨기지 못한 안색. 여전히 귀엽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마주하자 더 눈을 부라릴 수 없었다. 항의의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고개를 돌린 방향에 있는 김시우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결국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에 섞인 흥미롭다는 감정. 겨우 진정시킨 부끄러움을 다시 촉발하는 그 눈빛에,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기도 잠시, 이내 충분히 놀렸다는 듯, 김시우가 화제를 돌렸다. 달라진 분위기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흐음, 그래. 대충 무슨 현상인지는 확인했다.”
방금 그 표정은 사라지고 어느새 진지하게 변한 얼굴. 설명을 시작하겠다는 듯 다가오라는 손동작에, 고개를 끄덕이고 김시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간 뒤, 이도영에게 혹여나 닿지 않도록 적당히 거리를 벌린 채 서자, 이내 김시우가 설명을 시작했다.
“감정이 공유되는 현상. 사실 이건 그리 희귀한 일은 아니다. 물론 그리 흔한 일도 아니지만, 찾아보려면 찾을 수 있는 수준이지. 간단하게 예를 들자면, 쌍둥이가 있겠군.”
쌍둥이는 영혼을 공유한다는 말이 있다. 한쪽이 아프면 다른 한쪽도 아프고, 서로가 느낀 감정을 일부 알아차릴 수 있다는 현상이 종종 보고되기도 하니까.
물론 허구에 불과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세계에서는 그게 실제로 가능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김시우는 그 현상의 원인을 간단하게 정의했다.
영혼의 연결. 태생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은 채 태어나는 쌍둥이는, 서로의 영혼이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마치 지금 너희들의 영혼처럼 말이다.”
정령술로 인한 결속. 감정 공유는 그 결속이 나와 이도영의 영혼을 쌍둥이처럼, 아니 더욱 긴밀하게 연결하고 있기에 벌어진 현상이라고 했다.
“물론 다른 영혼의 경우, 이 정도로 밀착한다 해도 그리 강한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측면에서 보면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구나.”
“그 말은….”
“영혼의 궁합이 신기할 정도로 좋다는 뜻이다. 본래라면 연결을 통해 흘러가다 대부분 걸러졌을 감정이, 거의 걸러지지 않을 정도로.
즉, 나와 이도영의 영혼이 지닌 파장이 서로 비슷하기 그지없다는 뜻이었다. 흘러 들어가는 감정이 거의 손실되지 않고 전달될 만큼.
‘…좋냐?’
그 말을 듣고 곁눈질로 이도영의 표정을 살피자, 궁합이 좋다는 말이 기쁜 듯 작게 웃음 짓는 모습이 시야에 담겼다.
그를 본 순간 느껴진 미묘한 감정에 괜히 찝찝해하기도 잠시, 이내 빠르게 떨쳐내고 김시우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러면 만약 이도영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연결됐다면, 이 정도로 감정이 전해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말인가요?”
“그래, 감정이 공유되는 것 자체는 그리 희귀한 일은 아니지만, 그 정도로 강하게 전달되는 건 아직 들어본 적도 없다. 일란성 쌍둥이조차 그 정도로 영혼의 파장이 비슷하지는 않으니.”
그 사실을 듣자 작게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왜 하필. 다른 놈 다 내버려 두고 하필 얘인 거냐.
다른 놈이면 그냥 계약을 끊어버리기라도 하지, 이도영은 그것도 불가능했다.
그 절망적인 사실에 속으로 한숨을 내쉬기도 잠시, 가만히 대화를 듣던 이도영이 돌연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전, 영혼의 궁합이 좋다는 게, 파장이 비슷하다는 걸 말하신 건가요?”
“그래, 그 뜻이다. 아마 대충 짐작 가는 게 있는 모양이구나.”
짧게 오간 대화에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이내 나를 바라보는 이도영의 시선에 대충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친화력, 처음 그를 마주했을 때부터 나를 어째서인지 친근하게 느끼게 해준 힘. 아무래도 그게 영혼의 파장의 일치율을 말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어라, 그런데 친화력이 영혼의 파장을 뜻하는 거라고?’
아니, 그러면 뭔가 좀 이상한데.
여태 친화력은 이 몸이 지닌 힘인 줄 알았는데, 사실 영혼의 파장을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나는 이 몸뚱이의 원래 주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내가 원주인, 루시아 그란데우스의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육신은 그녀의 것일지 몰라도, 내 영혼은 내 것일 테니까.
그 사실에 고민에 빠지기도 잠시, 이내 원인으로 추측되는 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시스템.’
원래는 활에 문외한이었던 나를 급격히 달인 수준까지 끌어올린 정체 모를 힘. 실제로 시스템이 각성하고 나자, 친화력이 더욱 강해지기도 했으니까. 시스템이 원인이라는 건 꽤 확실할 것이다.
그렇게 납득하기도 잠시, 이내 생각에 꼬리를 물듯 시스템에 대한 의문이 피어났다.
‘그럼 시스템은 대체 뭐야?’
여태껏 그냥 빙의 특전이라고 생각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애초에 내가 루시아 그란데우스의 힘을 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아니, 그렇게 따지면 빙의 자체가 수상하긴 하지만….’
빙의 자체도 그렇지만, 내 기억의 빠진 부분도 그렇다. 여태 앞일에 급급해서 되돌아볼 시간이 없었을 뿐이지, 수상한 부분은 꽤 많았다.
그 사실에 진지하게 고민에 빠지려던 순간,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시아야?”
“응?”
뭐하냐는 듯 나를 부르는 목소리. 살짝 걱정 섞인 이도영의 시선에 급히 둘러대는 말을 입에 담았다.
“아, 미안. 그냥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별거 아니야.”
뭐, 당장 답을 구해야 할 문제도 아니고, 지금 생각한다고 딱히 답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을 마치고 다시 김시우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생각은 끝난 모양이구나. 아무튼 너희들의 감정이 공유되는 이유는 대충 설명한 것 같으니, 이제 해결책을 설명하도록 하마.”
“네.”
김시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본론이었다. 원인 규명도 좋지만, 결국 내게 필요한 건 해결책이었으니까.
“일단 해결 방식은 몇 가지 있지만, 부작용 없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평범한 사례였다면 영혼의 결속을 바로 끊어내면 되겠지만, 너희들의 경우 그래서는 안 되니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봉인, 요즘은 꽤 안정화가 된 덕에 딱히 신경 쓰진 않았지만, 연결이 끊어진다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같은 이유로 아예 연결을 틀어막는 방법도 택해선 안 된다. 봉인의 안정화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 그래, 아침에 네가 말한 대로, 방벽을 끼워 넣는 방식이 좋겠구나.”
헤르메스의 조언대로, 아무래도 그게 최선의 방식인 모양이었다. 이제는 끊어진 연결에 괜히 속으로 감사의 마음을 품었다.
“다만 이 방식은 바로 해결할 수는 없다는 단점이 있겠구나. 준비는 내일이면 끝낼 수 있겠지만, 완전히 적용되는 데는 대략 이틀 정도가 걸릴 거다.”
“이틀이요?”
생각보다 짧은데. 괜한 호들갑이라는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조금 당황스러운 조건이 그 뒤를 이었다.
“그래, 그리고 그동안, 일정 거리 이상 떨어져서는 안 된다. 잠깐이라면 모를까, 몇 분 이상 떨어진다면 마법이 붕괴할 테니까.”
“…네?”
어, 그러니까. 이틀간 같이 붙어 다녀야 한다는 뜻인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되묻자, 이내 김시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농담은 아닌 모양이었다.
“거리는 꽤 유동적으로 변화하겠지만, 대략 반경 5m 정도라고 보면 되겠구나. 마법을 시전한 후, 이틀 동안은 그 이상 떨어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5m. 후하다면 후하지만, 한시도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매우 짧은 거리였다. 마찬가지로 이도영도 조금 당혹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그 이틀간은 특성이나 마나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마법에 영향을 줄 수도 있으니.”
‘아니, 무슨 제한이 이렇게 많아?’
수련이나 따라다니면서 시간을 때우는 선택지는 아웃. 그렇다고 각자의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도 무리였다. 손님용 방이 더럽게 큰 탓에, 생활하다가실수로 5m를 넘어갈 수도 있으니까.
‘같이 자는 건…. 아니, 이건 무리지.’
내 집이라면 몰라도, 남의 집. 그것도 친구 집에 와서 그러는 건 좀 무리가 있었다. 아니, 내 집이래도 그건 아니야.
물론 만약 같은 방을 쓴다고 해도, 그냥 같이 있을 뿐이지. 설마 내가 이도영하고 이상한 짓을 하거나 할 리는 없었다. 당연히, 절대.
하지만 그럴 일이 없다고 해도, 같은 방을 쓰기는 좀 그랬다. 예전이야 몰랐으니까 한 침대를 쓰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그리고 그때도 같이 자는 건 좀 무리였어. 어쩔 수 없으니까 했던 거지.
‘쟤 방은 좀 그렇기도 하고….’
하필이면 며칠 전. 아니, 며칠 전도 아니다. 고작 이틀 전이니까. 아무튼 그때 고백을 받은 장소였기에, 이도영에 방에 들어가는 건 조금 꺼려졌다. 그렇다고 내 방에 초대하기에도 좀 그렇고.
그렇게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기도 잠시, 이내 김시우가 희소식 하나를 입에 담았다.
“음, 그래도 한 가지. 기간을 조금 단축할 방법이 있긴 하구나.”
“방법이요?”
뭔데, 빨리 말해.
아침부터 밤까지는 그렇다 쳐도, 잘 때까지 같이 붙어있는 건 여건상 무리였기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다급한 눈으로 김시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감정이 공유되는 건 신체 접촉이 매개라고 했지. 그러면 쉽긴 하겠군. 접촉 빈도를 늘리면, 그 빈도에 따라 마법이 안정화되는 시간이 줄어들 거다.”
‘…아니.’
희소식은 개뿔. 그림의 떡이었다. 감정이 공유되는 것 때문에 신체 접촉을 최대한 피하는 중인데, 정작 그걸 막겠다고 신체 접촉을 해버리면 오십보백보이니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안정화 전에도 감정 공유는 막히는 거냐고 물으니, 그건 또 아니란다. 완전히 안정되기 전까지는 그런 쪽 효과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뭐, 둘이 데이트라도 하면 되겠구나.”
속이 끓는 기분도 잠시, 이내 들려온 말에 결국 어이를 잃었다. 멍한 표정으로 김시우를 바라보자, 이내 피식 웃은 김시우가 말을 이었다.
“안전이 걱정된다면 유진이에게 아티팩트를 빌려 가도록 하거라. 요즘 마교의 움직임이 크게 줄었다고는 해도, 혹시나 모르는 일이니. 조심하는 게 상책이니 말이다.”
‘…안 빌릴 거야. 데이트도 안 할 거고.’
“…예. 감사…합니다….”
속에서 솟아오르는 그 말을 내뱉지 못하고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움을 받긴 했으니까.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삼킨 채, 감사의 말을 입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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