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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화 〉 개학(3) (154/167)

〈 154화 〉 개학(3)

* * *

늦은 저녁.

­우웅!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수신된 메시지의 발신인을 확인한 박휘성이 메시지 함을 열었다.

[고맙다 잘 먹을게]

[응]

짤막하게 보낸 생일 축하 메시지에 걸맞은 짤막한 답신. 그를 확인한 박휘성이 황급히 답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빠르게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잘 지내고 있는지. 무슨 일은 없었는지. 부상은 다 나았는지. 혹시 덧나거나 하지는 않았는지. 요즘은 뭘 하고 있는지.

한참 동안 글을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던 박휘성이 이내 한숨을 내쉬며 메시지를 전부 지웠다. 묻고 싶은 건 산더미같이 많았지만, 정작 전송 버튼을 누를 생각은 들지 않았다.

“….”

유시아와 대화를 나누고 얼마 후, 박휘성은 신예화를 찾아갔었다. 신예화가 유시아의 병문안을 갔다는, 그리고 그때 자신의 자퇴 소식을 전했다는 말 때문이었다.

고운 말이 오가지 않았을 거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둘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정확히는 신예화가 먼저 유시아에게 시비를 건 것에 가깝지만.

물론 그때까지는 크게 진지한 마음은 아니었다. 아니,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실제로 그때는 적당히 중재할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신예화에게 찾아가 대화의 전문을 듣고 난 이후에는, 더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꽤 큰 오해가 둘 사이에 쌓여 있었으니까.

‘…싫다는 표현이라.’

그때 들었던 말 중 하나를 떠올린 박휘성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신예화는 유시아가 자신을 딱 잘라 거절하지 않고 여지를 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사실은 전혀 달랐다.

고백을 거절한 이후, 유시아의 행동은 여지를 주기는커녕, 자신을 꺼리는 게 훤히 보일 정도였으니까. 싫다는 표현이라면 이미 수십 번은 더 했고, 자신은 그를 보고도 포기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그게 좀 다르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오해의 원인 또한, 그리 복잡한 이유는 아니었다.

사정을 전부 설명한 뒤, 시아에게 사과하라는 말을 건넸을 때, 격렬하게 거부하던 신예화의 눈에서 비친 익숙한 감정.

그 감정을 눈치챈 순간, 박휘성은 더 이상 신예화에게 사과를 독촉할 수 없었다.

“….”

다시 한번 작게 한숨을 내쉰 박휘성이 이내 휴대폰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여전히 답신은 하지 않은 채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감정. 그 감정의 대상이 되는 경험은, 생각보다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 또한 똑같다는 걸, 아니 오히려 몇 배는 더했다는 걸 자각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이전처럼 유시아에게 태연하게 접근할 수 없었다.

‘부담을 주기 싫었다고….’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린 박휘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으니까.

부담을 주기 싫다고 했지만, 정작 그 말은, 들은 순간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그는 이제 알 수 있었다.

포기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정도로 얕은 감정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전처럼 행동한다고 그 감정을 실현할 수 있느냐 묻는다면, 나오는 답은 부정이었다.

물론 물러서는 것 또한, 상책은 아니었다. 물러선다고 해도 유시아가 그의 감정을 받아줄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둘 중 한 가지만 골라야 한다면, 적어도 그녀에게 불편하게 다가갈 일을 고르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을 마친 박휘성이 휴대폰을 아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여전히 답신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휴대폰을 바라볼 기분도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내 박휘성의 귓가에 만나기로 한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와 있었네? 아직 약속 시간은 좀 남았는데.”

조금 허스키한 음색, 그리고 의외로 그 음색에 퍽 어울리는 나긋나긋한 말투. 익숙하다면 꽤 익숙한 목소리였다.

사관학교를 자퇴하기 전, 동아리의 부장이었던 이. 그리고 이 한 달간, 몇 번 마인 토벌에 동행했던 상대. 백소월을 향해 고개를 돌린 박휘성이 이내 입을 열었다.

“소월 선배, 어서 오세요.”

“응, 안녕.”

온화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 백소월이 이내 박휘성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시 박휘성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백소월이 입을 열었다.

“저번에 마인 토벌을 갔을 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네. 기세가 더 날카로워졌어.”

“그때 얻은 성과의 체화가 끝났거든요. 아마 그 덕인 것 같네요.”

흡수한 마기를 모조리 체화시킨 덕에,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백소월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목격했을 때는 조금 놀랐지만, 이제는 꽤 익숙한 일이었다.

“…이제 당분간은 마인 토벌에 동행하기 힘들어질 테니. 좀 아쉽네.”

“아, 곧 개학이었죠?”

“응,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니까, 슬슬 개학할 때도 됐지.”

“뭐, 그렇긴 하네요.”

태연한 대답도 잠시, 이내 자신의 말을 되새긴 백소월이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박휘성에게 사관학교 개학 이야기는, 그리 달가운 화제는 아닐 테니까.

그를 깨달은 백소월이 황급히 화제를 돌리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그건 그렇고, 교관 중 협력자가 있었다는데. 혹시 어떻게 됐는지 아니?”

“이용완 전 교관 말인가요?”

“…으음, 아마 그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혹시 아는 사람이었어?”

“그럭저럭 아는 사이긴 했죠. 제 담임 교관이었으니까요.”

“아….”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당황한 상태에서 돌린 화제 또한 그리 좋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그날의 일을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더 나쁘면 나빴지.

결국 당황을 숨기지 못한 백소월의 모습에 피식 웃은 박휘성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별로 말하기 힘든 일도 아니고요.”

“…그래도. 미안해.”

그 말을 듣고도 여전히 미안한 기색을 비치는 백소월을 보며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박휘성이 질문에 대답했다.

“뭐, 일단 이용완 전 교관은 저희 길드 쪽에서 쫓긴 했어요. 유감스럽게도 잡진 못했지만. 하필이면 북유럽 쪽으로 밀항했더라고요.”

“…북유럽. 그러면 놓칠 만하긴 하네.”

박휘성의 말을 들은 백소월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폐허가 된 북유럽은, 내부에 들어간 이를 추적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무인지대라는 특성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통신의 단절이었다. 마치 다른 공간인 것처럼, 북유럽 내부와 외부는 통신이 완전히 끊겼으니까.

거기에 폐허가 되었다는 기본적인 인프라의 단절까지 합하면, 웬만한 노력으로는 내부에 들어간 이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런 점을 노리고 북유럽으로 향하는 수배범들도 꽤 있는 판국이었고.

“그래도 다행히 테러의 주범은 대부분 토벌했다고 하니까요. 배신자를 잡지 못한 건 아쉽지만, 적어도 체면치레는 한 셈이죠.”

“테러의 주범이라….”

박휘성의 말을 들은 백소월이 어째서인지 침묵에 잠겼다. 그 반응에 고개를 갸웃하기도 잠시, 이내 무거워진 분위기에 박휘성도 가만히 입을 닫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적막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도중이었다. 머뭇거리던 백소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네.”

평소의 수다스럽던 모습과는 달리 진지한 모습. 그에 약간 당혹감을 느낀 박휘성이 대답했다.

“아, 제게 여쭤볼 게 있으시다고 하셨죠?”

“…응.”

작게 고개를 끄덕인 백소월이 이내 미안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렸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백소월이 질문을 건넸다.

“마인이 되었을 때의 일. 괜찮다면 조금 자세히 들려줄 수 있을까?”

*

새삼스럽지만 박휘성은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 유일하게 마인화에서 풀려난 존재라는 건, 매우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었으니까.

애초에 마인이라는 존재는, 그 위험성에 비해 밝혀진 사실이 적은 편에 속했다. 생포한 마인을 심문해봤자, 마인의 대부분은 간접 계약자. 알고 있는 사실이 그리 많지 않았으므로.

그나마 연구를 통해 그 원인이 되는 존재가 있다는 건 확인할 수 있었지만, 간접 계약자들을 대상으로 그 이상의 정보를 얻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직접 계약을 맺은 마인의 신병을 확보한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또한 큰 의미는 없었다. 아무리 정보를 얻어내려고 해도, 계약을 맺은 마인의 입을 열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직접 계약자였으면서 마인화에서도 풀려난 박휘성은, 마인 관련 연구를 하는 데 최적화된 샘플이나 다름없었다.

대마법사의 비호와 대형 길드라는 배경. 아마 그 두 가지가 아니었다면 이미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딘가의 실험실로 납치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까지 박휘성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할 거라는 점이었다. 마인화의 직접적인 증거는 대마법사가 이미 처리한 상태였고, 이후에 남은 증거 또한 길드가 수습을 마쳤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마인이 아님에도 마기를 흡수해서 강해지는 존재 또한 주목을 사긴 충분한 연구 대상이었으니까.

박휘성이 굳이 사관학교를 자퇴하고 마인 사냥을 시작한 건, 그러한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충분한 강함을 지닌 상태라면, 굳이 가능성이 희박한 납치를 시도하기보다는 박휘성에게 연구 협력을 요청하는 게 더욱 합리적인 행동일 테니.

그리고 그러한 상황 탓에, 마인화와 관련된 화제는 민감한 화제일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인 이유로도, 또 안전 때문이라도.

이미 몇 번이나 마인 토벌에 동행했으면서도, 여태 백소월이 별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이유는 그러한 점을 배려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질문을 건넨 건, 박휘성 자신이 그 일을 그리 끔찍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걸 파악함과 더불어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았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겠고.

물론 그게 나쁜 건 아니었다. 결국 그가 불쾌하지 않았으면 하는 의도라는 점도 있지만, 애초에 딱히 생각하고 행한 것도 아니었을 테니까. 오히려 본능, 혹은 천성에서 나온 것에 가깝겠지.

“마인이 되었을 때의 일이요?”

“응. 떠올리기 힘든 일이라는 건 알지만,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렇게 말한 백소월이 물은 질문의 종류는, 그리 많지는 않았다.

마인화와 관련해서, 감정이나 정신에 영향을 받는 일이 있는지, 계약의 상대, 통칭 악마라는 존재는 지성이 존재하는지 등. 이런저런 잡다한 질문들.

참고로 질문에 대한 답은 둘 다 긍정이었다.

“…그래. 답해줘서 고마워.”

“아뇨. 별것도 아닌걸요.”

“그래도 내겐 중요한 질문이었거든. 덕분에 의문이 좀 풀렸어. 고마워.”

재차 감사를 전한 백소월의 얼굴이 이내 차갑게 굳었다.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한 안광. 방금 자신의 대답이, 백소월에게 어떠한 목표를 가져다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를 추론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백소월이 마인에게 집착하게 된 계기는, 꽤 유명했으니까.

‘분명 어린 시절, 타락 직후의 마인에게 부모님을 잃었다고 했던가.’

특이사항이 있다면, 흉수가 평소 친밀하게 지내던 숙부였다는 점이 있겠지. 마인으로 타락할 이유도 없고, 그녀의 부모님을 공격할 이유도 없는.

그리고 그 후, 그 마인은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췄다고 했다. 물론 지난 시간을 고려하면 이미 토벌당했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이미 이지를 상실하고도 남을 시간이었으니.

그리고 그건, 백소월은 자신의 원수를 갚을 수조차 없다는 말이었다.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대상에게 복수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오늘, 자신과의 대화에서 백소월은 새로운 목표를 찾을 수 있었다.

‘악마…겠지.’

그녀의 숙부가 어째서 그녀의 부모님을 공격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해결되고, 이내 해결된 의문은 마인화를 일으킨 존재에 대한 복수심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조차 아직 베일에 싸여 있지만,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복수의 대상으로 삼기는 충분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건, 박휘성에게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었다.

기억 속 어머니의 모습이 조금만 더 온화했다면, 조금 더 어머니에게 정을 붙일 수 있었다면, 아마 자신도 그녀와 비슷한 감정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악마는, 그의 어머니를 죽인 원수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그렇지 않았기에 그는 백소월이 품은 감정과 비슷한 것을 가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공감 정도는 가능했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상관없이, 목표가 되어줄 것을 찾는 상대. 어머니를 잃었을 때의 자신과 똑같은 모습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를 깨달은 순간, 박휘성은 한 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꽤 낯선 감정이었지만, 그 이름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동질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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