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 비밀(1)
* * *
“으….”
다음 날 아침. 밀려오는 갈증과 속쓰림에 못 이겨 잠에서 깨어났다.
평소보다 딱딱하게 느껴지는 매트리스의 감촉에 겨우 눈을 뜬 순간, 시야 가득 찌르듯 쏘아진 불빛에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바닥?”
겨우 불빛에 적응하자마자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묘하게 평소보다 낮은 고도의 시야. 멍하니 그를 눈에 담기도 잠시, 이내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려 상황을 파악했다.
이상하게 등에 와닿는 감촉이 딱딱하다 했더니, 침대가 아니라 바닥에서 잔 모양이었다. 작게 납득하며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다.
‘이도영은 어디에….’
원래 바닥에서 잤어야 할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두리번대기도 잠시, 이내 귓가에 들려오는 물소리에 대충 추측을 마쳤다.
뭐, 먼저 일어나 화장실에서 가볍게 세안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보다 내가 왜 바닥에서 잔 거래.’
여전히 통증으로 멍한 머리를 굴려 전날의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분명 김유진이 술에 떡이 된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그 모습을 보며 혼자 몇 잔을 더 자작한 것도 선명하게 기억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아.”
그 후의 기억을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신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멍한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물결치는 기억을 되새긴 순간, 그 기억에 걸맞은 수치심까지 같이 밀려왔으니까.
“아…아니, 아니….”
홍수처럼 쏟아지는 기억에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막대한 정신적 데미지가 내 정신을 후드려 패기 시작했다. 차마 믿고 싶지 않은 기억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손, 잡아줘.’
‘업어줘.’
‘그건 괜찮은데.’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러니까 괜찮아.’
‘가지 마.’
머릿속 깊은 곳에서 하나둘 부상하기 시작하는 좆, 아니 주옥같은 어록들. 그를 떠올린 순간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이. 미친. 별….’
도저히 맨정신으로 버틸 수 없는 흑역사의 향연에 손발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숙취조차 이기지 못할 정도로 어지러운 머릿속. 눈을 감았음에도 떠오르는 기억에 몸을 돌려 베개에 얼굴을 푹 묻었다.
“후우….”
그리고 잠시 후,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숨을 들이마신 순간이었다. 어쩐지 익숙한 향취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신기하게도 긴장이 풀리는 느낌에 가만히 호흡을 이어가기도 잠시, 이내 제멋대로 굴러간 머리가 이 향취의 정체를 밝혀냈다.
“...!”
이도영이 쓴 베개이니, 당연히 이도영의 체취가 남아 있을 터. 그리고 체취야 계약 전에 항상 접했으니, 내게 익숙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번개처럼 몸을 일으켰다.
“이…미친….”
이미 한계를 훌쩍 넘은 수치심에 더해진 추가타.
이미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버린 지 오래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정도 열감이 느껴질 리가 없으니까.
괜히 억울해지는 기분에 아랫입술을 깨문 순간이었다.
끼이익
“힉!”
귓가에 들려온 경첩 소리에 다급하게 다시 바닥에 드러누웠다. 한계까지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이불을 머리까지 푹 둘러썼다.
어린애 같은 짓거리라는 건 인지하고 있지만, 도저히 지금 이도영을 온전히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행동에는 한 가지 큰 문제점이 있었다.
‘…잠깐만.’
베개뿐만이 아니라 이불에도 옅게 배어 있는 익숙한 체취.
물론 어제 이도영은 마나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으니, 마나 회복의 쾌감이 느껴지거나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근 한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마나를 회복한 경험은,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내 몸에 조건 반사를 때려 박아버린 모양이었다. 이도영의 체취를 인지하자마자 몸이 제멋대로 이완을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흡!”
머리까지 뒤집어쓴 이불 탓에 깜깜해진 시야. 그 탓에 더욱 선명해진 후각.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익숙한 체취가 맛이 간 정신을 한계까지 내몰았다.
그렇게 이불 속에서 눈이 팽팽 돌기도 잠시, 이대로 가면 뭔가 이상해질 것 같은 기분에 황급히 이불을 걷어버린 순간이었다.
“…아.”
“…그,일어났구나.”
이불을 걷자마자 이도영과 눈을 마주친 상황. 그 순간 밀려온 수치심에 결국 정신이 한계에 달했다.
한계를 한참 넘어 가루가 되어버린 멘탈 탓에, 오히려 회광반조처럼 맑아진 정신으로, 멍하니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죽을까, 그냥.’
*
어색한 아침 인사를 건네고 잠시 후, 나는 침대에 앉아 이도영이 이불을 개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
딱히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나는 물론이고, 이도영 또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적막을 깨고 이도영이 내게 질문을 건넸다.
“숙취는 괜찮아?”
“응? 아…. 괜찮아.”
걱정 섞인 질문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대답과는 달리, 숙취는 여전히 건재하게 내 머리를 깨부수고 있었다.
‘숙취야 마나 운용 한 번이면 해결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마나 운용은 마법이 완성될 때까지는 잠긴 상태였다. 스트레스 탓인지, 아니면 숙취 탓인지 쓰려 오는 속에 티가 나지 않게 위장 위를 손으로 꾹 눌렀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법이 완성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에 대한 의문이었다.
‘아니, 그런데 슬슬 끝날 때도 되지 않았나?’
애초에 시간제한도 끽해야 이틀이었고, 신체 접촉에 따라 그 주기도 짧아질 거라고 했으니, 슬슬 끝날 때가 되긴 했다. 시간이 단축된 원인을 생각하면 그리 달가운 사실은 아니었지만.
‘확인을 한번 해봐야겠는데….’
그렇다고 해도 정령술을 사용해서 확인해보는 방식은 각하였다. 만약 마법이 완성된 게 맞으면 상관없겠지만, 혹시라도 아직 미완성이라면 마법에 어떤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까.
뭐, 결국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가장 직관적이면서 확실한 방법. 다시 한번 신체 접촉을 해서 여전히 감정이 공유되는지 확인해보는 수밖에.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저기.”
“응,왜?”
말을 걸려던 도중 한번 머뭇거린 탓에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다행히도 이도영에게는 제대로 들린 모양이었다. 어색함을 누르며 이쪽을 돌아본 이도영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 잠시 손 좀 잡아볼래?”
“…뭐, 뭐?”
어째 과하게 당황하는 모습. 그에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 내뱉은 그 말, 퍽 익숙했으니까.
‘손, 잡아줘.’
머릿속에 어젯밤의 기억이 짧게 스쳐 가고, 이내 얼굴에 다시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전혀 그런 의도는 없었지만, 사실상 내가 내 입으로 흑역사를 다시 꺼내버린 상황.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숨기며 다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그. 감정 공유가 해결됐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그냥 손 좀 잡아보라는….”
“아, 아. 그, 그래. 그렇지. 응.”
내 대답에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당황을 숨기는 이도영.
대충 내가 왜 이 말을 꺼냈는지는 이해한 것 같지만, 유감스럽게도 한 번 어색해진 분위기는 이 정도로 가시지 않았다.
“후우….”
그 불편한 분위기에 잘근 입술을 깨문 뒤 작게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조져버린 분위기지만, 여기서 더 휩쓸릴 수는 없었다.
애초에 분위기나 흐름이라는 건 한 번 타버리면 더욱 심해지면 심해졌지, 나아질 일은 없으므로.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 일도 없는 척 능청을 떠는 게 나았다. 그게 내게 가능한지는 차치하더라도.
단순히 손을 잡을 뿐이지만 느껴지는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수치로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며 아무 생각도 없는 척 손을 뻗었다.
“그, 그럼 잡을게.”
“으, 응….”
그리고 잠시 후, 내민 내 손을 이도영이 가만히 감싸 쥐었다. 그 순간 등줄기를 스쳐 지나간 기묘한 감각에 살짝 몸을 떨었다.
“…!”
익숙한 감각, 항상 느끼던 마나가 회복되는 감각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탓에, 그리고 며칠간 경험하지 못했던 탓에 묘하게 낯선 느낌이 들었다.
괜히 어색해진 기분에 시선을 내리깔기도 잠시, 이내 목표했던 사실은 알아낼 수 있었다. 마나가 회복되는 감각은 느껴졌지만, 감정이 공유될 때의 그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공유될 정도의 감정이 없는 건 아닌 거 같고.’
슬쩍 이도영의 표정을 살핀 후에는 반쯤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얼굴에 못지않게 붉어진 얼굴을 보면, 나와 비슷한 감정을 한껏 느끼고 있다는 게 딱 보였으니까.
“…나는 더 안 느껴지는 것 같은데.”
“나도. 따로 전해지는 건 없어.”
그래도 혹시나 하는 불안에 질문을 던져봤지만, 아무래도 이도영에게도 내 감정이 전해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응, 끝난 거 같은데.”
간단하게 합치된 의견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잠시, 이내 서로 시선이 마주한 순간 황급히 잡힌 손을 떼어냈다.
감정 공유는 끝났으니 좀 나아질 법도 하지만, 어제 있었던 일 탓인지 어색함은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었다. 괜히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
그렇게 묘한 성취감과 여전한 불편함 속에서 침묵하던 순간이었다. 이내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이도영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마법도 완성됐으니까. 난 이만 가볼게.”
“그, 그래라.”
“…응, 그럼 이따 보자.”
대화 같지도 않은 대화를 끝으로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이도영.
그리고 잠시 후, 옆방으로 이도영이 들어가는 소리를 듣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감정 공유를 차단한다는 목적 자체는 이뤘지만, 정작 목표하던 어색함의 타파는 한참 더 퇴보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이제 끝났으니까, 곧 나아지겠지.’
나 답지 않게 희망찬 생각도 잠시, 이내 또 밀려온 수치심에 침대에 다시 얼굴을 박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