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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화 〉 나들이(6) (142/167)

〈 142화 〉 나들이(6)

* * *

내게는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옷을 입어보는 건 당연히 이 한 벌로 끝나지 않았다.

첫걸음을 떼는 게 어렵지, 한 번 저지르고 나면 다시 그 행동을 반복하는 건 쉽다는 말처럼, 말 그대로 첫 성공을 거둔 두 여인이 폭주하기 시작했으니까.

“시아야, 이것도 입어봐!”

“그거 다음은 이것도 한번 입어보렴.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그것도 예뻐요! 아, 도영아. 너는 어때? 뭐가 더 예쁜 것 같아?”

“글쎄, 나는 전부 괜찮아 보이는데….”

그렇게 얼마나 인형 놀이의 바비인형 취급을 당했을까? 긴 여정의 끝에 다다른 종착지는 출발점이었다는 이야기처럼, 결국 최후의 선택을 받은 건 처음으로 고른 조합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입어본 옷은 어차피 다 샀다. 즉, 지금 이러는 건 살 옷을 고르는 게 아니라, 입고 나갈 옷을 고르는 거라는 뜻이다. 별 쓸데없는 토론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이게 제일 나은 것 같은데? 안 그러니?”

“네! 저도 이게 제일 어울리는 것 같아요!”

무언, 아니 유언의 의견 합치를 이뤄낸 두 여인이 한눈을 판 틈을 타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멀리 떨어지지 못하는 탓에 같이 정신공격을 받던 이도영이 황급히 내 걸음을 따라잡았다.

“…힘드네.”

“그, 그러게….”

피곤한 기색을 여실히 드러낸 내게 땀을 삐질 흘리며 맞장구치는 이도영. 그에 신경 쓸 겨를도 없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육체적인 피로야 당연히 크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막대했다. 몇 번이고 비슷해 보이는 옷들을 계속해서 갈아입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물며 익숙하지도 않은 여성스러운 복장임에야.

그러기도 잠시, 이내 고개를 들자 눈에 띈 이도영의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어째서인지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하는 모습. 그에 의문을 품기도 잠시, 내 현재 복장을 되새기자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고른 옷, 스트라이프 니트에 플리츠 스커트. 여기서 니트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스커트를 입고 있다는 것.

그리고 현재 나는, 평소 바지를 입었을 때처럼 마구잡이로 의자에 앉은 상태였다.

구겨져 말려 올라간 치맛단. 그리고 넓게 벌리고 있는 다리.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내 얼굴이 순식간에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봤어?”

“아, 아, 아니! 안 봤어! 미안!”

봤네, 이 새끼. 안 봤으면 사과를 왜 하는데?

황급히 옷매무새를 점검하며 밀려온 수치심에 이도영을 노려보기도 잠시, 이내 나보다 더 당황한 얼굴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 세 살배기 어린애도 속아 넘어가지 않을 반응이었다.

‘…어이가 없네.’

거짓말을 할 거면 차라리 제대로 하던가. 저렇게 티를 확 내면 어쩌겠다는 건지.

저렇게 미안한 티를 팍팍 내서야 뭐라고 하기도 묘하고, 그렇다고 아무 일 없는 척하기도 또 묘한 상황이었다.

‘…그래, 뭐. 보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이제와서 속옷 좀 보였다고 진지하게 뭐라고 하는 것도 우습지.

물론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보여주고 다니겠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이제와서 이 정도로 뭐라고 하기에는 이도영하고 쌓은 흑역사가 이미 너무 깊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바로 말을 걸 엄두는 나지 않았다. 괜히 어색해진 분위기에 침묵하던 도중이었다.

“시아야! 도영아! 뭐해?”

이쪽으로 다가오며 질문을 던지는 김유진. 분위기를 해소하는 등장에 안도한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직전까지의 기억에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이어진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월 언니 가신대!”

“오, 그래?”

귓가에 들려온 희소식에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 앉은 탓에 구겨진 치마폭을 툭툭 털어냈다.

“…따라와.”

여전히 이쪽을 마주치지 못하는 이도영을 살짝 째려보기도 잠시, 이내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낸 뒤 백소월을 향했다.

“가시게요?”

“응, 이만 가봐야지. 많이 놀았으니까.”

“안녕히 들어가세요! 언니!”

“그래, 유진이 너도.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

내 인사 이후 짧게 이어진 대화를 구경하기도 잠시, 이내 이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린 백소월이 갑작스레 내게 칭찬을 건넸다.

“그렇게 입으니까 역시 예쁘네.”

“아, 네…. 감사합니다.”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칭찬에 뻘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대답을 들은 백소월의 눈에 온기가 감돌았다. 따스한 미소를 지은 백소월이 말을 이었다.

“오늘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야. 저번 사건에서 많이 다쳐서 걱정하고 있었거든.”

“…네.”

떠올리기 조금 그런 기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백소월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이렇게 건강해 보이니 조금 마음이 놓이네. 혹시 아직 어디 불편한 곳은 없니?”

“딱히 없어요.”

“응, 그렇다면 다행이네.”

그 말에 담긴 진심에 괜히 속으로 혀를 한 번 찼다. 역시, 이런 감정은 그리 익숙하지 않았다. 뭐, 그중 제일은 역시 이도영이 보내는 감정이겠지만.

그 생각을 한 순간, 무의식적으로 이도영에게 향한 시선. 시야에 담긴 이도영의 표정을 보고 괜히 속으로 투덜거렸다.

‘진짜 왜 저러냐….’

백소월의 말에 진지하게 굳은 얼굴. 그때의 습격을 되새긴 모양이었다. 괜히 피어난 낯간지러움에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쓸데없이 껴서 데이트를 방해한 건 아닌가 걱정이네.”

“…예?”

뭔 소리야.

“아, 유진이도 있으니까. 데이트라고 하기는 좀 그런가? 그래도 떨어질 기미가 안 보이길래. 난 데이트라도 나온 줄 알았지.”

따스한 감정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이내 얼굴에 짓궂은 장난기를 매단 백소월. 가볍게 맺힌 미소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내게 손을 흔든 백소월이 자리를 떠났다.

“그럼 잘 있으렴. 오늘 즐거웠어.”

“아니, 잠….”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벌써 멀찍이 벌어진 거리. 그에 이어지려던 단어를 꾹 눌러 삼켰다.

백소월이 폭탄을 떨어뜨린 탓에 다시 싸해진 분위기. 그에 침묵하기도 잠시, 이내 김유진이 분위기를 돌리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으음, 그럼 얘들아! 이제 가자!”

“…어디를?”

설마 여기서 내 옷을 더 산다고 하면, 이도영을 데리고 도피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과 함께 살짝 긴장하며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시아랑 내 옷은 샀으니까, 이제 도영이 옷도 골라야지!”

아, 그나마 다행이네.

일단 옷을 더 사는 건 맞았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적어도 그게 내 옷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내 옷이 아니라고 쇼핑이 그리 즐거운 건 아니지만, 최소한 내가 그걸 입어볼 필요는 없을 테니까.

“나? 아, 아니…. 난 괜찮은데….”

“에이, 이왕 온 김에 한 벌은 골라야지!”

그러기도 잠시, 이내 이도영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감정 공유 없이도 무슨 생각인지 뻔히 느껴지는 눈. 구해달라는 감정이 가득 담긴 눈빛을 가볍게 무시했다.

‘지는.’

아까 전, 내 구조를 무시했던 업보를 청산할 시간이었다. 질질 끌려가는 이도영의 뒤를 따라 피식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

“으음, 이건 어때?”

“아하하…. 별로 안 끌리네.”

김유진이 내민 옷을 본 이도영이 난감한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만도 했다. 김유진이 고르는 옷들은, 기본적으로 브랜드가 붙은 고가품이었으니까.

물론 김시우와 일하면서 받은 수당이 어느 정도 있으니 아예 못 살 정도는 아니겠지만, 이도영의 성격상 옷에 너무 과한 소비를 하는 건 조금 꺼려할 테니.

‘이래 봬도 부잣집 딸이라는 건지.’

안목 자체는 좋지만, 오히려 그게 더 문제였다. 그 안목에 걸리는 물건은, 기본적으로 명품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가격은, 나야 뭐, 넉넉할 정도로는 돈이 있으니 별 상관없지만, 이도영에게는 조금 무리가 가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그냥 가격이 부담된다고 말하면 되지 않나 싶겠지만, 그래도 그건 좀 부끄러울 테니까.

물론 나나 김유진이 생활 형편 가지고 뭐라고 할 성격은 아니긴 하지만, 원래 이런 건 어떻게 반응하든 딱히 약이 없는 문제였다.

‘자존심이 뭐라고.’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저번에 한 말을 되짚어보면 더더욱. 나와 동등해지고 싶다고 했던가? 그런 류의 말 말이다.

기본적으로 이도영의 마음속에는, 어느 정도의 열등감이 깃들어 있으니까. 물론 나쁜 쪽은 아니고, 보통은 향상심 쪽으로 작용하는 좋은 열등감이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게 발목을 잡고 있다는 거지.’

뭐, 그거 말고도, 괜히 입을 열어서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을 거다. 김유진의 성격상 그 말을 들으면 괜히 또 미안해할 테니까. 기껏 놀러 와서 분위기를 다운시키고 싶지는 않다는 거겠지.

“에휴….”

답답한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조금만 도와주는 건 괜찮겠지. 딱히 이도영이 예뻐서 도와주는 건 아니지만, 분위기가 불편해지면 나도 기분이 그러니까.

‘어디 보자….’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쉬운 해결책은 옷을 사주는 걸로 보이겠지만, 그건 악수였다. 만약 알아차린다면 자존심에 꽤 스크래치일 테니까. 그보다는, 스무스하게 상황을 넘기게 해주는 편이 나았다.

뭐, 그리고 굳이 김유진이 비싼 옷만 골라서 그렇지, 주변을 조금만 살피면 싸면서도 괜찮은 옷도 꽤 있었다. 다만 이도영에게 어울리는 건 찾기 힘든 게 문제지.

‘패션을 잘 모르는 것도 모르는 거지만, 일단 쟤는 머리카락부터 까다로우니까.’

하필 이도영은 머리카락이 녹색인 탓에, 그에 어울리는 색상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무난한 색상이 있다면 검은색 정도?

뭐, 얼굴이 얼굴이니 웬만큼 괴악한 패션도 소화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이왕 고르는 건데, 최대한 맞춰는 봐야지. 그리고 잠시 후, 그래도 꽤 괜찮은 조합을 골라낼 수 있었다.

상의는 검은색 반소매 맨투맨. 그리고 하의는 베이지색 면바지. 뭐, 그리 대단한 센스는 아니지만 무난한 수준까지는 되는 조합이었다.

‘적당히 어울리긴 하겠네.’

대부분은 얼굴이 캐리하는 거지만.

생각도 잠시, 이내 옷을 집어 든 뒤 이도영을 향했다.

“자.”

“응?”

놀란 표정의 이도영을 보며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이거, 입어보라고.”

“…시아 네가 고른 거야?”

“어.”

“시아가?”

내가 옷을 골라줄 줄은 몰랐다는 듯, 살짝 놀란 기색을 보이는 두 사람. 그러기도 잠시, 옷을 받아 든 이도영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응, 입어볼게.”

그리고 잠시 후, 탈의실에서 나온 이도영을 보며 작게 감상을 흘렸다.

“뭐, 나쁘진 않네.”

“그, 그래?”

말은 이렇게 했지만, 생각보다 더 잘 어울렸다. 다만 칭찬하면 왠지 지는 기분이라서.

괜히 쌀쌀맞은 척을 하며 고개를 돌리기도 잠시, 이내 김유진과 눈이 마주쳤다.

“흐으응….”

“…왜,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조금은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흐뭇한 표정. 예상치 못한 반응에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계산대에서 계산을 마친 이도영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감정에 괜히 눈을 피했다. 작게 침묵이 맴돌고 잠시 후, 이도영이 내게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딱히 감사 인사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냥 옷을 골라준 것뿐이니까. 그런 의미가 담긴 내 말을 들은 이도영이 환하게 웃었다.

“응, 그래도.”

“…그래, 그럼.”

분명 신체가 닿지 않은 상태임에도 선명하게 다가오는 감정. 그에 애써 시선을 피했다. 무뚝뚝하게 대답을 내뱉은 뒤 고개를 돌렸다.

*

“그래서 이번엔 어디 갈 거야?”

옷가게에서 나온 직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식사였다. 가볍게 끼니를 때운 뒤, 다시 길을 앞장선 김유진에게 질문을 건넸다.

“영화관!”

“영화관?”

“응, 며칠 전에 개봉한 영화가 있거든!”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말하는 김유진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영화관이라.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오늘 좀 걸었다고 힘들 정도로 나약한 몸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그대로였으니까.

그런 측면에서, 가만히 앉아서 화면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는 영화관은 최적의 선택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영화관에 도착한 순간 보인 팜플렛. 그 내용을 확인한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놀라 동그랗게 뜬 눈으로 김유진을 바라보았다.

“아니, 잠깐. 며칠 전에 개봉한 영화라고?”

이거 설마….

“응! 공포 영화야!”

어, 잠깐. 진짜 잠깐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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