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식사 (2)
저녁 시간이 다가오는 감방의 공기는 텁텁했다.
수백 명이 한 공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넓어서 그리 소란스러운 느낌은 아니었다.
아겔은 무릎을 매만지며 한쪽 벽에 기대 있었다.
날이 갈수록 몸이 늙어 가는 게 느껴진다.
하루하루를 놓고 볼 때는 어제와 큰 차이가 없었지만, 막상 고독의 시스템을 몇 번 겪고 나면 삐걱거리는 몸 상태가 느껴졌다.
‘쯧, 이젠 늙었구먼.’
고독에 처음 수감되었을 땐, 이렇게 흰 수염이 나고 몸이 쭈글쭈글해지기 전에 죽을 줄 알았다.
일반적으로 보면 그게 맞다.
고독에 수감된 죄수들은 보통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전부 죽어 버리니까.
3년 이상 버티는 자들은 1%도 채 안 된다.
늙어 가는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죽음과 서서히 가까워지는 걸 누가 기꺼워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곳에선 누구도 자신이 늙어 죽으리라곤 상상할 수 없다.
항상 날카롭게 서 있는 사망의 칼날이 언제 목 위로 떨어질지 모르는 일.
잘 때도, 먹을 때도, 쌀 때도 조심해야 한다.
‘버틸 수 있을는지.’
당연히 곱게 죽을 생각은 없다.
여기까지 왔는데,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퍽퍽!
한쪽에서 들려오는 죄수들의 대련하는 소음.
그들은 서로 몸을 부딪치면서 싸움 실력을 가다듬는 것 같았다.
조금 거리가 있긴 했지만, 아겔에게는 그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야, 정신 차려! 뒤질 것 같아도 덤벼!
-아픈 건 참아. 그냥 맞아 죽을 거야?
-스탑! 여기까지!
-헉헉…….
거친 숨결을 내뿜으며 대련을 시작하고 끝내는 죄수들.
아겔은 그 숨결 속에 숨겨진 냄새를 느꼈다.
‘피비린내가 여기까지 나는군.’
육체의 깊은 곳에서부터 피 냄새가 올라온다.
끔찍한 피 냄새가.
이건 몬스터 혹은 벌레를 먹어서 나는 냄새가 아니다.
‘그리고 다른 냄새도 섞여 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더운 숨결은 또 다른 냄새를 포함하고 있었다.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그런 몽글몽글한 향기가.
민감한 노인의 후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문득 자신을 부르는 소년의 목소리에 아겔이 대답했다.
“왜 부르느냐.”
소년은 단 한 순간도 아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마치 새로운 보호자라도 되는 듯이.
소년은 궁금하다는 듯이 질문했다.
“아까 있잖아요…… 왜 그렇게 말씀하신 거예요?”
소년은 서클끼리 죽은 자를 교환하여 먹는 장면에 아겔이 한 말을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겔은 주변에 누군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짧게 답해 줬다.
“저들은 반드시 죽을 거란다.”
“죽는다고요?”
꺼림칙한 표정을 짓는 소년이지만 솟아오르는 궁금증에 다시 질문했다.
“왜요? 그럼 저 아저씨들은 왜 먹은 거예요? 죽었으면 먹어도 되는 거예요?”
노인은 끌끌 웃었다.
“천천히 답해 줄 테니, 조급해하지 말아라.”
늙은 죄수가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꼬마 친구도 알겠지만, 이곳은 먹을 게 정말 부족하단다. 그건 알겠지?”
“네.”
“가끔 구더기죽이 나오긴 하지만 매번 나오는 게 아니기에 죄수들은 굶주리지. 그럼 눈에 보이는 몬스터, 벌레, 사람 중 하나를 먹어야 한다. 여기서 벌레는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니 제외한다고 치자꾸나.”
“……먹고 싶지도 않고요.”
“그래. 그럼 몬스터와 사람 중 택하기 쉬운 선택지는 무엇이냐.”
“……몬스터는 위험하니까 사람이 더 쉬운 선택이겠네요.”
“왜지?”
“여기선…… 많은 사람이 죽으니까요.”
영민한 소년의 대답에 아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다. 고독에선 사람이 떼로 죽어 나가지. 굶주림, 질병, 벌레, 몬스터, 혹은 같은 죄수에게 죽는다.”
하루에도 수천만의 죄수가 들어오는 곳이 고독이다.
그 모두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교도소는 거대하지만, 공간이 포용력과 반대로 삶은 비참하기만 하다.
“처음엔 죽은 사람을 먹겠지. 그리고 그다음엔? 시체를 먹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같은 감방에 있는 다른 재소자 집단을 사냥하지. 그러다가 결국 감방엔 하나의 집단만이 남는다.”
홀로 남은 집단은 또 배가 고프다.
그때부터 그들의 시선은 집단 내부로 향하게 된다.
“그 짓거리에 익숙해지면, 옆에 있는 사람도 식량이라고 생각하게 된단다. 동료가 아닌 식량. 마음속 가장 깊은 곳부터 그렇게 천천히 변해 가는 것이다.”
굶주림에 세뇌당한 그들은 옆에 있는 식량을 아끼지 않고 제물로 바친다.
이성을 상실하고 먹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며, 한 명씩 죽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강자만이 홀로 살육의 현장에 남는다.
“최후의 생존자 또한 죽는단다. 식량이 다 떨어졌으니까. 몬스터를 사냥할 줄 모르니 굶어 죽는 게지.”
“그래서…….”
“그래. 전멸이다.”
누군가 그 역겨운 짓을 시작하면 그 감방은 싹을 잘라 내지 않는 이상 전멸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싹을 잘라 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아주 달콤한 유혹이기에.
몬스터를 잡는 것보다 쉽고, 벌레를 먹는 것보다 나으며,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방법.
하나 그 실상은 죽음이 쳐 놓은 덫이다.
마음속 깊은 곳부터 천천히 중독시키는 치명적인 독.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세로가 물었다.
“그럼 저 아저씨들은 그 사실을 몰라서 먹는 건가요?”
“아니.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소년의 눈이 커지며 의문을 나타냈다.
“네? 그럼 도대체 왜…….”
“지금은 강한 힘으로 통제되고 있으니까. 서클장들은 특출난 능력을 갖춘 것으로 보이더구나. 누구도 섣불리 상대방을 죽일 생각은 못 할 게다.”
그러나 막강한 통제력과 각 집단 간의 비슷한 무력 균형으로 감방 내부가 규율을 갖춘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슬아슬한 균형 바로 밑엔 죽음의 골짜기가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한 번 그들이 매달린 줄을 흔들기만 하면 충분했다.
이곳 모두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일은.
꼴깍.
소년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할아버지는 그런 적이 있어요?”
세로는 아겔에게서 살짝 몸을 멀리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했지만, 몸이 저절로 반응한 것이다.
그가 만약 그랬다면.
당연히 믿을 수 없다.
혹시 먹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할지라도 그의 입에서 대답을 듣고 싶은 세로였다.
메마른 입술이 열렸다.
“나는…….”
아겔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근처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덜컹!!
감방의 창살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
죄수 수십 명이 감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캬하하, 아까 그 새끼 죽을 때 눈빛 봤어?
-봤지. 제발 살려 주세요……! 이런 눈빛이더라, 킥킥킥.
-베캄 님 말씀대로 1급 죄수들은 그냥 버러지야. 제대로 반항도 못 해, 큭큭큭.
그들은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처럼 서로 승전가를 부르듯 떠들며 들어왔다.
하급 죄수들인데도 복도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겔은 죄수들이 들어오는 감방문으로 주의를 집중했다.
저벅.
한 남자가 감방 안으로 들어섰다.
검은 가죽 자켓을 입고 머리는 짧게 민 남자.
허리에 검을 찬 그의 기도는 날카로웠다.
아겔은 단숨의 그의 무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검을 다룰 줄 아는 자이군.’
발걸음 소리만으로 알 수 있었다.
아마 고독에 들어오기 전부터 검을 다루었으리라.
검은 가죽 자켓의 남자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의 수하들과 감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막 감방으로 귀환한 그에게 서클장들이 다가갔다.
3명의 서클장들은 몇 마디 나누었고, 이야기를 마친 듯 마곤이 아겔에게 걸어왔다.
“영감님. 베캄이 왔습니다.”
“자네가 말했던 그 친구 말인가.”
베캄.
하급 죄수들을 통합하겠다는 포부를 지닌 사내라고 했다.
“예. 녀석이 오늘 저녁 식사를 나눠 주겠답니다.”
“그래?”
아겔은 놀랍다는 듯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고독에서 식량을 나눠 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자기도 먹고 살아남기 바쁜데 남에게,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집단에게 베풀 수 있는 자라면 그 능력이 대단해야 한다.
“서클끼리는 사이가 안 좋은 것이 아니었나?”
“딱히 그렇다고 보긴 조금 어렵습니다. 베캄은 모두를 수하에 두고 싶어 할 뿐 싸움을 걸진 않습니다. 로스나 년은 좀…… 싸가지가 없긴 합니다.”
“그렇군.”
마곤이 정중하게 물었다.
“그럼 식사, 함께하시겠습니까?”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아겔과 세로는 마곤이 이끄는 대로 서클들이 모인 곳을 향했다.
노인과 어린아이라는 새로운 조합에 죄수들의 시선이 몰렸다.
눈이 없는 아겔도 주위 사람들이 자리에 멈춘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관심이 쏠리는군.’
누군가의 눈에 띄는 건 고독에서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다.
거북한 시선 가운데 선 아겔은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아까 그 검사였다.
그는 거리낌 없이 손을 내밀었다.
“반갑다, 노인. 베캄이라고 한다.”
아겔은 어려움 없이 베캄의 손을 맞잡았다.
“아겔이라고 부르게.”
눈에 붕대를 감은 노인이 자신의 손을 정확하게 잡자, 베캄이 움찔했다.
이내 그는 놀란 기색을 지우며 씩 웃었다.
“마곤에게 들었다. 생명의 은인이라며? 고독에선 도통 늙은 사람을 볼 수 없었는데, 참 신기한 기분이군. 유물을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야.”
“나보다 늙은 인간은 아마 없을 걸세. 그보다 식사 대접을 한다고 들었네만.”
“그래. 오늘 잡은 게 좀 많아서 다른 서클들에게도 나눠 주기로 했지. 여기선 식량을 오래 보관할 수 없으니까.”
아겔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독에선 식량을 보관할 수 있는 곳이 극히 한정적이었다.
감방은 아니었고, 복도를 나가서 특별한 장소를 가지 않는 이상, ‘죽은 것’은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부패한다.
부패한 것들을 곁에 두면 질병이 생기니 그 전에 모조리 먹어 치워야 했다.
“오늘 메뉴를 가르쳐 줄 수 있겠나?”
“어려울 것 없지.”
베캄이 웃으며 말했다.
“고기다.”
“…….”
그 말에 옆에 선 세로의 침이 꼴딱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베캄이 사냥해 온 것이다.
고기의 형체는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이미 먹기 좋게 잘 도축해 놓은 모양새였다.
“큭큭, 너무 걱정하지 마. 독이라도 든 건 아니니. 평범한 몬스터다.”
아겔은 고기에서 올라오는 냄새를 맡았다.
베캄의 눈이 날카롭게 아겔을 살폈다.
“혹시 불편한가?”
“그럴 리가.”
아겔의 말에 세로의 눈이 커졌다.
베캄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고, 곁에 선 소년을 바라보았다.
“이런. 이렇게 어린 친구는 오랜만인데. 손자인가?”
“이전에 같은 감방을 썼을 뿐이네.”
베캄이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왼쪽 목을 은밀하게 훑어보며.
“친구도 같이 식사할 거지? 어른이 주면 먹어야지.”
세로는 그의 시선에 손으로 왼쪽 목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는 오늘 속이 좀 안 좋아요…….”
긴장한 낯빛이었지만, 소년은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말했다.
세로는 먹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베캄은 팔짱을 끼고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흠, 예의가 바르구나. 뭐 아직 어리니까. 뭐, 이런 걸 먹는 게 끔찍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익숙해져야 할 거다.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죽을 테니까.”
세로는 죽는다는 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끼고,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말을 마친 베캄과 마곤이 식사가 마련된 곳으로 걸어갔다.
아겔이 세로에게 말했다.
“한쪽에 가 있거라.”
“아…… 할아버…….”
세로가 손을 뻗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노인은 곧바로 몸을 돌려 마곤과 베캄을 따라갔다.
소년은 한동안 못 박힌 것처럼 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이내 손을 내리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
.
식사의 자리.
특별히 마련했다곤 해도, 그냥 사방이 돌바닥인 드넓은 감방 한군데에 자리 잡은 것뿐이었다.
마곤 서클과 베캄 서클이 모여 고기를 뜯어 댔다.
로스나 서클은 먹을 것만 받고 저들이 모인 자리로 돌아갔기에, 이곳엔 두 서클 죄수들만이 모여 있었다.
서클장인 마곤과 베캄 그리고 아겔은 한쪽에 모여 따로 식사하고 있었다.
사각턱을 열심히 움직이는 마곤과 느긋하게 고기를 즐기는 베캄.
아겔도 불에 구워진 고기를 천천히 씹고 있었다.
“이것 참 재밌군. 내가 복도에 사냥 나가자마자 이 감방에 왔다니.”
베캄은 몇 번 고기를 씹다가 내려놓은 아겔을 보며 말했다.
“아겔 영감이라고 했지. 궁금한 게 있다.”
“무엇이 궁금한가?”
“당신은 신기하군. 목에 급수가 안 쓰여 있어.”
아겔의 목엔 51이라는 숫자만 새겨져 있었다.
베캄의 눈썹이 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지?”
노인은 익숙하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여기 들어온 지도 꽤 오래되었지. 그땐 급수를 매기지 않았었다네.”
베캄은 놀랍다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렇군. 그럼 선배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그럴 것까지야. 그냥 늙은이일 뿐일세.”
베캄은 잠시 아겔을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고기 맛이 어때?"
아겔은 상대가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선에서 대답했다.
"그럭저럭."
“큭큭, 우리 애들 요리 실력이 기가 막히긴 하지. 입에 맞다니 다행이야.”
옆에 있던 마곤이 입을 열었다.
“고독에서 오래 사신 만큼 영감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다. 정글에서 원주민과 홀로 맞서시기도 하신 분이시니까.”
베캄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원주민들과 싸울 정도라니. 실력이 궁금해지는데.”
아겔은 아무렇지 않게 고기를 뜯었다.
“옛이야기일세.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늙은이지.”
그에 마곤이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옛날이라뇨, 영감님. 저를 구해 주신 것만 해도 겨우 1년 전입니다. 지금도 아주 정정하십니다.”
베캄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노장은 죽지 않는다. 뭐 이런 건가? 고독에 대해서도 아주 잘 알고 있겠어.”
“보다시피 눈이 없는지라. 듣기만 할 뿐일세.”
“눈 없이도 여기서 오래 살았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나. 정말 신기해.”
“하하하! 맞아! 영감님은 눈 없이도 고독에서 살아남는 진짜배기시라고!”
마곤이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아겔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속으로는 혀를 차고 있었다.
‘이런…… 쯧쯧.’
베캄이란 남자는 생각보다 집요했다.
그는 오늘 새로 들어온 아겔에 대해 알고 싶어 했고,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는 듯 질문을 던졌다.
마곤은 그런 작은 대화의 심리전을 파악하지 못한 채 자꾸 아겔에 대해 떠들었다.
“나를 쫓아오던 원주민만 10명가량 되었지. 내가 화살에 맞아 거의 죽어 갈 즈음에 영감님이 나타나셔서 그놈들을 전부 죽였다.”
베캄이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호오, 그거 대단하군. 원주민을 열 명이나? 대단해.”
“먼저 체력을 빼놓은 덕택이었지.”
“에이, 뭘 제 공치사를.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분은 좋습니다.”
마곤이 기쁘다는 듯이 고기를 더욱 빠르게 씹어 댔다.
‘흐음.’
아겔은 보지 못했지만, 식사 내내 베캄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
식사가 끝나갈 무렵.
베캄이 아겔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조용히 제 검을 잡았다.
베캄은 궁금했다.
이 노인이 정말 그렇게 강한 사람인지.
‘처음 보는 종류의 낙인. 그리고 원주민을 혼자서 잡았다고 했지.’
마곤이란 놈은 도통 거짓말을 모르는 의리에 죽고 사는 얼간이.
그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면 한 번 시험해 볼 만했다.
베캄은 천천히 살기를 내뿜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베캄의 살기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그저.
“읏, 뭐야. 왜 싸늘한 느낌이 드는 거지. 누가 내 욕을 하나.”
그의 살기엔 마곤과 같은 실력자도 이런 반응만 보인다.
그러나 ‘진짜’는 그의 살기에 반드시 반응한다.
3급 죄수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자들은 모두 베캄의 살기에 반응했다.
누군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기’로 내뿜었는데, 즉각 반응하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베캄은 노인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아겔이 입을 열었다.
“건강이 중요한 법이네. 몸 잘 챙기게.”
“그래야겠습니다. 요즘 먹는 게 부실하다 보니…….”
노인은 살기에 대한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담담한 얼굴로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 왔다.
“잘 먹었네. 대접해 줘서 고맙구먼. 꼭 갚도록 하지.”
베캄은 인사를 받고 나서야 살기를 풀었다.
“아. 그래. 잘 먹었다니 다행이야.”
“그럼.”
아겔은 베캄에게 인사를 건네고 마곤과 함께 돌아갔다.
돌아가는 노인의 뒷모습이 어둠에 가려지기 전까지 베캄의 시선은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걸까.’
살기를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저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마곤이 말한 것은 전부 거짓말이 될 것이다.
3급 죄수가 아니라면 원주민에겐 대항조차 못 할 테니까.
‘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살기는 뿜어낸 대상에 비해 너무 강한 상대에겐 제대로 된 반응을 끌어내지 못한다.
개미 한 마리가 인간을 죽이겠다고 선포하면 그게 무서울 리가 없다.
방금의 그 상황이 예시와 같다면…….
‘아겔 영감…….’
베캄은 봉두난발 노인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 * *
취침 시간이 다가오는 때.
세로는 서클들이 모여 저녁 식사를 마치는 걸 바라보았다.
꼬르륵.
배가 고팠다.
그래도 사람을 먹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하지만 소년을 괴롭히는 건 배고픔보다는 다른 사실이었다.
‘할아버지도…… 결국…….’
아까 듣지 못한 대답.
노인이 서클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답이 되었다.
세로의 마음에 천천히 불신의 싹이 자라났다.
그가 사람을 먹는다면, 결국 언젠가 식량이 부족해질 그 날에 자신을 잡아먹을 수도 있다.
‘이제부터는 따로 다녀야 하나…….’
그는 분명히 자신의 형을 구해 준 은인.
그러나 사실이 밝혀진 이상,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 잡아먹기 위한 신뢰일 수도 있으니.
고민 속에 빠져 있던 소년은 소변기를 느꼈다.
“화장실…….”
세로는 감방의 구석을 찾으려 했다.
화장실이 없는 감방에선 구석에다 볼일을 봐야 했고, 이 감방도 마찬가지였다.
저번 감방과 달리 이곳은 거의 10배가 넘는 크기의 감방이라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딨지…… 이쪽인가? 아, 여기다.’
오물의 냄새를 맡은 소년은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평범한 사람보다 후각이 좋은 소년은 냄새로 구석을 찾았다.
세로는 힘없는 발걸음으로 그쪽을 걸어가다가 먼저 와 있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흰 봉두난발에 해진 죄수복을 입고 있는 키 작은 남자.
‘할아버지……?’
아까 서클장들과 식사를 한 아겔이다.
그가 먼저 구석에 와 있었다.
세로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노인의 얼굴이 세로가 있는 곳을 향했다.
저쪽에서도 세로가 걸어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꿀꺽.
세로는 긴장했다.
이제는 형을 구해 준 은인이라기보단 두려운 살인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딱히 특별한 행동을 하진 않았다.
그저 세로를 한 번 바라보더니 구석으로 조금 더 걸어갔다.
그리고.
주르륵…….
“……!”
경악한 세로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
노인은 입에 손가락을 넣어, 구석에 쌓인 오물을 향해 아까 먹은 고기를 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