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두 번째 시스템 : 방출 (5)
교도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숙녀 아리스는 아겔의 곁을 걸으며 이야기를 했다.
“이번 방출은 어떠셨어요, 할아버지?”
“별것 없더구나. 귀찮은 모기들이 꼬였긴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아겔은 걸어가면서 질문했다.
“그보다 네 언니에겐 다녀온 게냐.”
아리스가 기쁜 기색으로 대답했다.
“네. 안부 전해 줬어요. 꽤 좋아하던걸요?”
“그럴 리가. 네 언니가 그럴 성격이 아닌데.”
“우리 언니가 얼음장 같긴 해도 할아버지 얘긴 정말 좋아해요.”
아리스는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봐요. 할아버지 얘기를 했더니, 갖다 드리라고 챙겨 줬어요.”
“그러냐.”
아리스의 손에 2개의 병이 들려 있었다.
“이건 비타민 음료수고, 이건 배고플 때 마시는 음료수. 포션도 드리고 싶다고 그랬는데, 최근에 남는 게 잘 없다고 해서…….”
아리스가 아겔의 손에 병을 쥐여 줬다.
아겔은 병을 받더니, 하나를 세로에게 던졌다.
“이건 네가 먹거라.”
“앗.”
세로는 얼떨결에 아겔에게 유리병을 받았다.
병에는 「비타민 파워!」라고 적혀 있었다.
아겔이 비타민 음료수를 줘 버리자, 아리스의 볼이 부풀었다.
“할아버지! 건강 챙기셔야죠. 할아버지가 드셔야 해요.”
“이 나이에 비타민 먹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래도요! 할아버지가 안 마셨다는 걸 알면 언니가 저 타박한단 말이에요…… 할아버지를 위해서 챙겨 준 건데…….”
“끌끌, 너무 뭐라 하진 않을 게다.”
아겔은 포만감용 음료수의 병을 따서 마셨다.
다 마신 병을 바닥에 버린 노인은 세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 마시고 뭐하느냐.”
“아, 네.”
세로는 병을 땄다.
퐁.
그런데 아리스가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봐서 뜨끔한 느낌이 들었다.
“……자, 잘 마시겠습니다.”
“흥.”
왠지 살짝 미움받는 느낌에 세로는 풀이 죽었으나, 아리스의 미모를 보고 다시 표정이 헤 하고 변했다.
소년이 보기엔 너무 아름다운 숙녀였다.
“헤.”
세로가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자, 아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아겔에게 달라붙어 속삭이듯 말했다.
“쟤도 상품이에요?”
“그래.”
그녀는 아겔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대략 알고 있기에, 상품이 뭔지도 안다.
아리스는 세로를 흘겨보며 말했다.
“쟤는 뭐예요? 아까 보니까 귀신도 못 이기던데.”
“라이칸스로프란다. 1급이니 귀신을 못 이기는 게 당연하지.”
“라이칸스로프요?”
아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희귀하다는 종족을 보게 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세로를 흘겨보는 그녀의 눈빛은 변하지 않았다.
“질투 나요.”
“뭐가 말이냐.”
“할아버지랑 종일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난 목숨 걸고 찾아와야 하는데…… 길도 바뀌어서 찾으려면 오래 걸린단 말이에요.”
5급 죄수인 아리스마저도 복도를 지날 때는 긴장해야 한다.
복도엔 뭐가 있을지 모르니까.
더 높은 급수의 죄수나 ‘악귀’를 만나는 순간 목숨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럼 안 찾아오면 될 것 아니냐.”
“섭섭해요, 할아버지. 이런 예쁜 손녀가 찾아오면 좋아해야죠.”
“내 낳은 아들이 없는데, 손녀는 무슨 손녀.”
“칫. 언니한테 다 이를 거예요.”
“그러려무나.”
“……정말 말로는 못 이기겠다니까.”
아리스는 팔짱을 꼈지만, 그래도 아겔의 곁에서 떨어지진 않았다.
“그나저나 할아버지. 제 감방 좀 찾아 주실래요? 투기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딱 방출이 시작돼서 어딘지 잘 모르겠어요.”
아리스의 말에 노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아겔은 이내 입을 열었다.
“우리 감방 가는 길에 있구나.”
“잘 됐다! 호호, 가는 길이 똑같네요. 같이 가요, 할아버지.”
“그래.”
.
.
.
아리스는 그 뒤로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며 아겔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겔은 아리스의 이야기를 대충 넘겨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와중, 누군가의 기척이 그의 감각에 걸려들었다.
휘릭. 팡.
순식간에 품에서 벌레 단검을 꺼내 던지는 아겔.
멀리서 피륙음이 들려왔고, 노인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 벽 근처에 숨어 있던 남자는 심장이 단검에 꿰뚫려 죽어 있었다.
아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흑마법사네요? 오늘따라 자주 보는 것 같아요.”
“너도 자주 본 모양이구나.”
“네, 방출 시작되고 몇 번이나 마주쳤어요.”
복도에 흑마법사들이 많다.
원래라면 금방 자신의 감방으로 돌아갔을 죄수들이 모종의 이유로 복도 군데군데 퍼져 있다.
마치 무언가를 잡기 위해 그물망을 펼친 듯이.
그물을 펼친 게 누군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차라리 근처에 있는 놈들은 싹 정리하면서 가야겠구먼.’
웬만하면 누군가와 부딪치고 싶진 않은 게 그의 심정.
개방이 있기까지 최대한 ‘생기’를 보존하고 싶은 아겔이었다.
이곳은 굳이 싸워 봐야 수명만 짧아지는 곳이니까.
하지만 아껴야 할 때가 있고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생기 아낀다고 귀찮은 일을 계속 피해야 할 이유는 없다.
아겔에게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힘이기에.
그래서 흑마법사의 기척을 느꼈을 때, 일부러 단검을 조금 늦게 던졌다.
혹시 연락책이면 근처에 있는 놈에게 연락하라고.
그물망을 펼친 본인이 온다면 도망치는 것도 고려해 봐야겠지만, 그 아랫것들이라면 전혀 문제없다.
아겔은 허리를 굽혀 단검을 회수하고 피를 시체의 옷에 문질러 닦은 다음 일어섰다.
“어서 가자꾸나.”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아겔의 뒤로 숙녀와 소년이 쫓아갔다.
“천천히 가요, 할아버지.”
* * *
“아, 진짜 이게 맞는 거냐고…….”
복도에서 누군가 한스러운 혼잣말을 내뱉고 있었다.
솔바린.
5급 죄수이며 악마숭배자의 일원인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더욱 헝클어뜨렸다.
악마숭배자는 지금 비상이 걸려 있었다.
악마의 종이자, 제사장인 다르키스가 직접 아겔을 붙잡으라고 명령한 것이다.
그녀는 사돌과 같은 조에 배정되었다.
“이런 백치놈이랑 할 수 있는 게 맞긴 한가.”
“헤…….”
솔바린의 곁에는 멍한 얼굴을 한 사령술사 사돌이 있었다.
그는 입을 못 다물어서 침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솔바린이 사돌의 뺨을 쳤다.
짝.
“억……!”
“어휴, 병신. 그러니까 왜 혼자 나댄 거야.”
아겔을 붙잡으려다가 귀신과의 링크가 강제로 끊기고, 그 대가로 백치가 되어 버린 놈이다.
그래도 실력은 변하지 않아서 본능적으로 흑마법은 아직 사용할 수 있었다.
명령은 잘 듣는 쓸 만한 도구가 되었다고 할까나.
하지만 상황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그 요상한 노인네를 잡는 건 그녀의 생각으론 절대 불가능에 가까웠다.
솔바린은 자신의 입술 피어싱을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애초에 찾는 것부터 불가능하잖아. 이 넓은 복도에서 어떻게 찾으라고……!”
합리적인 그녀는 제사장의 불합리한 명령이 싫었다.
제사장이 가끔 이렇게 감정적으로 명령할 때면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녀에게 이 명령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었다.
물론 앞에서 티를 내면 죽기에 별말은 하지 않았지만.
한숨을 푹 내쉬며 복도에 앉아 있는 솔바린에게 흑마법사 몇 명이 다가왔다.
“다녀왔습니다, 솔바린 님.”
“어, 둘러보고 왔어?”
“예.”
“어때, 흔적이라도 있던?”
“그 아겔이란 노인이 남긴 흔적은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
솔바린도 아겔이 누군지는 대충 안다.
직접 만난 건 아니지만, 다르키스에게 어느 정도 설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장시간 고독에서 생존하고 있는 죄수이며, 건방지기 짝이 없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매우 늙었다는 것도.
‘젠장, 이따위 설명만 가지고 찾으라는 게 말이 돼?’
고독에 들어온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그녀는 원래 사회에서 악명을 떨치던 7급 흑마법사였다.
가뜩이나 힘이 5급까지 봉인을 당한 것도 짜증이 나는데, 종속 관계를 맺은 주인은 가금 핀트가 엇나간다.
그래도 제사장보다 약하니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게 흑마법사의 생태였다.
물론 그의 말을 따르는 게 그녀에게 이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악마의 종이 갖춘 실력만큼은 진짜이고, 조금이라도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솔바린에게는 굉장한 이득이다.
“후우, 한 번 더 기회 준다. 이번에 못 찾아오면 너희 다 죽일게.”
“…….”
“너희도 인정하지? 쓸모없는데 살려 둘 이유가 없잖아.”
“……반드시 찾아오겠습니다.”
솔바린의 힘 빠진 말투에도 3급 흑마법사들이 몸을 떨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물러가는 흑마법사들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흑마법 술식이나 몇 개 저장해 놓으려고 했다.
혹시 모르니까.
“주력기는 다 됐고, 보조기 몇 개만…… 어?”
주문을 외우려던 그녀의 눈이 커졌다.
솔바린은 벌떡 일어섰다.
‘거, 걸렸어?’
근처에서 자신과 ‘링크’해 둔 수하 한 놈이 죽었다.
아겔처럼 보이는 노인을 만나면 신호를 보내라고 했는데, 죽는 순간 신호가 딱 한 번 도착했다.
마치 전화벨이 딱 한 번 울리고 끊긴 것처럼.
몇 번을 확인해도 링크를 타고 온 신호는 정확했다.
진짜 걸릴 줄은 몰랐기에 솔바린은 부들부들 떨었다.
‘지, 진짜 걸릴 줄이야.’
얼음낚시용 낚싯대로 바다의 대어를 낚은 거나 다름없었다.
만약 아겔이란 노인을 붙잡아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꽤 많은 보상을 뜯어낼 수 있을 거야.’
제사장님은 감정적인 만큼 일을 성공했을 때, 확실한 보상을 주었다.
노인을 잡으면 더 넘치는 보상을 주리라.
생기를 흡수할 만한 죄수 수백 명이라든지 말이다.
솔바린의 눈에 탐욕이 일었다.
“야, 새꺄! 가자!”
“헤……? 헤…….”
솔바린의 말에 사돌이 멍한 얼굴로 쫓아왔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신호가 왔던 곳으로 뛰었다.
신호는 바로 이 근처였다.
‘잡을 수 있다! 내 보상!’
달리는 그녀의 발걸음은 쾌활하기 그지없었다.
솔바린은 사돌과 함께 복도의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곳에 상어가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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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방으로 돌아가고 있는 아겔 일행.
아리스는 자신의 감방과 가까워질수록 아쉬운 마음에 소리 없는 한숨만 폭폭 내쉬었다.
‘좀 천천히 가시지…….’
아겔은 거침이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재깍재깍 상황을 판단하고, 절대로 낭비하는 시간이 없다.
아리스가 아겔을 알게 된 건 7년 전 고독에 처음 들어오게 되었을 때였다.
사회에서 유력한 지위를 지녔던 부모를 살해한 자매 범죄자라는 오명을 썼다.
당연히 누군가의 음모였다.
그러나 억울한 마음을 정리하기엔 고독이란 생소한 교도소에서 보낸 초창기가 너무 힘겨웠었다.
살아남기 위해선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고독.
생전 누구도 죽여 본 적이 없는 아리스에게는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더러운 것을 먹어야 하고, 씻을 수 없으며, 끔찍한 시스템이 온종일 괴롭힌다.
언니와 감방을 따로 배정받아 함께 있을 수 없어 더 어렵기도 했다.
어린 그녀는 고독의 시스템인 방출 때문에 복도에서 길을 잃었고, 그때 노인을 만났다.
-길을 잃었느냐.
훌쩍이고 있던 소녀를 등에 업어 데려다준 건 다름 아닌, 백발노인.
소녀는 그 당시 그 호의를 이해할 수도, 잊을 수도 없었다.
그는 그것으로 마치지 않았다.
자신이 고독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고, 언니 또한 ‘투기장’에 갈 수 있도록 힘을 써 주었다.
소장과의 거래를 통해서.
살기 위해서 죽여야 하는 이곳에서 왜 그는 자신을 살려 주고 호의를 베풀어 준 것일까.
물어봐도 돌아오는 건 침묵밖에 없었다.
이제 아리스는 더 이상 그때의 일에 관해 질문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태가 좋았다.
그냥 할아버지와 같이 있는 게 행복했다.
말로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오래오래 사실 거야. 반드시.’
7년 동안 노인을 지켜본 아리스는 확신했다.
그는 누구보다 끈질기고 포기를 모르며 굳세다.
아리스가 여태껏 고독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아겔의 그런 면모를 배운 덕이었다.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겔이 걸음을 멈췄다.
“할아버지……?”
근처에서 수백, 수천의 기척이 느껴진다.
거대한 것도 작은 것도.
복도의 앞뒤로 무언가 나타났다.
좀비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워어어어…….
-흐에에에…….
고블린, 오크, 트롤, 오우거 등.
각종 몬스터의 시체로 이루어진 군단이 아겔 일행을 가로막고 있었다.
“찾았다! 아겔!”
좀비들 너머에서 인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술에 피어싱을 한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흑마법사.
그리고 멍청해 보이는 남자.
흑마법사가 소리쳤다.
“여기서 도망칠 수는 없겠지! 붙잡아 주마!”
아리스의 눈이 호선으로 휘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적이 몰려왔지만, 기쁘다.
싸우는 동안 할아버지와 좀 더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아겔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아리스는 그 모습을 보고 아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제가 할게요, 할아버지.”
아리스의 발밑에서 얼음꽃이 자라나기 시작했다.