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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화 〉 불안(3) (159/167)

〈 159화 〉 불안(3)

* * *

“…허.”

훈련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느껴진 익숙한 감각에 작게 탄성을 흘렸다. 한 학기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한 농도의 마나가 훈련장 내부에 짙게 남아 있었다.

‘하기야 그때와는 실력 자체가 다르긴 하니까.’

고작 매직 미사일 몇 발 정도만 깔짝대던 때에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고 할 정도로 실력이 늘었으니, 딱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조금 짙은 농도이긴 했지만.

“…아니, 이거 단순히 마법 때문에 남은 게 아닌가?”

이전 검사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시험을 치를 훈련장은 이도영이 시험을 치렀던 곳이었으니, 단순히 잔여 마나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마나를 흩뿌린 걸지도 몰랐다.

아니, 반쯤 확실했다. 엘릭서로 권능의 누수를 막아버린 상황에서, 고작 잔여 마나 만으로 이 정도 농도가 나오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쓸데없는 짓을….”

괜히 어색해지는 기분에 작게 툴툴거리는 말을 내뱉었다. 배려라고 한 행동이겠지만, 사실 지금 내게 그리 필요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뭐, 이제는 마나 통이 그리 작지 않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애초에 오늘 이 시험에서는 시스템을 쓸 생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굳이 쓸 필요가 없지.’

B+랭크 정도도 이 시점에서는 과했다. 그리고 굳이 시스템까지 써서 그 이상의 실력을 보일 필요가 없기도 했다.

애초에 그 이상으로 나아갈 가능성도 없는데, 굳이 밑천을 벌써 깔 필요는 없으니까. 기록을 높게 세운다고 무슨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힘을 숨기는 설정은 꽤 유행이 지난 소재이긴 하지만, 이건 힘을 숨긴다고 하기도 뭐한 거니까. 엄밀히 따지면 시스템은 온전한 내 실력이 아니기도 하고.

그리고 시스템 보정을 받은 실력을 디폴트로 설정했다가, 언젠가 마나가 부족할 때 그 실력을 요구받으면 곤란하기도 했다. 물론 이도영이랑 떨어질 일이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를 더 찾자면, 시스템 보정 없는 내 순수한 실력을 측정해 볼 기회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대충 감이 오긴 하지만, 실제로 어느 정도인지 측정할 기회를 굳이 버릴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무튼 그런 이유들 탓에, 이도영의 배려는 내게 그리 쓸모가 있진 않았다.

“…뭐, 그래도 고맙긴 하네.”

그 실효성과는 별개로 이런 사소한 것까지 배려해주는 건 꽤 고마운 일이었다. 그리고 딱히 이득은 없어도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니니. 굳이 뭐라고 할 일도 아니고.

아니, 오히려 오랜만에 느끼는 청량감을 고려하면 이득이라면 이득이겠지. 각성 이후 마나 회복은 봉인도 안정시킬 겸, 대부분 신체 접촉으로 진행했으니까.

‘…뭐, 그게 이것보다 낫기도 하고.’

안정화라는 점을 떠나서, 청량감보다는 안정감이 더 취향에 맞기도 했다. 물론 신체 접촉이라는 과정상 필연적으로 어색한 분위기가 생기긴 하지만, 다른 방식이라고 안 그런 것도 아니고.

‘아니, 그리고 솔직히 이건 좀…그렇잖아?’

차라리 손을 잡는 게 낫지. 각성 전에 마나를 회복하던 방식은 솔직히 좀 민망했다. 물론 그땐 크게 신경 쓰진 않았지만, 지금 다시 하기엔 뭔가 좀 그랬으니까. 어차피 안정화는 잦으면 잦을수록 좋으니 굳이 다른 방식으로 진행할 필요도 없고.

­우웅!

생각도 잠시, 이내 송출된 활을 쥐었다. 불과 한 학기 전, 처음으로 활을 잡았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감각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고작 한 학기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째 꽤 많은 게 바뀐 기분이었다.

‘…애초에 2학기 때는 이미 자퇴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퇴하기는커녕 최대한 붙어 있으려고 자체적으로 수련까지 하고 있으니. 우습다면 우스운 일이었다. 뭐,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둘에게는 꽤 정이 들기도 했고, 그 탓에 이래저래 신경 쓰이기도 했으니까. 걔네들만 위험한 일에 가도록 내버려 두고 뒤로 빠지기엔 좀 뒷맛이 찝찝할 것 같았다.

아니, 그걸 떠나서 같이 지내는 게 꽤 즐겁기도 했다. 가끔가다 조금씩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요즘은 많이 익숙해졌으니까.

아무튼 그 탓이었다. 아까 김유진의 표정이 조금 눈에 밟힌 건. 뭐, 개인적인 비밀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친구 사이에 고민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도 좀 그러니까.

그리고 김유진은 평소처럼 방방거리는 게 어울리지, 죽상으로 끙끙대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뭐, 사실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어쨌든 고민이 있는 건 확실해 보였고.

‘고민 상담 정도는 해줄 수도 있지.’

걔도 내 고민 상담에 어울려준 적이 있었으니, 그 보답이라고 하면 되겠지.

물론 고민 상담이라고 하기엔 딱히 도움이 되지도 않았고, 사실 내가 요청했다고 하기보다는 걔가 캐물은 것에 가깝긴 하지만. 어쨌든 간에.

­키이잉!

“뭐, 그건 이것부터 끝내고 생각해 보기로 하고.”

생각을 마치고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한 학기 전 치렀던 시험에서 그랬듯 튀어나온 과녁들. 기억보다 한참은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는 표적을 보며 활시위를 당겼다.

***

“와아….”

감탄 섞인 신음을 내뱉은 김유진이 주위를 흘깃 둘러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꽤 소란스럽던 장내는 어느새 쥐 죽은 듯 조용해져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서로 떠들던 이들의 시선이 전부 한 곳으로 향해 있기 때문이었다. 시험 결과를 표시하는 스크린을.

“…말도 안 돼.”

“진짜 같은 1학년 맞아?”

“17단계도 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작은 웅성거림 속에서 여러 감정이 섞인 말들이 흘러나왔다. 경악, 자괴감, 질투, 그리고 결국 체념까지 흐르는 감정. 그 감정들을 확인한 김유진이 무심코 입을 열었다.

“…대단하네, 시아는.”

거의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 그를 들은 남성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대단해.”

그 말을 들은 김유진이 이도영의 표정을 잠깐 살폈다. 다행히도 방금 새어 나온 감정이 들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김유진의 눈에 이도영의 얼굴이 들어왔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한 점의 부정적인 감정도 비치지 않는 표정. 오히려 선망과 열정으로 가득 찬 시선을 확인한 김유진의 얼굴이 작게 굳었다.

“….”

부정적인 감정은 전혀 비치지 않는 표정. 잡티 하나 없이 맑은 얼굴이 마치 자신을 힐난하는 것만 같았다. 열등감이라는 건, 친구에게 품을 감정이 아니었기에.

시아가 강하다는 것 자체는 알고 있었다. 입학식 당시 치렀던 능력 평가는 사실상 제대로 된 기록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일 줄은 모르고 있었다.

아니, 원래는 이 정도로 압도적인 차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중간 실기 시험때만 하더라도, 어떻게든 맞서 볼 수준은 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와 자신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격차의 이유는 간단했다. 압도적인 재능의 차이. 한 달간 같이 수련하는 동안 질리도록 목격한 사실이었다.

단순히 천재 따위가 아니었다. 천재라고 불릴 정도의 재능은 김유진 자신에게도 있었으니까.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그녀 또한 어마어마한 재능의 소유자였으니까.

하지만 유시아가 지닌 재능은 그 궤가 달랐다. 단순히 진전이 빠르다 수준이 아니었다.

화살 한 발을 쏠 때마다 실력이 늘어나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압도적인 성장 속도는, 단순한 재능으로 설명하기에는 단어의 무게가 부족했으니까.

실력이 늘어난다고 하기보다는 이미 가졌던 실력을 되찾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성장을 보고 주눅 들지 않을 수 있는 이는 흔치 않았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김유진에게는 그 대상이 하나가 아니었다.

‘…도영이도 똑같아.’

유시아가 자신보다 앞선 곳에서 더욱 거리를 벌리고 있다면, 이도영은 점차 속도를 붙이며 거리를 좁혀 온다.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성장 속도라는 것이겠지.

빠르게 앞서 나가는 이와 무섭게 거리를 좁히는 이 사이에 끼어 있는 처지는 꽤 고달픈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김유진이 그 둘을 질투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열등감과 질투는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감정이었으니까. 타인을 향하는 질투와 달리, 열등감은 오롯이 자기 자신을 향하므로.

물론 지금 김유진을 괴롭히는 건 단순한 열등감은 아니었다. 그런 감정은 이미 이설화에게 처음 패배했을 때 어느 정도 극복했으니까. 패배 따위에 충격을 받던 시절은 이미 한참은 지나간 이야기였다.

지금 김유진이 느끼는 감정은, 정확히 말하면 열등감에서 촉발된 소외감이었다. 더 명확하게 말하자면, 소외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굳이 실력 때문이 아니더라도 가끔씩 김유진은 소외감을 느끼곤 했다. 시아와 도영이가 어울리는 것 자체는 보기 흐뭇한 일이었지만, 이따금 외로울 때도 있었으니까. 자신이 모르는 둘만의 추억이 있다는 게 가끔 질투 나기도 했다.

‘…첫 친구는 나인데.’

고작 몇 시간 차이에 불과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시아와 먼저 친구가 된 건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괜히 자리를 피해줄 때면, 가끔 조금 소외되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이도영도 유시아도 그런 생각이 전혀 없을 거라는 건 알지만, 감정은 그리 이성적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니까.

여태까지는 별생각 없었다. 하지만 개학 이후, 이도영의 성장세를 본 순간 김유진은 조금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같이 어울리는 둘은 어마어마한 성장세를 자랑하는데, 자신의 성장은 그에 비하면 느리기 짝이 없었으니까.

물론 고작 한 학기 만에 능력 측정 기록이 4단계나 더 올라간 것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김유진은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었다.

굳이 유시아나 이도영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첫 패배를 안긴 대상. 이설화조차도 따라잡지 못하는 수준이었으니까.

시아를 이기고 싶은 건 아니다. 도영이에게 따라 잡힌다고 해도 크게 아쉽진 않다. 하지만 그 격차가 너무 벌어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친구이니까, 더더욱 같은 위치에 서고 싶다. 그런 감정이 김유진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게 김유진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이었다. 김유진의 귓가에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결국 20단계까지 성공했네. 그 이상은 못 갔지만.”

“…저것도 우리는 평생 못 닿을 것 같은데? 아니, 저 실력으로 왜 사관학교에 온 거야? 전혀 올 필요 없어 보이는데.”

“아니, 오긴 와야지. 길드원 후보 구하러. 저 정도 실력이면 길드 하나 차려도 되잖아.”

“…미치겠네. 저걸 어떻게 이겨.”

소란스러운 대화 소리에 김유진이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올라가던 기록이 어느새 멈춰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교관의 지시에 따라 훈련실의 문이 열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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