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비밀(4)
* * *
다음 날.
김유진은 오늘도 훈련에 따라오지 않았다. 어제의 그 핑계, 만날 친구가 있다는 핑계 때문은 아니었다. 오늘은 김시우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대마법사의 특훈이라.’
오늘 아침 들었던 이야기를 되새긴 뒤 잠시 침묵에 잠겼다.
타이밍이 공교롭긴 하지만, 김시우와 함께 있는 이상 걱정하는 일이 일어날 리는 없었다. 대마법사의 딸 사랑 수준을 보면, 훈련 말고 다른 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둘이 그런 사이라는 확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제는 조금 혼란에 빠졌었지만, 만약 어제 이도영과 김유진이 실제로 만났다고 한들, 그게 둘이 사귄다는 사실로 무조건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단둘이 약속을 잡았다는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내가 먼저였으니까.
심지어 그때 나는 밖에서 만나기만 한 것도 아니고 빈 집에 초대했으니, 객관적으로 보면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이 예시는 조금 잘못된 것 같긴 하지만.’
뭐, 아무튼 그렇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까놓고 말해서, 이도영과 김유진이 사귀거나 말거나 나와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물론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마나 회복에 조금 트러블이 생길 수는 있지만, 설마 김유진이 그런 걸로 내게 뭐라고 할 성격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나라는 정당한 명분이 있으니, 굳이 내가 이도영에게서 억지로 거리를 둘 필요도 없고.
카드드득!
“아, 이런.”
딴생각을 한 탓에 힘 조절에 실수해버렸다. 과녁을 꿰뚫다 못해 과녁을 고정하는 기계까지 관통한 화살.
‘저게 쉽게 망가지는 게 아닌데….’
수준 높은 방호 마법이 겹겹이 깔려 있어, 작정하고 부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김유진의 마법을 수백 번이나 얻어맞고도 멀쩡한 기계였으니까.
다만 그 기계가 이렇게 박살이 나게 된 원인은, 내 실력의 성장에 있었다.
본 실력이 B+에 달한 이후, A랭크까지 끌어올린 궁술. 그 상태에서 힘 조절에 실패한 나머지 과하게 깃든 마나가, 방호 마법조차 꿰뚫고 기계에 박혀버린 탓이었다.
‘…오늘은 텄나.’
물론 망가진 건 기계 하나뿐이니 딱히 수련을 이어갈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리 수련할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김유진이 없는 덕에, 딱히 수다를 떨거나 하는 시간 낭비도 없었으니. 이미 평소 하던 만큼은 채운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이미 집중은 다 풀린 지 오래였으니, 차라리 그냥 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치고 활을 내려놓았다.
“…심심하네.”
김유진이 자리를 비운 탓에 텅 빈 사운드. 어쩐지 허전한 느낌이 들어, 앉은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쾌청한 푸른 하늘을 보자 그나마 조금 속이 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훈련장에 자리잡은 채 혼자 시간을 때우던 도중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익숙한 목소리가 갑작스레 귀를 간질였다.
“시아야! 나 왔어!”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친 선명한 적발. 익숙하기 짝이 없는 활기찬 목소리의 주인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조금 의아한 기분이 들어 입을 열었다.
“되게 일찍 왔네? 도영이랑 같이 올 줄 알았는데.”
“응! 나는 먼저 집에 간다고 했거든!”
“먼저? 왜?”
한 번에 오는 게 편할 텐데. 뭐하러?
그런 의문에 대답하듯 김유진이 헤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제도 수련 같이 못 했는데, 오늘은 같이 있어야지!”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에이, 그래도 혼자 있으면 그렇잖아!”
조금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생각치 못한 배려였기도 하고. 뭐, 그래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신경 써줘서 고맙긴 하네. 고마워.”
“에헤헤, 뭘. 아, 그런데 쉬고 있었어?”
“어. 실수로 기계를 깨먹었거든. 그래서 잠시 쉬고 있었어.”
손을 들어 내가 박살 낸 기계를 가리켰다. 물론 망가졌다고는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적당히 수리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뭐, 김유진이 내게 수리비를 청구하지도 않겠지만, 청구한다고 해도 물어주지 못할 것도 아니었고.
“부서져? …헉! 진짜네? 저거 엄청 단단한 건데!”
고개를 갸웃하던 김유진이 이내 내가 만든 참상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그럴 만하긴 했다. A랭크에 달하지 못한 이는 흠집도 내기 힘들 정도의 방호 마법이 걸려 있었으니까.
“…힘 조절에 실수해서.”
“그래도 저걸 부쉈다는 거 자체가 대단한 거지! 얼마나 실력이 늘어난 거야?”
조금 뻘쭘한 기분에 작게 변명을 내뱉은 순간이었다.
감탄을 내뱉으며 김유진이 한 걸음 더 내게 다가온 순간, 갑작스레 느껴진 희미한 감각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
황급히 표정을 정돈해 원래대로 되돌렸다.
다행히도 김유진은 부서진 기계에 시선이 팔려 있는 덕에, 내 반응을 보진 못한 모양이었다.
잠시 다른 쪽을 향하는 척 고개를 돌린 채로 생각에 잠겼다.
‘이건….’
익숙하기 짝이 없는 감각이었다. 당장 어제도 느낀 감각이었으니까. 물론 어제는 조금 다른 느낌이긴 했지만, 내게는 매우 친숙한 감각이었다.
달콤한 헤어 에센스 향기와 우유 향의 체취 속에 숨은 익숙한 쾌감. 아주 옅지만, 분명히 마나 회복 시의 그 쾌감이었다.
물론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늘 같이 수련을 했을 테니, 소량의 마나가 몸에 밸 수도 있는 거니까.
그리고 김시우가 있는 이상, 그런 쪽으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테고….
그렇게 의심을 접으려던 순간이었다. 장난스레 볼을 부풀린 김유진이 내게 농담을 내뱉었다.
“도영이도 그렇고 시아도 그렇고, 너무 빨리 실력이 느는 거 아냐? 어떻게 따라가라구!”
“…으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한 질문에 침음성을 흘리던 도중, 문득 한 가지 의심이 뇌리에 꽂혔다.
‘…정말 없나?’
김시우의 팔불출이라는 특성에 정신이 팔려 있었는데, 그 특성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물론 확률이 높은 건 아니다. 원작에서 김시우가 이도영에게 보였던 반응을 고려하면 그럴 확률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만약 김시우가 이도영에게 눈독을 들였다면?
충분히 그런 변수가 발생할 조건이 있었다. 원작에 비해 김시우와 이도영이 만난 타이밍도 일렀고, 김시우와 이도영의 교류도 훨씬 깊어졌으니까.
그리고 색안경을 버리고 보면, 이도영은 꽤 훌륭한 사윗감이었다.
‘재능 넘치는, 대마법사가 될 확률이 높은 어린 마법사. 적을 둔 단체도 없으니 걸릴 것도 없고, 외모나 성격에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야.’
조금 숫기가 부족하긴 하지만, 그 정도는 오히려 애교로 봐줄 스펙. 그리고 애초에, 생면부지의 타인을 이렇게 공을 들여 가르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보면 꽤 의심스러웠다.
‘단순히 딸 친구라는 이유로? 아니면 특성 연구 때문에?’
그 때문에, 거의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을, 고작 딸 친구의 수련을 돕는 데 허비한다는 건 조금 납득이 가지 않았으니까.
점점 몸집을 불리는 의심에 김유진을 쳐다보기도 잠시, 이내 의심을 접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가정이었다. 이도영에게 고백 받았을 때 김유진의 반응은 전혀 질투를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렇다면 나를 굳이 데려올 리도 없고.
그리고 이도영 역시, 그 정도의 감정이 겨우 2주 만에 바뀔 리 없었다.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민망하지만, 그 정도로 얕은 감정이었으면 내가 휩쓸릴 리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럴 리 없어.’
단정을 내리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에 가득 찬 잡념을 내쫓듯 고개를 흔들기도 잠시, 이내 이쪽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김유진의 시선에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이제 뭐 할 거야? 수련하기는 좀 그런데.”
“으음…. 글쎄? 아직 저녁 먹기는 좀 이른데. 뭐 하고 놀까?”
다행히도 성공적으로 넘어간 듯, 저녁까지 뭘 하면서 놀지 고민하는 김유진을 보며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었다. 머릿속을 치고 올라오는 상상을 애써 무시하며 김유진의 수다에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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