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마찰 (2)
로스나와 그의 수하들 앞에 나타난 늙은 죄수.
그가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아이를 돌려주게.”
로스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싫은데, 영감탱이? 내가 주웠으니 내 거야.”
로스나는 기절한 세로의 목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애를 혼자 다니게 두면 안 되지. 그건 그쪽의 책임이야. 이렇게 내가 주워 가도 문제는 없는 거라고.”
그녀는 손등으로 축 늘어진 소년의 볼을 쓸었다.
마치 귀한 보석을 만지는 듯한 손길이었다.
“이런 귀여운 보석은 찾기 어렵단 말이지.”
고독에서 그녀의 취향에 맞는 애완동물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계속 데리고 있으려면 같은 감방에 배정받아야 하는데, 감방의 배정은 세 달에 한 번 바뀌는 꼴이니 기다림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게 스스로 굴러들어 온 게 아니라면.
“목숨만은 살려 줄 테니, 꺼져. 오늘 내가 기분이 좋으니까. 3초 안에 안 꺼지면 죽여 버릴 거야.”
그녀는 즐거운 기색으로 소년을 허리에 끼고 돌아섰다.
뒤돌아 가는 로스나.
그런 그녀의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습군.”
발걸음을 옮기던 로스나가 멈추었다.
“제 손에 맞지도 않는 보석을 자랑하는 꼴이라니. 참 안타까운 일이야.”
“뭐……?”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라고. 자넨 그 아이가 뭔지도 모르겠지.”
로스나가 천천히 몸을 돌려 살벌한 얼굴을 했다.
평범한 죄수였다면, 그녀의 표정을 보고 두려움에 빠졌을 것이다.
그와 다르게 노인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내 장담하지. 그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 자넨 반드시 죽을 거라네.”
“하. 내가 죽어? 인제 보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노인네였구나.”
로스나는 살기 가득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말했다.
“날 도발해서 뭔가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이니?”
로스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소년은 괜찮아도 저 노인은 건드리지 않는다.
마곤 놈이 그를 건드리면 전쟁이라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기’를 모아야 하기에 대량의 유혈 사태는 그다지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다수를 대상으로 천천히 모아야 구슬에 생기가 차오른다.
감방의 죄수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면 생기를 모을 대상이 사라지게 되니, 아직 전쟁을 벌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 노인도 붙잡긴 해야 해.’
그녀의 주인, 악마숭배자들의 제사장이 직접 내린 명령이었다.
그는 흰 머리의 늙은 죄수를 붙잡아 놓으라고 말했다.
‘조폭 새끼 때문에 쉽지 않겠지만.’
상관없다.
그녀에겐 흑마법이 있으니.
그걸 사용한다면 저 노인이 제 발로 자신을 찾아오게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주둥이를 나불거리는 것밖에 없으면 꺼지는 게 좋을 거야, 쭈그렁할아범. 어휴, 근처에만 있어도 늙은 기분이네. 가자, 얘들아.”
“예, 로스나 님.”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다.
로스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을 들고 걸어갔다.
그때.
“커헉……!”
걸어가던 로스나와 수하들이 짧은 비명을 듣고 홱 몸을 돌렸다.
거기엔 자신의 수하 한 명의 목에 단검을 쑤셔 박은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로스나의 얼굴이 분노로 물들었다.
“너……!”
노인은 죽은 로스나의 수하의 목에서 단검을 빼냈다.
푸슉……!
수하는 피를 수도꼭지 물처럼 뿜어내며 축 쓰러졌다.
불시에 습격을 당한 것처럼 제대로 된 반항도 못 한 모습이었다.
아겔은 로스나를 보며 말했다.
“아이를 돌려주지 않겠다면.”
노인은 무참히 사람을 찔러 죽이고도 태연한 모습으로 단검을 닦았다.
“후회하게 해 주겠네.”
“뭐……?”
얼토당토않은 선포에 로스나는 기가 막혔다.
저놈이 지금 뭐라고 지껄이는 건가.
채찍 한 대면 사지가 뜯겨 나갈 것 같은 허약한 노인 주제에.
그러나 이성이 한 번 더 그녀를 멈춰 서게 했다.
‘잠깐. 저 새끼가 내 수하를 어떻게 죽였지?’
그 누구도 노인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죽은 수하도 목이 단검에 뚫릴 때까지 자기가 죽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이 자리에 함께 온 자신의 수하 10명은 전원 3급 죄수다.
그것도 엄선된 측근들이나 다름없다.
늙은이가 그들의 기감을 모두 속이고 한 명을 살해했다?
평범한 암살자도 못 할 만한 일을 그가 한 것이다.
로스나는 이를 아득 갈았다.
“진짜 죽고 싶구나, 노인네.”
분노가 차올랐지만, 당장 노인을 건드릴 순 없었다.
일신의 무력도 첫인상과 달리 평범치 않아 보였고, 노인을 건드리는 순간 마곤 서클과 전쟁이 시작될 테니까.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 테다.”
로스나는 짓씹듯 말하고 수하들과 함께 뒤돌아섰다.
돌아선 그녀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난 경고했네.”
“…….”
늙은이의 경고 따윈 무시하면서.
.
.
아겔은 사라지는 로스나 일행을 보고 뒤돌아섰다.
당장 몸을 날려 세로를 구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3급 죄수 다수를 상대하는 건, 지금 상황에서 몸에 무리가 갈 수도 있었다.
‘천천히 되찾아도 상관없겠지.’
저들은 세로를 죽이지 않을 거다.
아니, 애초에 죽이지도 못할 것이다.
어차피 상품은 안전하게 보관된다.
그가 예의 주시 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소장이 아겔을 상품에 붙인 건 단순한 보험이다.
‘그보다는 저 로스나란 친구…….’
로스나는 ‘악마숭배자’의 일원이다.
악마숭배자(惡魔崇拜者)는 고독에 사는 흑마법사가 만든 조직.
거기에 더 나아가 ‘악신’이라고도 불리는 자의 수하 노릇을 하고 있는 놈이다.
평범한 흑마법사가 아닌, ‘제사장’.
놈은 아겔을 노리고 있다.
로스나가 그와 비밀스럽게 연락하던 순간, 아겔은 그가 직접 자신을 잡으러 온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그럴 것이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겠지.
딱히 두렵거나 그렇진 않다.
상대가 중급 죄수들 사이에서도 정점에 올라선, 왕 같은 존재일지라도.
64년간 그 누구도 아겔을 붙잡은 적은 없었다.
누군가는 욕심으로, 시기함으로, 호기심으로, 분노로 노인을 쫓았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술래잡기는 그의 특기였고, 고독은 숨기에 너무나도 좋은 장소였으니.
벽 한쪽에 기대어 쉬려는 아겔은 자신을 향한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얼음장 같은 서리의 기운이었다.
‘음?’
그는 자신을 부르는 듯한 기운에 무릎을 짚고 일어나 감방문 근처로 다가갔다.
감방문은 대체로 위험하기에 근처에 아무도 없었다.
아겔은 문을 열고 나왔다.
좌우측에서 느껴지는 한기.
평범한 사람이 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귀신의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 생생했고.
아겔이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아리스. 오래간만이로구나.”
“역시…….”
빙결의 기운이 한군데로 집약되더니, 소녀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얼음으로 지어진 예쁜 소복을 입고 있는 아이.
사실 소녀라고 보기엔 키도 아겔보다 살짝 컸고 전체적인 모습도 숙녀에 가까웠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인사드리러 왔어요.”
명랑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기분 좋은 잔잔한 분위기의 숙녀였다.
이 교도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사람.
“지나가다가 날 본 모양이구나.”
“네. 그냥 지나치기엔 어둠의 농도가 짙어서요. 할아버지가 계신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요.”
아직 앳된 숙녀는 빙긋 웃음을 지었다.
“요즘 몸은 어떠세요, 할아버지?”
“걱정이란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구나.”
그의 말에 아리스는 숙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죄송해요.”
“이런.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느냐. 내가 늙는 것이 네게 무슨 책임이 있다고.”
아리스는 입술을 오므렸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도와드릴까요? 제가 소장에게 다녀올 순 없겠지만, 언니라면.”
아겔이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아서라. 네 언니는 바쁘지 않느냐.”
“그래두…….”
그녀는 아겔을 돕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 보였다.
“그럼 안에 있는 귀찮은 것들이라도 제가 정리해 드릴까요? 보니까 서클 끄나풀들이 몇몇 있는 것 같던데요.”
노인은 끌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가 정리한다는 건, 안에 있는 죄수를 싹 죽여 버리겠다는 말이었다.
“사양하마. 안에는 내 상품이 들어 있거든.”
아겔의 말에 아리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부럽네요. 누군지 몰라도 할아버지의 비호를 받다니. 이 정도 수준 감방이라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겠네요.”
마치 샘이 난다는 듯 심술궂은 표정을 짓는 아리스였다.
“과대포장하지 말거라. 그보다 언니에게 가는 길 같은데, 안부 전해 주거라.”
“네, 할아버지. 언니도 소식 들으면 무척 좋아할 거예요.”
아리스는 아겔에게 다가와 그를 꼭 안아 주었다.
한기(寒氣)를 무기로 사용하는 그녀였지만,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언제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주세요. 할아버지는 우리 은인이니까…….”
아리스는 포옹을 풀고 다정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서리로 화해 버렸다.
아겔은 선 자리에서 한기가 점점 가시는 걸 느꼈다.
그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메마른 목소리가 공허한 복도에 조용히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내가 못났기로 어린애들 손까지 빌릴 수 있겠느냐.”
아겔이 짊어진 짐은 자매가 손을 보태기도 버거운 종류의 것이었다.
5-6급은 되는 중급 죄수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무게.
노인을 노리는 건 중급 죄수뿐만이 아니니까.
아겔은 말없이 감방 안으로 돌아갔다.
그는 감방 안 한쪽을 걸어가며 아리스가 한 말을 떠올렸다.
아무도 그의 상품을 건드리지 못하리란 말.
그것도 옛날이지 지금 아겔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당장 소년도 자신의 손에 있지 않고 갈취당하지 않았는가.
‘나도 많이 늙었구먼.’
정면으로 싸웠던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다.
몸이 너무 늙었으니.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저 우회하면 될 뿐.
굳이 힘 뺄 필요 없다.
곧 취침시간이 다가왔다.
아겔은 자리에 눕지 않았다.
* * *
취침시간이 되어 로스나는 푹신한 가죽에 몸을 뉘었다.
복도에서 수하들을 희생해 잡은 4급 몬스터 블랙타이거를 잡고 벗긴 가죽.
그녀의 침대 노릇을 톡톡히 해 주었다.
로스나의 주변엔 그녀의 측근들이 누웠다.
취침시간엔 불립의 규칙 때문에 아무도 서 있을 수 없으므로, 곁에 자는 게 경호의 최선이었다.
‘노인네…….’
로스나는 취침시간이 되어서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늙은 죄수가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분이 삭지 않아서 잠이 오지 않았다.
로스나는 눈을 돌렸다.
그쪽엔 밧줄 같은 것으로 입과 손발이 묶인 소년이 기절한 채로 누워 있었다.
‘후, 괜찮아. 일단 꼬맹이를 잡아 뒀으니까. 오히려 조바심이 나는 건 저쪽이야.’
그저 취향 때문에 이 꼬맹이를 잡은 건 아니었다.
노인네와 꼬맹이는 이감되어 있을 때부터 함께 있었고, 아무래도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
인질로 잡아 두면 분명 쓸모가 있을 것이다.
‘뭐,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어디서 같잖은 협박을.’
확실히 자신의 측근 중 한 명을 순식간에 죽인 건 놀랐다.
그러나 대놓고 자신의 서클을 건드릴 수는 없을 것이다.
‘휘둘리지 말자. 노망난 미친 늙은이의 헛소리일 뿐이야…….’
적어도 취침시간엔 불가능하다.
일어나면 끔찍한 전기 충격을 받고 다시 쓰러질 테니.
괜찮을 거다.
로스나는 그렇게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나 노인의 경고를 무시한 건 생각보다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
…….
다음 날, 아침 사건이 발생했다.
“로, 로스나 님……!”
이제 막 잠이 깬 로스나를 깨우는 수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스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뭐야…… 왜 아침부터 소리를 지르고 지랄이야?”
“그게…… 저희 쪽 애들이 당했습니다!”
수하의 말에 로스나는 눈을 크게 떴다.
“뭐……? 지금 마곤이 공격해 온 거야?”
“아, 아닙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아침에 당장 공격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말인가.
모두 같은 시간에 기상할 터인데.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니? 거짓말하는 거면 죽어.”
“저, 정말입니다!
로스나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몇이나 죽었는지 확인부터 해야 했다.
“하아, 몇 명이나 죽었어?”
“그게…… 50명입니다.”
“뭐?”
로스나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50명?
말도 안 된다.
50명이 죽었다는 건 그녀의 서클원 4분의 1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로스나는 서둘러 자신의 수하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참상의 자리에 도착한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
그녀의 수하들은 관자놀이가 뭔가에 뚫려 죽은 채로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로스나의 눈이 표독스러워졌다.
‘그놈이다……!’
어제 죽은 자신의 수하와 똑같은 상처.
노인이 쓰는 단검에 당한 것이다.
로스나는 고개를 돌려 서둘러 한쪽으로 뛰어갔다.
‘꼬마……!’
이건 분명 그 노인의 소행.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발생했지만, 꼬마만 있으면 어떻게든 상황은 추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과 달리.
“씨발…….”
어제 꼬마를 묶어 놓았던 바닥에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잘린 밧줄만이 바닥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죽여 버리겠어……!”
분노로 이성이 날아간 로스나가 일어나 감방 중앙으로 향했다.
그녀의 분위기를 보고 수하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감방 중앙엔 마곤 서클과 베캄 서클이 모여 있었다.
아침 점호를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중앙에 마곤, 베캄, 그리고 아겔이 모여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다.
“빌어먹을 노인네!!”
독기에 찬 음성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로스나가 채찍을 들자, 깜짝 놀란 두 서클의 일원들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마곤이 눈을 부라렸다.
“이 미친년이 기어코…… 해보자는 거냐?”
“턱주가리는 빠져 있어! 내가 볼일 있는 건 저 늙은이뿐이니까.”
로스나의 시선은 오직 아겔에게만 꽂혀 있었다.
“너지. 내 수하들을 죽인 게.”
“…….”
아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부정하는 기색이라도 보이겠건만, 노인에겐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꼬마도 가져갔어. 맞지? 네가 그런 거야. 대답해-!!”
비명처럼 내지르는 로스나의 일갈에 노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랬다면 어쩔 텐가.”
“뭐?”
“내가 그랬다면 어쩔 생각인가 물었네.”
자신이 했다는 걸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는 대답에 로스나의 눈이 충혈되었다.
“너…… 너……! 당장 죽여 버리겠어. 지금 당장!”
“끌끌, 그러기 전에 잠깐 내 얘기 좀 들어주겠나?”
“또 무슨 소리를 하려……!”
로스나가 채찍을 꺼내 휘두를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마곤이 노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거기에 더불어.
스릉.
베캄이 칼을 뽑았다.
“베캄……? 비켜. 이건 저놈과 나의 원한일 뿐이야.”
“음, 진정하고 영감의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게 어때. 그의 얘기는 나도 들어 보고 싶군.”
베캄의 말에 로스나는 씩씩거리긴 했지만, 당장 달려들진 않았다.
그는 화난다고 달려들어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고맙네.”
아겔이 입을 열었다.
“우선 자네 둘에게 제안했던 것.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군.”
마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감님의 말씀이기도 하고, 저희에게도 너무 좋은 제안입니다. 저는 따르겠습니다.”
따른다?
로스나의 눈이 베캄에게 향했다.
베캄은 턱수염을 쓸며 고민하는 척했으나.
“흠. 피해가 생길 수도 있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하긴 해. 요즘 복도 근처에 식량 삼을 만한 몬스터가 거의 떨어져 가기도 하고.”
식량?
무슨 말일까.
“난 이 두 사람에게 제안하고 있었네.”
저들이 한 말에서 아무것도 유추해 내지 못한 로스나에게 노인의 목소리가 꽂혔다.
“50명은 이미 죽었으니 오늘 잔치를 열고.”
노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150명의 노예를 사로잡는 건 어떻겠냐고 말일세.”
로스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눈을 부릅떴다.
“……!”
그제야 그녀는 깨달았다.
힘의 균형이 깨져 버렸다.
50이란 숫자는 치명적이었다.
200명씩 비슷한 숫자로 균형을 맞추고 있었던 세 서클.
하룻밤 만에 50명이 사망하였기에 그녀의 수하들은 150명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두 서클이 임시로 손을 잡았다.
평소라면 서로를 견제했을 세 균형이 400대150이라는 불균형으로 변화한 것이다.
저 노인 하나 때문에.
아겔이 입을 열었다.
“될 수 있으면 살려 두게나.”
그 말에 두 서클이 슬금슬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로스나는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순식간에 식량이란 처지로 떨어졌다.
두 서클의 죄수들이 달리며 밀려온다.
공포가 밀려온다.
붙잡혀서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상태로 벌벌 떨고 있을 자신.
채찍을 들 힘도 나지 않는다.
두 배의 숫자를 이겨 낼 리가 없으니까.
밀려드는 수백 명의 죄수 사이에서도 아겔은 정확하게 로스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곧 비명이 가득한 참상이 시작되었고.
아겔의 입술이 말했다.
혹시 지금 후회하나?
로스나의 서클은 그날 몰살되었고, 200명의 식량이 생겼다.
* * *
CCTV실에서 [3-448 감방]을 보고 있던 호게스는 감자 칩을 뜯으며 즐거워했다.
“캬, 저 영감 또 저러네.”
자신이 바라는 바가 있으면 같은 재소자라도 망설임 없이 몰살한다.
그게 아겔의 방식이었다.
“적당히 좀 죽이라고 해도 진짜 말 안 듣네. 저 영감은 독방도 안 통하는 인간인데…….”
한탄하는 것처럼 보여도 호게스의 얼굴에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생명 윤리나 그런 것 때문에 살해가 금지된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애초에 1인 1실을 했겠지.
‘고독’의 죄수들은 전부 ‘자산’이다.
하나하나가 그분의 것이나 다름없다.
자산이 줄어드는 걸 좋아할 사람이 있긴 할까?
뭐, 원래 그분도 이렇게 될 걸 예상하셨겠지만.
호게스는 감자 칩을 한 움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우적우적…… 자, 그럼 저기 있는 놈들은 다 뒤지겠고…….”
아겔이 있는 감방 근처를 살펴보던 호게스는 복도의 CCTV에서 누군가 발견할 수 있었다.
“어? 이 새끼가 근처에 있었네?”
악마숭배자의 수괴이자, 악마의 종이라 불리는 다르키스.
그가 수하들을 이끌고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이.
“아겔 영감 찾으러 온 거려나? 옛날에도 그러더니 집요하긴 하네. 뭐, 다른 놈들에 비하면 애교 수준인가? 근데 얘가 몇 급이었더라…….”
호게스는 컴퓨터를 두들겨 그의 신상 정보를 띄웠다.
“이 새끼 나보다 높아졌네?! 쳇, 급수 변경은 또 언제 있었던 거야? 질투 나게 스리…… 최신화된 거니까 맞긴 하겠네.”
그는 괜히 화풀이하듯 감자 칩을 우걱우걱 씹었다.
[죄수명: 다르키스, 성별: 남]
[급수: 6급(중급 죄수)]
[복역 기간: 6년]
[특이사항: 악마숭배자란 집단을 조직해 이끌고 있음.]
신상 정보를 보던 호게스의 눈이 휘어졌다.
“이 새끼들이 급수 변경된 건 최신화했으면서 이건 최신화 안 했어?”
호게스는 키보드를 놀려 특이사항 밑에 짤막하게 적었다.
곧 그는 만족한 표정을 하고 다시 감자 칩 옆에 있는 맥주를 들이켰다.
[아겔과의 관계: 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