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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5화 〉 나들이(9) (145/167)

〈 145화 〉 나들이(9)

* * *

술이라, 꽤 그리운 울림이었다. 이 몸에 빙의한 이후에는 딱히 알코올을 입에 댄 적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그에 근접했던 기억이라고 하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맡은 소독용 알코올 냄새 정도?

그걸 가지고 술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지만, 일단 성분 자체는 동일하니까. 물론 그때야 별로 그립지는 않았다. 아파 죽겠는데 술 생각이 나겠냐고.

‘뭐, 애초에 별로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니.’

그래도 술을 아예 안 마신 건 아니었다. 숙취가 두려워 만취할 때까지 마시지는 못해도, 이따금 생각날 때마다 홀짝이긴 했으니까.

물론 내 주정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어서 최대한 자제하면서 마셨지만.

뭐, 그런 내게 간만에 술을 마실 기회라는 건 꽤 유혹적으로 다가왔다는 거다. 말을 꺼낸 김유진이야 설명할 필요도 없을 거고.

그나마 복병이라고 한다면 바른 생활 어린이 이도영이 반대하는 거였지만….

‘얘도 은근히 마셔보고 싶은 기색이었으니까.’

의외로 술에 대한 묘한 동경이 있었는지, 이도영도 딱히 거절하는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격하게 찬성하는 것까진 아니었지만, 암묵적인 동의를 표했다는 거지.

아무튼 그렇게 의견 합치를 이뤄낸 결과, 저택으로 돌아간 뒤 다시 모이기로 가닥이 잡혔다. 장소는 2층의 테라스. 술은 어떻게 할 거냐 했더니, 자신이 몇 병을 가져가겠다고.

‘…테라스라.’

미묘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장소에 괜히 찜찜함에 빠지기도 잠시,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런 걸로 하나하나 발목 잡혔다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짐을 정리한 뒤 이도영과 함께 테라스로 향했다.

“왔어?”

“어, 기다렸어?”

테라스에 도착하자 김유진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기대로 반짝이는 눈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으음, 조금? 아, 술은 이미 가져왔어!”

가볍게 생색을 내는 모습에 피식 웃기도 잠시, 이내 테라스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술들을 보며 당황에 빠졌다.

“몇 병을 가져온 거야?”

“으음…한 대여섯 병 정도?”

와우, 아무래도 술에 빠져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놓여 있는 술병들의 라벨을 확인한 순간, 그 농담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게 다야?”

“응! 왜? 조금 적은가?”

‘적을 리가 있냐….’

당연히 양이 적을 리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양은 과할 정도로 많았다. 병 크기를 보아하니 병당 대략 700mL는 되어 보였으니까. 문제는 그 종류였다.

“…양주밖에 없네?”

“비싼 게 좋을 것 같아서! 처음 마시는 건데 좋은 걸 마셔야지!”

그 천진난만한 대답에 이마를 짚었다. 그래, 말뜻은 좋았다. 아니, 말뜻만 좋았다. 처음 마시는 술이 양주라. 대충 어떤 일이 일어날지 훤히 보였으니까.

‘위스키에 브랜디, 거기에 보드카까지 추가. 그나마 어마어마하게 도수가 높진 않아서 다행인가.’

총체적 난국이었다. 물론 60도 이상의 초고도주는 아니었지만, 도수가 높을 수밖에 없는 증류주뿐이었으니까.

‘정작 맥주나 와인은 없네….’

나는 끽해야 맥주나 포도주 같은 양조주를 기대했는데, 여러모로 예상 밖의 선택이었다.

‘그나마 근처에 냉장고가 있으니, 어찌어찌 마실 수는 있겠지만.’

술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게 엄청 비싼 술은 아니었다. 수백만 원 급의 초고가 주류는 아니었으니까.

다만 그렇다고 해도 수십만 원은 되어 보였으니, 솔직히 아깝긴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아, 몰라. 그냥 마시지, 뭐.’

생각도 잠시, 이내 대충 달관의 마음으로 술병을 바라보았다.

뭐, 어차피 대마법사에겐 껌값이나 다름없을 거, 내가 잘 마셔주면 되겠지. 그렇게 합리화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얼음 하나 없이 휑한 테이블. 그나마 간식거리는 충분했다. 초콜릿, 치즈, 땅콩. 하기야 딱 보니까 음주를 즐기려고 만든 테라스였으니, 안주 정도는 있겠지.

“그럼 딴다?”

“…그래.”

가장 먼저 위스키의 뚜껑을 딴 김유진이 한 잔 가득 위스키를 콸콸 따랐다. 영롱한 황금빛을 보며 이도영이 작게 감탄사를 흘렸다.

“색깔 예쁘네.”

“응! 한 번 마셔봐야지!”

그리고 김유진이 가장 먼저 잔에 담긴 위스키를 들이켠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크게 뜨인 눈에 당황이 가득 맺히고, 이내 잔을 내리치듯 내려놓은 김유진이 기침을 토해냈다.

“흐읍! 커헉. 켁. 흐으윽….”

‘그럴 줄 알았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김유진의 등을 통통 두드려주었다. 한참을 기침하던 김유진이 이내 당황한 듯 황금빛의 액체를 노려보았다.

“이, 이게 뭐…. 흐윽. 써!”

그야 당연하지. 아무리 낮아도 40도는 되는 걸 아무 생각 없이 들이켰으니. 그 모습을 본 이도영이 들이켜려던 잔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어색한 정적 속에서 김유진의 고통 섞인 신음만이 울려 퍼지기도 잠시, 이내 흐른 눈물을 닦아낸 김유진이 입을 열었다.

“써, 따가워. 이런 걸 어떻게 먹어….”

새빨개진 얼굴. 딱히 취한 건 아니고 피가 쏠린 탓이었다. 기침 탓에 뇌에 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듯, 투덜대던 김유진이 다시 잔을 잡았다.

“…켁.”

오기가 생긴 듯 호로록 다시 마셔보기도 잠시, 이내 목을 달구는 강렬한 알코올의 감각에 또다시 기침을 내뱉는다. 그 얼빵한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시, 시아야. 어디 가?”

“잠깐만.”

꼴을 보아하니, 이대로 마시라고 하면 며칠이 지나도 한 병도 못 비울 것 같다. 술이 아깝지만, 간단하게 칵테일이라도 하는 수밖에.

테라스 구석에 놓인 냉장고 문을 열자, 한가득 비치된 음료가 시야에 담겼다. 얼음과 함께 음료 몇 가지를 골라 테이블로 돌아왔다.

“시아야, 그건 왜 가져온 거야?”

“마시려고. 잔 좀 이리 줘봐.”

김유진의 잔에 담긴 위스키를 큰 잔에 옮겨 담은 뒤, 그 위에 콜라를 따랐다. 얼음을 몇 개 넣어준 뒤 김유진에게 잔을 돌려주었다.

“자, 이제 마셔.”

“…오오. 되게 있어 보인다.”

묘한 탄성을 흘리는 김유진을 뒤로한 채, 이번에는 이도영의 잔을 빼앗았다.

“우, 우유도 넣어?”

“색은 그냥 우유 색이네?”

반 정도 담긴 위스키 위에 우유를 부어 돌려주자, 당황한 듯 내 손을 바라보던 이도영이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잔을 입에 가져갔다. 뭐, 긴장한 표정은 한 모금 마시자마자 사라졌지만.

“먹을 만해?”

“응, 맛있네. 고마워, 시아야.”

칵테일이라고 하기도 뭐한 간단한 레시피였지만, 감탄의 눈길을 받는 건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얼음을 넣어뒀던 내 잔을 쥐었다. 적당히 차가운 느낌이 드는 잔을 한 번 가볍게 흔든 뒤 입가로 가져갔다.

“그냥 마시려고?”

“그거 엄청 독해!”

걱정 어린 시선을 받으며 한 모금을 들이켜자, 이내 김유진이 대단하다는 듯 초롱초롱한 시선을 보냈다. 그 시선이 조금 부끄러워져 잔을 내려놓았다.

‘쪽팔려….’

다른 거라면 모를까, 술 마시는 걸로 이런 눈길을 받는 건 내 얼굴 가죽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

마치 넌 이런 거 피우지 말라고 하는 허세충이 되어버린 것 같은 오묘한 기분에 괜히 시선을 피했다.

*

뭐, 그 시선이 오래가진 않았다. 어느새 익숙해진 둘이 신나게 술을 마시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한참 후, 조용해진 장내를 보며 술을 홀짝였다.

멍한 머릿속에서 정신이 둥둥 뜨는 듯한 부양감이 느껴졌다. 이 몸의 주량을 모르는 탓에, 아무래도 조금 오버해버린 모양이었다. 뭐, 취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조금만 더 마실까.’

하나 둘 내용물이 비워진 병이 늘어나고, 이내 보드카 한 병만이 남은 테이블. 보드카를 잔에 부은 뒤 오렌지 주스를 섞었다. 간단히 완성된 칵테일을 들이켜며 주위를 살폈다.

‘김유진은…갔네.’

자리를 비웠다는 게 아니라 만취했다는 뜻이다. 새빨개진 얼굴로 도롱도롱 잠에 취해 있었으니까. 뭐, 테라스에서 잘 수는 없으니 언젠가 깨워야 하긴 하겠지만.

‘아, 모르겠다.’

멍한 머리 탓에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가닥가닥 끊기는 생각을 흘려버린 뒤 잔에 담긴 술을 한 번 더 들이켰다.

“…달아.”

오렌지 주스를 너무 많이 섞은 탓일까? 분명 보드카가 섞여 있을 텐데, 전혀 알코올의 쓴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괜히 짜증이 나서 남은 칵테일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니네, 맞네.”

속이 조금 뜨거운 걸 보면 알코올이 섞이긴 한 모양이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러기도 잠시, 이내 내게 다가온 이도영이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시아야, 괜찮아?”

“어? 나? 응. 괜찮아.”

조금 위험한 수준이긴 하지만, 아직 취하진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취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 잡생각에 비식비식 웃기도 잠시, 이내 떠오른 의문에 이도영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유진이는?”

“들여보냈어. 유진이도 많이 취했더라구.”

“…그래?”

나도 취했다고 취급하는 듯한 태도에 조금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나보다 김유진을 먼저 신경 썼다는 것도. 아니, 이건 아닌가?

‘알 게 뭐야.’

항의의 표시로 이도영을 노려보기도 잠시, 이내 풀린 시야에 이도영의 얼굴이 담겼다. 그 훤칠한 외모를 보며 속으로 작게 감상을 흘렸다.

“…잘생겼네.”

“…어, 어? 뭐라고?”

“흐응, 아무것도 아니야.”

속으로 말하려던 게 밖으로 흘러간 모양이었다. 내 말을 듣고 얼굴을 확 붉힌 이도영에게 즐거운 웃음을 보이자, 이내 이도영이 애써 표정을 굳혔다. 아무래도 내가 취했다고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아야, 이만 들어가자. 자야지.”

“아, 그래. 들어가야지.”

뭐, 그거랑 별개로 슬슬 들어갈 시간이긴 했다. 이미 술은 전부 마셨으니까 굳이 남을 필요도 없었고.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아….”

그렇게 땅을 밟고 일어선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풀린 다리 힘. 순식간에 휘청거린 몸이 급격히 앞으로 쏠렸다. 그 순간이었다.

­탁

“괜찮아?”

균형을 잃은 내 몸을 황급히 이도영이 잡아서 부축했다. 겨우 다시 일어서기도 잠시, 이내 잡힌 손목을 보며 짧게 읊조렸다.

“…아, 손. 잡혔네.”

잡힌 손목에서 흘러 들어오는 감정. 순수한 걱정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감정에 취해 멍하니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미, 미안. 쓰러질 것 같아서.”

내 말을 들은 이도영이 황급히 손을 뗐다. 그 순간 끊긴 감정 공유에 괜히 손목을 탈탈 털었다.

‘기분, 나쁘진 않았는데.’

아니, 오히려 좋았다. 애초에 이도영에게 신체 접촉 금지령을 내린 이유도 딱히 기분 나빠서는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좋아서라고 하면 모를까.

‘굳이 왜 그랬지.’

지금 생각해보니 딱히 막을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이쪽을 향한 순수한 애정에 휩쓸리는 건 꽤 행복한 일이었으니까.

‘뭐, 내가 마신 게 파라말은 아니지만’

감정이 공유되는 상황 자체는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이 생각은 여기까지.

저작권이 위험한 생각도 잠시, 괜히 아쉬운 기분이 들어 방금 잡혔던 손목만 내려다보았다. 그러던 도중, 한 가지 재미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시아야?”

기껏 일어났으면서 다시 의자에 앉은 내 모습에 이도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눈에서 아직도 느껴지는 걱정을 보며 악동처럼 미소를 지었다.

“자.”

“…응?”

이도영을 향해 내민 손. 내 손을 본 이도영이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당황을 품은 눈빛을 즐기며 입을 열었다.

“손, 잡아줘.”

“뭐, 뭐?”

“얼른. 팔 아파.”

멍하니 내 손을 바라보는 이도영에게 재촉을 건네며, 흐릿한 시야 너머로 흥미 섞인 웃음을 흘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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